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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artist Jul 27. 2017

Part 4. 2 호주, 배낭여행 전초전

호주에서


미루어 뒀던 세계여행을 가고 싶었다. SNS를 뜨겁게 달구던 여행 동영상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네팔에 체육관을 짓느라 여행 자금이 없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취업을 할까 잠시 고민했다. 회사나 공장에서 백만 원 남짓한 월급을 모아 여행 가는 것은 몇 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20대 몇년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떠오른 곳이 호주였다. 많은 여행자들이 시급이 높은 호주에서 여행자금을 모아 장기여행을 떠났다. 

원하는 것과 상황이 같으니 그들의 방식을 벤취마킹 하면 되는 것이었다. 


비행기 표를 사고 남은 백만 원이면 충분히 천만 원, 이천만 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으로 세계를 누비리라.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나의 세계 배낭여행의 전초전은 시작되었다.


시드니공항에서 도심으로 오는 길, 동양에서 온 어리바리한 날 귀찮게 여기던 지하철의 티켓 파는 직원이 돈을 안 받고 티켓을 줬다. 지갑에서 50달러를 꺼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만 보고 거스름돈을 준 것이다. 50달러를 카운터에 내려 놓았을 때, 그녀는 옆의 동료랑 이야기하기 바쁘지 나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했냐고 다 가지고 왔다. 공항에서 시내까지의 표가 24달러였나? 작지 않은 돈인데... 잠시 망설였지만 불친절에 대한 대가로 내었던 50달러와 티켓, 거스름돈을 가지고 그곳을 떠나왔다.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고 Pitt street를 따라 시내 구경을 나와 걷다 보니, 오른쪽으로 오페라 하우스가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햇살 아래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도 조금 쉴까 하는 마음에 이리저리 구경을 하는데 갈매기가 오줌을 가져주고 떠난다.  앞에 앉아 있던 아가씨 두 명이 오줌이 낙하하는 순간부터 내 얼굴에 오줌이 안착하는 장면까지 다 봤는지 적지 않게 당황한다. 민망하여 얼른 손으로 쓱 닦아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된장! 기름에 넣고 튀겨버려야 정신 차릴 갈매기 녀석...

혼자 갈매기 욕을 했지만, 오늘 공짜표에 돈까지 삼킨 나를 벌하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어고 조용히 끓어오르던 마음을 내려 앉혔다.

게스트하우스  좁은 이층 침대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마음이 급해서 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는 죄책감에 그러는 걸까?  하루 종일 무언가에 쫓기듯 정보를 찾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텍스(Tax) 넘버 받고 폰도 구입했다. 이력서도 만들어 몇 장 돌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유통기한 몇 시간 남지 않은 우유를 마신 것처럼 찝찝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몰디브, 네팔에서 영어를 계속 사용했지만, 언어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약해졌다.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아서 그랬던 것일까? 호주 네이티브의 발음이 들어오지 않는다.

'음... 쉽지 않은 시간이 되겠어.. 얼른 숙소와 일자리가 정해져야 안정이 될 텐데.., 국가라는 배경이 바뀌었으니 힘들고 어려운 게 당연한 일이야, 약해지지만 말자! 바닥부터 끝까지 호주에서의 삶을 즐길 거야!'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다. 자신감과 침착함으로 천천히 나아가면 될 것이다.


시드니를 떠나 다윈의 바나나 농장을 거쳐 케언즈의 자전거 택시를 운전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세계여행을 조금 특별히 자전거로 하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자전거 택시를 하며, 체력도 키우고 돈도 버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마음에 들었다.


농장일 이 더운 날씨 속에 그저 힘을 쓰며 무진장 힘들다면, 이 패디캡(자전거택시)은 전략이 필요했다. 회사에서 자전거를 하루에 100달러에 빌려, 어디에서 영업을 할지 어떤 방식으로 할지 자신이 정해야 했다.

운이 좋지 않은 날이면 100달러를 채우지 못해 돈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더운 낮에 패디캡 이용할 사람은 거의 없기에 저녁 6시에 시작하여 새벽 6시까지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12시간을 일하였다.


아직 초반이라 그런지 영 성과가 좋지 않다. 하루의 라이딩으로 100불은 벌어야 본전인데.. 마이너스 될 것 같다..

힘내자! 자전거 연습이고 인생 연습이다.


빠샤라고 외쳤지만, 몇 시간 후면 지치기 일 수였다. '지친다 지쳐'

일단  실컷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평범한 잠을 반납하고 얻은 결과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가끔은 렌트비를 내려 돈을 다시 뽑아야 했다.

짜증 난다.  전역하고 서울에서 일할 때가 생각났다.

