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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artist Jul 27. 2017

Part 3. 3 해외봉사, 네팔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

네팔을 아시나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에 위치한 작고 가난한 나라. 저에게 이 곳은 아주 특별한 곳이랍니다.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첫 인연은 대학생 해외봉사 프로그램으로 네팔을 간 것이었다. 당시 스펙을 위해 해외봉사활동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등산에 빠져있었기에 조금 다른 방법으로 프로그램을 봤다.  봉사 후 포함된 히말라야 트레킹이 가장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부픈 기대와 희망은 현실이 되었고, 얼마 후 네팔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내려, 버스로 다딩이라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다시 낡은 버스를 타고 산 중턱의 학교에 도착하니, 몇 백 명의 학생들이 우리를 맞이하려 양쪽으로 대열을 만들었고, 교장선생님은 환영의 꽃다발을 봉사단원 한 명 한 명에게 걸어주었다.


프로그램은 크게 교육봉사, 공연봉사, 노력봉사로 이루어졌다. 팀이 준비한 교육봉사는 태권도, 영어, 한글, 과학, 체육수업이었다. 노력봉사는 학교에 벽화를 그리고, 계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공연 봉사는 봉사활동의 마지막 날 피날레였다. 공연을 위해 틈틈이 연습하고, 합숙을 하기도 했다.  우리의 선택은  K-pop 댄스, 태권무, 부채춤, 벨리댄스였다. 홍준표 부단장님이 취미생활로 벨리댄스를 하고 있어, 꼭 하고 싶다는 의견을 내셨다. 공연을 할 지원자가 없어, 지역적으로 가까운 내가 그 역할을 맡았다.

십분 남짓한 짧은 공연이었지만, 대충 하고 싶지 않아 벨리 학원을 다녔다. 그 학원에는 꼬마 숙녀부터 60대를 어르신까지 모두 여성이었고, 나는 금녀의 구역에 들어온 첫 번째 남자 손님이 되었다.


교육봉사는 여자 단원들이 역량을 발휘했다. 외국인 봉사자들이 마냥 신기하고 가만있지 않는 학생들을 상대로 준비한 수업을 착착 진행했다. 특히 인기가 있었던 수업은 과학수업이었다. 평소 보기 힘든 학습교재들이 등장하니 아이들의 눈빛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두 번째 인기 종목은 체육수업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인 봉사자가 영어로 말하고, 네팔 봉사자가 번역을 하며 진행하다 보니, 몰입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몸을 이용하는 수업에선 특별한 장애가 없었다. 붉은 먼지가 사방을 뒤덮고, 내리쬐는 햇빛이 약하지 않았지만 건강한 네팔 아이들은 한국 봉사자들을 압도하며 수업에 임했다.

노력봉사는 벽화팀과 계단 팀이 나누어 땀을 흘렸다. 미적감각보다는 튼튼함이 넘쳤기에 나는 계단 팀에서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시멘트를 반죽하며 안전한 계단을 만들기 위해 힘썼다.

봉사활동의 마지막은 축제였다. 네팔 학교 측에서 준비한 전통춤을 시작으로, 우리가 준비한 공연도 무대에 올랐다.

태권도복을 입으니, 실력에 상관없이 국가대표가 된 듯했다. 호신술 시범에서 악당으로 땅바닥을 구를 때는 온몸이 아팠지만, 아픈 내색을 할 틈은 없었다. K-pop 댄스로 신세대 한국의 매력을, 부채춤으로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벨리댄스는 소수 정예의 특별한 무대였다. 나는 검은색 망사 옷을 입고, 귀에 꽃을 꽂아 분위기를 독 구웠다. 아이들은 네팔 춤과 닮은 듯, 안 닮은 춤을 보면서 신기해했고, 나는 스스로가 이렇게 벨리를 추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공연 봉사의 흥분된 마음은 네팔 봉사자와의 이별로 환희에서 슬픔으로 이어졌다. 특히 홈스테이를 같이한 봉사자와의 작별은 눈물을 만들기 충분했다.

내 파트너 크리스나 기리와 정치, 경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네팔의 현지식을 함께 먹었다. 저녁에는 우페스, 프락까스와 몰래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봉사활동기간에 금주의 법칙이 있었지만, 넘치는 젊음의 에너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강메니저님 죄송해요~!^^;


네팔봉사활동은 조금은 불순한 의도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봉사라는 활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역의 청소년리더와 교류하고, 학교에  짧은 2주는 몇 달의 준비기간이 결코 아깝지 않은  시간이 되었다.

