‘사장님 시간 되실 때 면담 부탁합니다’ 라는 톡이 오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쌓이고 할 이야기가 목 끝까지 찼다는 셈이니 일단 들어주는 것으로 문제 해결가능성이 절반 이상은 남아있는 셈이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오는 경우는 더 손 쓸 여지가 없는 퇴사 통보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력입사자가 다수 있었는데, 처음에 반짝 활약을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있는듯 없는듯 존재감이 약해졌다. 어느새 지치고 힘든 얼굴 표정이 보여 걱정이 될 무렵에는 짧은 제목의 이메일과 함께 회사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나 후배들도 새로 옮긴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만들지 못하고 다음 직장을 찾고는 했는데 이유는 다양했다. 그러나 다양해 보이는 이유들이 실상 경력 입사 라는 구조적 맥락에서 대부분 발생하고는 했는데 예상 했으면서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외부 용병으로서 검증이 끝난 이후가 첫번째 위기로 보여진다. 즉시 전력으로 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다는 것이 경력 채용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대부분 첫번째 임무에서는 기대를 충족하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기존 조직이 갖고있던 문제는 구체적이었고 모두가 인지하고 공감하고 있었기에 기존 문제가 조금이라도 완화되거나 해결기미가 보이면 그것으로 좋았고 고마워했다. 마케팅 팀장이던, 해외사업 팀장이던 업무를 빨리 파악했고, 기존의 공백이 채워지면서 만족도는 높았다. 게다가 몇몇 새로운 아이디어까지 제시라도 하면, 짧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골키퍼 없이 축구시합 하다가 일단 골대 앞에 누군가 존재하고 있음이 주는 안도감이랄까?
그러나 즉시 전투력이 검증된 이후, 새로 맡겨진 과제는 보통 낯선 성격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또 당연히 능숙하게 처리해주리라 기대들이 올라가 있다. 그러나 더 커지고 복잡하고 때로는 모호한 문제 일 수록, 본인이 갖고 있지않은 경험이 요구되고 조직내의 다양한 도움을 이끌어 내야 한다. 팀원들은 뜻대로 따라오지 않고, 조직내 협조도 미미하고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한다. 차라리 내가 혼자 하고 말지 하며 주말에 야근에 자기 몸을 불사르는 경우도 있는데 악순환의 시작이다. 지쳐가는 몸에 불평불만이 늘어나고 타자의 시각으로 던져주던 건전한 비판도 어느새 징징대는 투덜거림으로 비춰진다. 기존 직원들은 그와 일하는 것의 피로감을 느끼나 정작 당사자는 텃세와 보이지 않는 차별 탓을 하다가 이직을 고민한다. 처음에는 골대 앞에만 서있어도 박수를 치더니 이제는 매번 Super-Save를 요구하는 느낌이랄까?
높아진 기대치 못지 않게 낯선 의사결정 구조는 또 다른 위험요소가 된다. 새로운 상사와의 갈등은 여러 층위의 문제를 함축하지만, 낯선 의사결정 프로세스나 구조가 원인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글로벌 기업의 한국 지사에서 일하는 경우, 지역본부(regional HQ)와 밀접하게 일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녹녹하지 않다. 한국지사장에게 직접 보고를 하면서도, 동시에 해당 업무(function)의 지역 리더 에게도 보고하는 matrix 구조의 경우, 한국 현장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정말 많은 질문들을 던지기 때문이다. 내게는 너무나 당연해 일이지만, 전혀 배경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거나 한국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는 트집만 잡고 딴지만 거는 것 같다. 주말에 골프 접대를 하는 것도 비용처리를 안해주니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구차하고 치사해서 그냥 사비로 접대를 하는 경우도 있다. 대기업 지주회사나 그룹의 기조실과 일해야 하는 자회사에서의 경험도 비슷한 불평을 토로한다. 인사나 재무 의사결정의 통제가 하도 심해서 도와주는 사람인지 적인지 모르겠다는 불만에서 시작, 나는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고백들도 듣는다.
업무를 처음 맡는 상사를 만난 경우나, 회사의 대주주가 변경된 경우도 비슷한 상황일 수 있다. 처음에는 업무 히스토리를 공유하고 많은 이유와 의견을 전달했는데 실제 내 의견은 듣지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대로만 진행할 때 내 의견을 듣기는 했는지 의구심이 들고 답답하다. 원하는 보고를 준비하느라 리포트가 두꺼운 책이 되고 매일 야근하기 일쑤이거나, 일주일에 네 다섯 번씩 회의를 하고 주말에도 수시로 전화해서 아는지 모르는지 질문이 들어올 때면, 나를 못 믿는구나, 테스트하는구나 의심이 스멀스멀 몰려온다. 내가 해왔던 의사결정, 익숙한 권한들이 도전 받고 의심 받는구나 싶어지면,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질문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 회사에서 나는 무엇인가?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씨 인터뷰를 읽었다. 한국에서 이미 자신은 어떤 촬영장에서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일종의 왕이나 다름 없어서 감독한 테도 "너 이렇게 오래 찍으면 나 나간다."라고 말해도 상관없다고 한다. 다들 자신의 눈치를 보지, 자기를 "연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그것은 매너리즘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영화 ‘미나리’에 출연하게 된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무명으로 돌아가 연기력 하나로 승부 받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경력채용으로 입사했다는 것은 이미 검증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새로운 업무를 맡겼다는 것도 그러한 기대까지 얻어냈다는 것이다. 지역본부와 일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고, 지주회사나 그룹 비서실과 일해야 하는 위치까지 성장한 것이다. 이미 리더의 자리에, 또는 나름 검증된 나의 세계에 왕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연 자신만의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오른 것일까? 여러 상황들과 주변의 도움, 적지않은 운들의 연속으로 그런 위치에 오른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나의 경력이 오로지 나의 능력 때문인가? 그런 주관적인 착각, 그 관성의 힘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볼 일이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타이틀, 새로운 상사나 새로운 대주주를 만났다는 것은 이제 작은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다시 무명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라고 보는 것은 어떨까. 다시 무명이 되고 누군가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기회라고 바라보면 조금 달리 보일까?. 과연 새로운 감독의 연출 아래에서 내 연기력으로 나를 다시 검증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리더로써, 또는 경영자로서 내가 승부를 걸어야 하는 나의 연기력은 무엇인가? 확실한 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 내가 경험해서 익숙하고 확신하는 것이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 없음을 인정하고 기회에 감사하는 것으로 각오를 새롭게 해보자. 비록 짜증나고 불편하지만, 반면에 어떤 면에서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 신선하게 몰입해보는 것을 신인처럼 경험할 수 있다. 그래 이렇게 무명으로 끝나도 괜찮아 하고 쿨 하게 상황들에 다가가 보자. 어느덧 목까지 차오른 내 매너리즘을 벗어날 수 있다면, 기 싸움도 텃세도 정치도 아닌 지금 나는 단지 새로운 무대에서 서 있는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