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feartist Jul 27. 2017

Part 6. 9 남극일기 #9

사고


이번 캠프가 한국을 떠나면서 계획된 것이 아니었기에 식량 준비가 부족했다. 김치가 아니었다면 그 많은 가공식품, 스팸, 꽁치, 라면 등을 먹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월을 햇살을 맞으며 자라던 배추의 엽록소는 식물성 친구도 동물성 친구도 포용하는 숙성된 어른이 되었다. 실로 김치의 친화력은 바다처럼 크고도 깊다. 함께 인연을 맺은 재료들과 잘 섞여 때로는 칼칼하게 때로는 시원하게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간사한 내 혓바닥이 빨간 음식들에 조금 싫증을 느끼던 아침은 다행히 팀이 복귀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식사를 하고 철수 준비를 시작했다. 열일을 한 굴착기는 부드럽게 썰매 위로 올라탔고, 빙원의 전사, 스키두를 앞세우고 긴 귀갓길에 올랐다.


오전 내 부지런히 달렸고, 캠프 첫날 크레바스가 생겼던 곳에 도착했다. 조사가 필요했다.

앞서 스키두를 타고 가던 유 대장님이 먼저 도착하여 크레바스를 살피며 상우 형과 나에게 확보 준비(등반자 혹은 하강자를 파트너가 마찰 장치를 활용하여 지지해주는 것)를 시켰다. 한참을 기다린 신 듯하여 급하게 로프와 피켈(얼음도끼) 등의 장비를 꺼내어 설상차에서 내렸다. 크레바스는 대각선으로 갈라져 있었고, 안전한 길을 찾아 복귀하기 위해 유 대장님은  상우형의 확보를 받아 검은 크레바스 안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뒤에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줄을 잡고 있었다.


대장님은 숨결이 조금 거칠어지셨지만 무사히 안쪽의 상황을 살피시고, 설상차와 스키두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파악하시고 밖으로 올라오셨다. 스노우 브릿지(snow brideges, 크레바스 사이를 겨우내 눈이 채운 것)가 두텁게 쌓인 지역을 확인하셨고 반대편에서 신호를 주셨다. 먼저 스키두가 지정한 곳을 빠르게 통과해 지나갔다. 상황은 부드럽게 흘러가는 듯했다. 설상차가 훨씬 무겁지만 크레바스 간격이 그렇게 커 보이지 않고 스노우 브릿지가 두꺼운 것 같으니 문제없어 보였다. 아직 몇몇 인원이 크레바스를 건너기 전이었지만 반대편으로 쉽게 건너간 대원들이 있었고 철수를 하면 되는 분위기였다.

"대하야 자일 정리하자!"

"네!"

그리고 두 발짝 정도 움직였을까? 나는 검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하악, 하악"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크레바스에서 한찬 떨어져 방금 전까지 서너 명이 확보를 하던 곳이었다. 평평한 얼음 위의 눈이라고 생각한 곳을 자신 있게 밟은 순간, 갑자기 눈이 푹 꺼지며 땅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어?? 아악! 나는 잠시 무중력을 느끼며 중력의 힘으로 지구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었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무게 중심을 잃어서 몸이 360도 회전을 하며 거꾸로 정신없이 떨어졌다. 이마와 빙벽이 부딪칠 때에는 골을 울리는 아픔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비명을 질렀을까? 떨어지며 나는 비명을 지른 것 같지 않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여러 번의 암벽등반을 하며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져서 일수도 있다. 떨어지는 짧은 시간이 마치 몇십 년처럼 느껴졌다. 내가 살아온 만큼 비례하는 농축된 시간이었을까? 몸이 빙벽과 부딪치고 나는 죽음의 크레바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떨어지는 그 찰나의 시간,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죽는구나.', '죽으면 시신도 못 찾을 테고, 부모님은, 동생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차갑게 얼은 바닥과 부딪치며 사망의 생물학적 상태로 변할 것이다.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자일이 위쪽으로부터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살았다!' 상우 형과 연결한 자일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저 몇 초 전의 일이었다. 만약 자일로 서로의 몸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추락사했을 것이다. 등골이 오싹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일로 이어진 희망이 죽음의 강물에 휩쓸리지 않게 해주었다. 삶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내 몸을 점검하고 상황을 파악했다. 상우 형이 크레바스 위 어딘가에서 자일을 잡고 버티고 있을 것이다. 위에는 도움을 줄 팀원들과 내 몸무게를 충분히 버텨 줄 장비들이 있다는 것에 조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일의 매듭을 확인했다. 수십 번 수백 보아왔던 팔자 매듭이 안전벨트와 연결되어 있었다. 추락으로 비뚤어진 몸의 균형을 맞추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떨어지며 부딪친 머리와 발목의 상태를 확인했다. 큰 골절은 없었다. 당장 움직이는 것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아쉬운 듯 나를 바라봤다. 자일을 따라 위를 보니 30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좁은 구멍을 통해 남극의 하늘은 빛이 되어 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 빛은 차가운 죽음의 계곡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크레바스 내부는 대체로 항아리 모양으로 왼쪽에는 크레바스가 좁아지고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넓어지고 있었다.