 네팔 청소년 봉사자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 살지만, 한국 대학생은 어린애 같았고 이타심에 관해서 훨씬 뒤처져 있었다. 안락한 환경은 신체적 발달과 사회적 안전을 보장할지 모르지만, 개인의 성숙과 정신의 성장은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을 네팔 봉사자들을 통해 느꼈다.

사랑을 주기 위해 갔지만, 오히려 그들의 꾸밈없는 미소와 친절에서 사랑을 받고 왔다.

사랑은 주는 것은 조건과 상관없는 것을 배웠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쓴 일기 중


생각 없이 보낸 2주일의 시간은 수십 년의 인생에서 아주 쉽게 잊힌다. 하지만 네팔에서 봉사를 하며 보낸 2주일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하루하루를 탄소라는 원소로 본다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하루는 이산화탄소처럼 투명한 공기중 흔적도 없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받은 시간은 추억이 된다. 높은 압력에 농축되고 굳어져 단단한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많은 것들이 지나간다.

떠나올 때의 두근거림과 설렘, 웃는 모습이 예쁜 네팔 봉사자 돌마, 같이 마신 한 잔의 맥주로 얻은 삘리리(술주정뱅이)라는 별명, 망사 옷을 입고 한 벨리댄스 공연,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며, 오른 3천 미터 푼힐트레킹까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에는 20명의 친구들과 함께 한 히말라야 만년 빙하보다 찐한 추억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네팔의 아기천사와 찬란한 미래를 꿈꾸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다딩친구들까지.. 아름다운 히말라야를 뒤로 한 체 복잡한 도시로 돌아간다... 쏟아지는 별들로 기억되는 히말라야의 밤을 뒤로한 채..

 내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남은 대학생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들은 많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남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본다.  사랑한다. 다시 보자!




짧고 뜨거웠던 네팔의 2주는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의 즐거움을 일깨워줬고, 봉사활동의 씨앗이 내 가슴속에서 들어왔다. 몰디브에서의 첫 직장을 그만두고, 미국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하야, 요즘 뭐하고 지내니?"

네팔 봉사 활동 때 함께 했던 강상삼매니저님의 전화였다.

"미국 갈까 하는데 아직 정해지진 않았아요."

"그럼, 네팔에 가서 일해보지 않을래?"

기존에 네팔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가기로 약속했던 분이 출국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취소를 했고, 급히 대체자를 찾던 중에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스스로는 몰랐지만 가슴속에서 자라던 씨앗은 이미 많이 커져 있었고, 결정은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네팔이라는 나라를 떠올리면 주로, 히말라야 고산을 떠 올리기 쉬운데, 코디네이터로 일 한 지역은 산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네팔과 인도의 국경 근처의 남부 지방이다.

마을의 이름은 살라히, 이곳은 대게 정글이거나 정글을 개간한 사탕수수 밭이 주산업인 아주 가난한 마을이었다. 하루 1달러의 소득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곳이었다.

바다를 접할 수 없는 내륙 국가인 네팔이 가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가난이 현실이 된 현지에서 삶은 몰랐었다.

산다는 것은 짧은 단기 해외봉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대학생 때 방문한 다딩이라는 곳은 정말 발전된 곳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1차선 포장도로를 중심으로 잘 사는 집에만 현대식 화장실이 갖춰져 있었으며,  여전히 많은 가구에 화장실조차 없어, 시냇가나 숲 속에서 배변을 해결할 정도였다. 그만큼 사회적 인프라나 교육이 부족한 곳이었다.


