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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artist Jul 27. 2017

Part 6. 8 남극일기 #8

캠프

K 루트 팀은 뉴질랜드에서 떠나는 첫 번째 비행기를 이용해 가장 먼저 장보고기지를 찾았고, 극지연구소 홍보대사로 함께 온 엄홍길 대장과 기지 뒤편에 위치한 브라우닝 산을 찾아 남극의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몸을 풀었다. 5개월 남짓한 남극의 하계 팀으로서 지지 않는 태양처럼 부지런해야 한다. 운석을 찾고, 화산석을 캐고, 하역작업을 지원하는 등, K 루트 팀원은 다양한 역할을 하며 길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길어지는 백야의 밤이 한 달이 지났다. 헬기 이착륙 장 옆 빨간색 흰색 줄무늬의 풍향계가 어김없이 펄럭이고, 기지 근처 바위와 자갈밭에는 스쿠아(도둑갈매기)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따뜻해지는 날씨에 기지 앞 해빙 위에서 낮잠 자는 해표 숫자가 늘어간다.


우주선 같은 파란 기지의 한쪽 날개에 위치한 지질 실험실에 K 루트 팀이 모였고, 극지연구소 직원 종민 씨의 컴퓨터에 기록된 구글맵에 빨간 선과 노란 핀이 화면에 떠올랐다. 작년 점검한 루트의 GPS 기록이다. 그리고 한편에서 이종익 박사님이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서 보내온 위성사진을 GPS 기록과 대조하며 크레바스의 상태와 어떻게 조사할지를 의논하신다. 지난해 조사한 지역의 빙하가 사진과 많이 다르다. 족히 몇십 미터는 흘러 다시 GPR 장비(Ground Penetrating Radar, 전자파를 목표 지반에 방사시켜 반사체에서 되돌아온 반사파를 이용하여 지하를 탐사하는 장비)를 이용해 크레바스 등 위험 지역을 조사하며 본격적인 K 루트 팀 활동을 시작하였다.


빙하나 움직이는 이유는 첫째로 물이 흐르듯 중력에 의해 이 얼음덩어리도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움직인다. 이런 힘으로는 1년에 몇 미터밖에 이동하지 못한다. 다음으로 슬라이딩, 남극의 여름에 기온이 영하에서 영상으로 살짝 올라가는 곳이 있데, 이때 녹은 물이 빙하의 밑바닥까지 흘러든다. 그러면 빙하가 얹혀 있는 땅바닥과 빙하 밑바닥의 경계면에 물이 고이고, 그 물이 윤활유 역할을 하여 빙하 밑바닥이 미끄러지는 것이다. 어떤 경우 수천 미터까지 이동한다고 한다. 3번째 이유, 빙하 밑이 딱딱한 바위가 아니고 부드러운 퇴적물(물, 빙하, 바람의 작용으로 땅에 쌓인 여러 부스러기)이 있을 때다. 녹은 물이 퇴적물로 스며들어 빙하가 미끄러지는 것이다.

빙하가 움직이는 속도는 종류와 지역마다 다르고, 수십 미터에서 수천 미터까지 움직인다. 상류보다 하류가 빠르고 바깥쪽보다 가운데서 더 빠르다. 우리가 지나가야 할 지역은 거대한 빙판이 흘러 바다로 가는 하류에 속해 있다.


장보고 기지 뒤편 브라우닝 산을 넘어 하얀 설원을 빨간, 노란 스키두(스노모빌의 일종) 편대가 달리고 있다. 뒤에는 페라리보다 비싼 설국의 왕자, 설상차가 굴착기를(포클레인: 프랑스 제조회사 이름, 굴삭기: 오래전부터 써오던 명칭, 영어: Excavator) 실은 거대한 썰매를 매달고 늠름한 모습으로 뒤를 바친다. K 루트 팀은 트랙 상에 불규칙하게 울퉁불퉁 솟아오른 빙하와 모레인(빙퇴석: 빙하가 이동하다가 따뜻한 지역에서 녹게 되면 빙하 속에 있는 암석, 자갈, 토양 물질 등이 섞여 이루어지는 퇴적층) 지역의 길을 뚫기 위해 2박 3일의 캠프를 나가고 있다.


막내인 나는 스키두를 탈 군번이 되지 않아 식량, 장비 등의 짐과 함께 설상차에 실려 간다. 방금 왕자라고 표현했지만,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이분이 좀 느리시다. 앞서간 스키두가 토끼처럼 달려가 한참을 쉬고 있어야 겨우 만날 수 있다. 서로의 특성이 다르지만, 함께 하지 않으면 이 위험한 얼음 세상에서 살 수 없다.

동화 속 이 커플처럼 스키두와 설상차도 서로의 속도로, 함께의 속도로 빙원을 달린다. 이탈리아 기지의 활주로의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진 임시 거처에서 눈과 얼음을 녹여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힘을 내어 달려간다.