프로답지 않게 내 장비 상태는 비정상이었다. 신겨져 있어야 할 아이젠이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장님과의 커뮤니케이션과 급박한 시간 등의 이유로 아이젠을 신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피켈이 장비 걸이에 꽂혀 있어 만약에 있을 다른 일에 대비할 수 있었다.'대장님, 저 괜찮습니다.' 마음속에는 저 위의 팀원을 향해 나의 상황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랬을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박사님의 위에서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고 했지만, 크레바스 깊이가 깊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고 기다리는 중, 자일이 밑으로 더 떨어졌다. 헉! 다시 조금 밀려 깜짝 놀랐지만, 위에서는 구조가 시작된 신호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음이 많이 진정되고 나서야 상우 형 걱정이 들었다. 상우 형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충격으로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만약 형이 80kg의 내 몸무게를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죽어서도 죄를 짓는 부족한 후배가 되었을 것이다.

형의 가족들과 형이 그렇게 사랑하는 산악부 후배들에게 두고두고 욕먹을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안전장비를 확인하고 재킷을 뒤져보니, 사탕 하나와 휴대폰이 있었다. 두 다리를 벌려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셀카를 찍었다. 다시 태어난 기념이랄까? 구조 중 떨어져 몇십 년 뒤 발견되었을 때, 마지막 모습을 위해서랄까?

 스스로를 생각해도 조금 미친 것 같았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팽팽히 당겨진 줄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내가 떨어진 구멍 사이로 로프에 쓸려 부서져 내리는 얼음 알갱이들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검은 얼음벽 사이 파란 하늘을 통해 들어온 빛에 얼음 입자는 보석처럼 반짝이며 뜨거운 내 얼굴에 내려앉았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 한줄기가 주인공을 따스하게 비추고, 그는 세상이 그를 버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다시 힘차게 인생을 산다.

부족한 조명에 노란 로프는 검게 보였다. 그 검은 줄을 따라 파란 하늘은 점점 선명해졌고, 나는 죽음의 검은 계곡을 빠져나왔다.매일 보던 빨간 원피스 방한복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고, 나의 상태를 확인한 이 박사님과 유 대장님이 차례로 나를 안았다.

"대하야 살아줘서 고맙다!"

뜨거운 이 한마디는 사라질 뻔한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나는 살아있고, 삶은 계속되리라는 확신이었다. 내 운명과 그곳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살려줘서 고맙습니다.'라는 말로 돌려드리고 싶다. 기지에서 날아온 헬기에 몸을 맡기고 예상보다 훨씬 빠른 복귀를 했고, 상상하지 못한 기지 대장님과 의사 선생님의 걱정 어린 응대를 받으며 의무실로 직행했다.     

크레바스에서 구조되기 전


매거진의 이전글 Part 6. 8 남극일기 #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