살라히는 날씨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4월부터는 치솟기 시작한 온도는 몇 달 간 40도를 수시로 넘나들었다. 겨울은 영하로 내려가지 않지만, 그만큼 보온에 대한 준비나 시설이 전무했다. 특히 계속되는 안개로 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이 며칠 밖에 되지 않아, 겨울이면 자살률이 가파르게 올라가기도 하는 곳이었다. 처음 도착하여,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전기가 들어오는 하루 몇 시간만 사용할 수 있었다. 어린이센터 내 우물에 물도 말라, 밖으로 나가 떠와야 했다. 고온 건조한 날씨를 버텨내며 몸무게는 3달이 되지 않아 10kg 넘게 빠졌다. 겨울은 길고 길었다. 가끔 수도 카트만두에 국제개발협력분야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면, 이 지역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경의 눈빛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열심히 모셔야 할 분은 현지 디렉터, 사로지씨였다. 젊은 시절, 사업으로 돈도 많이 벌고 배움의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향에서 사회활동을 하며, 어린이센터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코이카 지원 도서관 건축이 내 주된 업무였다. 그 외 카스트 및 사회 분위기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을 위한 문혜 교실 운영, 도서관이 없는 시골마을에 책을 대여해주는 이동도서관, 학교의 작은 공간을 빌려 도서관으로 운영하는 작은도서관 등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나는 사로지씨와 함께 현장 방문을 많이 했다. 30년 가까운 오래된 도요타 지프가 있었지만, 정글을 통과하고 비포장을 통과하는 것에 오토바이만 한 것이 없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타보지 못한 오토바이를 실컷 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하루 종일 비포장도로를 누비며 먼지도 실컷 마시고 몸은 힘들었지만,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네팔 아주머니들과 동네 주민들, 달려와 우리를 맞아주는 꼬마 학생들이 있기에 즐거웠다. 발품 팔아 고른 벽돌과 철제로 도서관이 점점 형태를 갖춰가는 것을 보는 것은 업무였지만, 큰 행복이었다.

'비제이다이(형)' 비제이바이(동생)

살라히의 날씨, 생활환경 등 몸을 편안하게 하는 요소들은 기존에 한국에서 누리던 것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첫 번째로 일하러 나간 우리를 기다리는 60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어린이센터에는 네팔 내전으로 인한 많은 고아와 카스트(신분 세습제) 제도에 의한 피해 아동, 경제적 사정으로 인한 부모의 돌봄을 못 받는 아이들까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하고 있지만, '함께'라는 개념, '사랑의 선순환'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왔지만, 자신들을 돕기 위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열어 나를 받아주었다.

어린 친구들은 나에게 '비제이'라는 네팔 이름을 지어주었다. 형이라는 의미인 '다이'가 합쳐져 난 꼬마친구들의 '비제이 다이'가 되었다.

일하러 가지 않는 날이면,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함께 옷을 입은 체 우물가에서 샤워를 했다. 네팔의 명절이 오면 요리도 함께 만들어 먹었다.

가끔은 도둑질을 하거나, 문제를 일으켜 석영 이모(현지 파견 직원)한테 혼쭐 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나이에 맞게 동생을 돌보고 센터 스텝을 도왔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성적도 잘 받아와 그들을 위해 힘쓰는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다이'가 형이라는 뜻이라면 '바이'는 동생이라는 뜻의 네팔어다. 살라히에는 내가 사랑하는 '바이'도 많지만, 나를 귀여워해주는 '다이'들도 많다.

그들은 날 '비제이바이'라고 부르며, 술을 마실 때, 운동을 할 때, 여행을 갈 때건 함께 하자며 챙겨주었다.

처음 우리들의 관계를 열어준 것은 술이라는 매개체였다. 국제 개발의 목적으로 현지에 와 있기에 술이라는 것을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술만큼 친구를 만드는데 좋은 것도 없었다.

같은 것은 먹고, 같은 것을 마셨다. 가끔 출처가 아리송한 음식을 줄 때면 당황스러웠고, 입담배나 환각성분이 있는 열매 같은 것을 내밀 때는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을 통해 '온전히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국적을 떠나 새로운 친구를 만드는 가장 기본이라는 것을 배웠다. 부모님에게 감사하게도 나는 아무 음식이나 소화시킬 수 있는 튼튼한 소화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먹기 싫어하는 음식은 몇 가지 있어도 먹지 못하는 것은 없었고, 동네를 주름 잡는 삼촌, 형들의 인기 있는 동생이 될 수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어린 친구들에게, 글을 몰라 수업을 받으러 오는 아주머니들에게, 도움이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열악한 환경을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장환경이 좋지 않았더라도 긍정의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잠자고 있는 긍정의 안테나를 세워 타인을 위한 작은 실천을 해보는 것 어떨까요?.  때로는 행복 가득한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의 한끝의 차이 일 뿐입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행복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험하고 주동적으로 느끼는 행위입니다. 저는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끼는 것이 공동체 감각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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