그 당시 나는 군대에서 듣기만 했던 아르바이트에 대한 경험을 충족 시키려 라식 수술 이후 잠깐 집에 머무르고 서울로 향했다. 아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신세 지기 싫었고 월세를 찾아 들어갔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얼마 일도 하지 못하고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밀려 잘리기도 했다. 돈이 없어 500ml 우유 하나만 먹고 하루를 버티고 주먹밥 하나로 생활을 했었다.

힘들고 배고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병대를 전역하고 건강하고 자신감 넘쳤던 나는 시무룩해져 집으로 내려왔었다.


지금 호주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잦은 도시 이동으로 가지고 있던 돈이라고는 이제 몇 십만 원도 남지 않았다. 적금이나 보험을 께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물론 그것마저도 호주에 있어 쉬운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지만...

가족은 물론 친구들에게 떠들어 놓은 것은 있는데,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 하루 하루가 힘들다고 몇 달을 보고 선택한 일을 그냥 포기해서는 안된다.  몇 년 전 멋모르고 덤비던 시절처럼 빨리 끓고 너무 빨리 식어 버려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카지노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며,  몇 불을 벌어 볼 거라고 타국의 외로움이 내리는 밤이슬을 견디어 낸다.  새벽바람을 견뎌 낸다. 낮에 비가 와서 그런지 온도가 많이 추워졌다.

이곳, 카지노를 찾는 사람들은  잠깐의 유흥을 위해 이곳을 찾아오는데, 나는 그들의 편의를 제공해주고 몇 불을 벌어보겠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

자본주의 속한 박대하라는 인간이 위치한 나약함인지도 모른다. 몸만 튼튼하게 키웠지 정신은 아직 많이 많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한국에 남아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든다.

아.. 이제 다른 지역으로 갈 비행깃값도 한국으로 갈 비행깃값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서 현실을 직시하고,  계획성 있게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여행은 어떻게 만들어서 갈지...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큰일이다.


오늘 진짜 대박인 날이다. 술 취한 십 대 세 명을 20분 넘게 페달을 굴렸는데, 20달러만 주고 나머지 40불은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각 개인당 20 X 3명이라서 60달러라고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영어가 어눌하고 케언즈 온 지 며칠 안되었다고 호구 대하듯 한다.  계속 우기길래 나도 살기를 내뿜으며 열변을 뱉어냈다.

 우연찮게 손님 중 한 여자가 음악을 튼다고 꽂아두었던 폰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 폰을 집어 들었다. "돈 안 주면 안 돌려줄 거야!" 20을 더 주었다. 화가 나지 않았더라면, 웬만해서 그냥 보내주었을 텐데,  날 가지고 논 것 같아 나머지도 다 받아내었다.  10분을 실랑이를 했지만, 덕분에 영어 연습 잘했다. 돈 없어 보이는 현지 십 대들 조심해야겠다.


이런! 큰일이다. 술에 취해 빨리 달리자고 요구하는 손님을 말을 듣고 교통신호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경찰에게 잡힌 것이다.

완전 멘붕! 어쩌겠는가? 두 명의 경찰은 두 명의 손님 아이디와 내 아이디를 요구했고 당연히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반면 두 명의 아저씨 손님들은 계속 거친 말들을 했다. 신호 위반한 것도 문제인데 거친 입 때문에 한 경찰관이 완전 열받았다.

다행히 경찰 중 선임으로 보이는 사람이 불쌍한 패디캡 라이더의 처지를 알고 있어나 보다. 벌금 물고 나면 남는 것도 없을 거라고 건네줬던 면허증을 주며,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가라고 한다.

눈치껏 조용히  하면 될 텐데, 아저씨 손님들은 어찌나 주절거리던지.. 내가 말리고 달레고.. 한참을 실랑이하였다. 그런 나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두 아저씨의 아이디카드도  내어주었다. 아... 완전 지옥에서 벗어난 것 같다.

 진정 다이내믹한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 나름대로 창의적인 시도도 하고 좋은 성과를 기대했는데, 팁이나 응원은 어디 가고 꼴사나운 십 대 여자들과 경찰에게 잡히는 흔치 않은 경험을 연달아 했다.


호주에 도착한 첫날, 이상하게 날 반겨주던 갈매기 똥은 불행한 호주 생활의 끝을 알리는 징조였을까?

나는 폭력사고에 휘말렸다. 여느 날처럼, 돈을 많이 따서 기분 좋은 손님을 기다리기 위해 카지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열두 시나 되었을까? 남녀 한 쌍이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남자는 운동을 하는지 덩치도 크고 몸도 좋았다.