첫 회의를 하며 위험구간으로 예상되었던 크레바스 구간을 지나며 일이 있었다. 스키두가 지나간 자리를 설상차가 그대로 따라 지나가는 중, '덜커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 확인해보니 직경 1m 이상의 크레바스가 발견되었다. GPR을 통해 안전하다고 판단한 루트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크레바스 사이를 덥고 있던 눈이 아래로 꺼지면서 드러났는데, 이렇게 보이지 않는 히든 크레바스(hidden crevasse)가 특히 위험하다.

설상차가 충분히 크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스키두나 사람이 지날 때는 충분히 위험한 구간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남극에 있다.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과 긴장 속에 10시간 이상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반구 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저녁이 되었지만, 여기는 해가 지지 않아 밟은 조명 아래 저녁을 먹는다. 썰매에 실려 있던 굴착기에 김성일 반장님이 올라타며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단단히 묶여 있던 줄을 풀고, 버킷(바구니)을 돌려 땅에 지지하고 조금씩 조금씩 이동하여 썰매에서 내려온다. 예전 공사장을 지나며 이 모습을 몇 번이고 봤지만, 이렇게 빙판 위에서 내려오는 굴착기의 모습에 혹시 하는 마음에 걱정도 되고 신기하기도 했다. 빙판에 내려온 굴착기는 사람 몇 배만 한 돌을 옮기고, 단단히 얼음 얼음을 깨며 사람도 겨우 갈 수 있던 빙하와 바위로 이루어진 혼돈의 공간을 뚫어 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홍기 반장님은 설상차를 이용하여 길을 다듬고 마무리하였고, 유한규 대장님의 지휘 아래 상우형과 나는 최적의 작업 방향을 미리 찾고 굴착기를 인도하였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어, 지지 않는 백야의 저녁도 힘을 조금 잃었지만, 운전실에 앉아 여러 개의 조종 대를 장난감 다루 듯 굴착기와 한 몸이 된 반장님은 지치지 않는 듯 보였다. 마치 하얀 설원의 남극이라는 무대 위, '굴착기와 하나 된 인간의 꿈과 도전'이라는 제목의 공연을 보는 듯했다. 이 앞전 캠프에서 지지 않는 태양을 가린 눈안개 속에서 시린 엉덩이를 비비며 들은 반장님의 흥미진진한 북한 이야기, 굴곡진 인생 이야기가 겹쳐온다. 이 순간 빙하 위에서 춤추는 굴착기와 반장님의 끈적끈적한 인생은 분명히 미술관의 얇은 철사 줄에 매달린 그림보다 다이내믹하고 살아있는 예술의 한순간이다. 우리의 삶은 이처럼 예술로 가득하다.


설상차의 운전석, 조수석, 뒤편의 의자 위 바닥까지 다섯 명의 새벽은 그렇게 편하지 않았지만, 빙하를 녹인 물로 끓인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맞이한다. 여름휴가를 위해 찾아 시원한 계곡을 찾은 것이 아니기에 대자연 앞에 낭만은 잠시로 충분하다. 모두들 낭만을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와 시간은 때때로 사치와 낭비로 변한다는 것을 알기에 원래의 목적에 집중했다. 이 날은 기지에서 날아온 헬기의 식량 지원이 없었다면 모두들 힘들었을 작업, 작업, 작업으로 채워진 하루였다.


어제저녁, 비좁은 설상차 좌석이 불편하셨는지 유 대장님은 비박을 하신다고 눈과 얼음을 쌓아 바람벽을 만들고 텐트를 펼치셨다. 덩달아 나도 남극에서 비박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조금 추울 수도 있지만 침낭의 내한 온도가 충분하고 강풍이나 눈, 비가 없는 맑은 날씨라 비박이 해 볼 만하다고 판단되었다. 나에게는 자연을 느끼는 방법은 오감을 통한 직접적인 소통이다. 파란 바다를 보면 뛰어들어 그 차가움과 파도의 넘실거림을 느끼고 싶고, 붉은 사막을 보면 푹푹 빠지는 뜨거운 모래 위를 걸어보고 싶다. 남극의 추위도, 바람도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어느 방향으로 누워도 바람을 피할 수가 없었기에 지지 않는 태양을 피해 설상차 바퀴 아래에 매트리스가 들어갈 수 있게 구덩이를 팠다. 조금 더 깊게 파내어 바람을 더 피할 수는 있었지만, 왠지 지구의 지하로 향하는 것이 '죽음'이르는 우리 삶의 마지막을 연상시켜 게으름을 정당화시켰다. 지구의 남쪽 끝, 수천만 년의 지구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빙하에서 하룻밤은 첫 의도와 다르게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았다. 남극의 추위는 매트리스와 침낭을 뚫고 아침나절 찌부덩한 몸을 선물해줬다. 남극의 바람은 침낭 사이 숨구멍으로 눈 조각과 차가움을 부지런히 날랐다. 어느새 한 지구를 한 바퀴 돈 것인지 태양은 얇은 눈꺼풀을 뚫고 원하지 않는 격한 아침인사를 해댔다. 이 녀석들은 콤비 플레이를 펼치며 밤사이 꿀잠을 방해했다. 누구에게 무슨 불평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피곤하고 힘들지만,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고 쉬이 잊히지 않는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될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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