그들이 원하는 곳을 확인하고 60불 정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자전거 택시를 꼭 타고 싶었던지, 여자가 동의했고, 남자도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

밤거리를 한참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고, 요금 지불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30불만 주겠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 분명 60불이라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언쟁이 시작되었다. 몇 분째 실랑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남자가 주먹을 휘둘렀다. 190cm가 넘는 그의 주먹은 내 코와 얼굴을 강타했다. 피할 틈도 없는 급작스러운 폭력이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바로 반격에 나서야 할지 참아야 할지 놀랜 머리가 돌아가고 있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선다면 똑같은 사람 밖에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주라는 선진국이니 이 억울한 사건을 잘 해결해주리라 생각했다.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얼굴과 흘러나오는 코피를 보고 놀란 여자는 남자를 데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참을 쫓아 따라가다 보니 밤길 거리에 패디캡을 잃어버리면, 더 골치 아픈 일이 일어 날 것 같아 자전거로 돌아왔다. 짧은 순간이었고 자전거를 타고 그들을  찾았지만 그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당장 경찰서로 달려갔다. 주먹을 휘두른 상대에게 주먹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억울했다. 잡아서 엄벌에 처해야 했다.

흐르는 피를 막으며 도착한 경찰서에서 경찰차를 타고 사고 현장을 찾았고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이후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옮겨졌다.

 코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심하게 부풀었고, 눈 밑의 뼈에 금이 갔다.

자전거는 경찰서에 맞겨졌고, 나는 몸져 누웠다. 다친 것은 육체였지만, 더 심하게 다친 것은 마음이었다.

세상을 향한 원망과 폭력 앞에 호주의 치안을 믿은 나 자신을 비난했다. 한국에서 수 천 킬로 떨어진 이곳에는 내가 기댈 사람 하나도 없었다. 외로움과 무기력함이 상처를 더 아프게 했다.

어둠 속 터널을 지나는 것 같았다. 혼자 이겨내야 했다. 한국의 부모님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 이 사고 소식을 숨겼다.


매시간 매초 그 가해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기억났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모자로 대충 가리고 경찰서를 찾아 수사 상황을 물었다. 하지 말 사고 지점에 감시카메라가 없어 잡을 수가 없다며 휴가 간 수사관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동안 하루 동안의 병원비는 몇 백만 원이 책정되어 날라왔다. 당장 몇 십만 원 밖에 없는데, 몇 백만 원이라니! 내가 잘 못해서 일어난 일도 아닌데, 어떡하라는 말인가?

며칠 뒤 수사관이 돌아왔지만, 그도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고, 병원비를 해결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을 사방팔방 검색해 법 앞에 약자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관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세계에서 몰려든 젊은이들이 나와 같은 일을 당해서 일이 밀려 있어서 일까? 답장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대로 호주에서 일어난 폭력 피해에 돈까지 물어낼 수는 없었다. 부모님에게 아픈 기억을 드리기 싫어 얼굴의 붓기가 조금 가라앉길 기다려 한국행을 결정했다. 병원비든, 범인 검거든 '될 대로 되어라'라는 심정뿐이었다.

그렇게 호기롭기 시작한 호주행은 100일을 채우지 못하고 끝이 났다.  다행히  몇 주 후 병원에 연락해보니 폭력 사건으로 처리되어 응급실 사용료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그 호주 백인 남자의 얼굴은 지워지지 않고, 떠올라 내 안의 평화를 깨뜨렸다. 그 사람의 덩치가 크고 내가 호주라는 타국에 있었지만 그 사람이 무섭지 않았다.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올바른 행동을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억울한 면이 너무나 크지만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다림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간절한 기다림, 저 하늘나라같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린 사람을 기다리는 슬픈 기다림, 추운 겨울 버스를 기다리는 코끝 시린 기다림 등.

나 역시 내가 원하는 순간과 여정을 위해 기다린다. 배낭여행을 떠날 것이다. 호주에서의 기쁘지 않았던 시간들이 가슴을 할퀴어 상처가 되었지만 언젠가는 나으리라.

'이제는 충분하지 않느냐?'라는 부모님을 비롯한 '취업이나 하고 결혼이나 해라'라는 친척들의 반대 의견은 내면에서 발아된 고민의 씨앗에 물을 주었다. 커져버린 고민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한다. 한번 품은 결심을 쉽게 꺾는 것은 남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기다리는 것은 믿는 것이다. 기다리는 대상이 내 안의 것이였고, 나는 나를 믿었다.


 도전하는 인생이 모토인 젊은 청춘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미래가 불안했지만 내 안에는 긍정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불확실성이 긍정이라는 친구를 만나면 희망이라는 멋진 옷을 선물해준다.  불확실성과 긍정은 상상과 꿈의 양 날개가 되어 나를 비상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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