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교차로에서
조금식 추워지는 11월 22일 동생과 멸치칼국수를 끓여 밥까지 맛있게 말아 먹은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지난주 수능시험을 봤었고 성적이 발표되기로 한 날 아침이었다. 정확히는 수능 답안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현재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수능시험을 치를 때는 자신의 답안을 적어서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은 그런대로 나오는 편이었다(내 기준에서). 2학년을 마칠 때와 비교해서 3학년 모의고사 성적은 많이 올라 있었고, 본 시험과 가장 비슷하다는 모의고사에서 나온 성적으로 대학교를 물색 중이었다. 대학생으로서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19세 소년은 12년의 공교육을 마치고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서 있었다.
홈페이지에 답안이 공개되었다. '뭐야? 이럴 리가 없는데..? 진짜 이렇게 생겼어?' 객관식 답안지가 내려가는 모양은 나의 것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동안 수 없이 치렀던 모의고사 성적에 못 미치는 가채점 결과에 나는 엄청나게 당황했고 그날의 멸치칼국수는 속 안에서 다시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몇 분이면 끝날 답안 대조는 의아함과 걱정으로 몇 십분으로 늘어났다. 마지막 숫자를 확인하며 어깨가 털썩 내려꺼지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이 무슨 허무한 결과인가? 뭐가 잘 못된 것인가? 머릿속은 복잡해졌고 실망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 현실은 어린 나에게 가혹했다.
가채점 결과는 내 인생을 결정해 버린 듯했다. 어떤 수를 써서든 이 점수로 대학에 가야 할 것이고, 대학에서 만나는 대부분이 사람들은 나처럼 수능 점수에 대하여,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혹은 나보다 수준이 낮거나 나를 만족시키지 못 할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기분 좋게 시작한 나의 하루는 그렇게 급변했다. 억울함에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한참이 지나도 멈출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현실을 어머니, 아버지에게 전달할 생각은 차마 하지 못했다. 20년을 뒷바라지해준 부모님에게 한없이 죄송스러웠다.
주말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 보니 반응은 다양했다. 모의고사에 비슷한 성적에 안도하는 친구들, 평소보다 잘 해 흥분에 휩싸여 하루 종일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성적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 평소보다 너무 못해 입을 닫은 친구들까지.
나는 불행히도 세 번째 그룹에 속하여 첫 번째, 두 번째 그룹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야 했다.
며칠 뒤, 아침 회의를 마친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오셔서, 반 친구들의 언어, 수리, 외국어, 사탐 가채점 결과를 제출하게 하셨다. . 각 반의 기록들은 합산되어 전체 등수가 나왔고, 그 기록은 전교생 모두가 확인할 수 있도록 각 교실 뒤편에 붙여졌다.
같은 지역 인문계 여고의 성적 등, 주변 고등학교의 높은 성적을 받은 여러 명 친구들의 이야기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평소 조용히 공부만 하던 친구들을 스타가 되었다. 그들의 미래는 이미 반짝 반짝이는 듯했다.
뜨거운 여름, 추운 겨울을 나며 잠을 줄이고 얼마나 노력했느냐가 가장 중요한 이유겠지만, 수능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줄 세워진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었다. 하지만 기존 어른들이 정하는 세상에는 다른 규칙은 없었다.
인자하신 담임 선생님은 예상보다 떨어진 수능 결과에 그렇게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차분히 성적보다 조금 낮지만 합격하기 안전한 학교와 학과를 추천해주셨다. 열심히 하면 은행원이나 여러 곳에 취업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시며.
난 마치 곧 다가올 만족스럽지 못한 대학교 생활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듯 조였던 고삐를 빠르게 풀어 헤쳤다. 수능을 위해 끊었던 리니지 온라인게임을 시작했다. 같은 처지의 친구들에 빠져들었다. 생전 하지 않던 사전학습을 음주교육에는 적용했다. 운전면허를 취득해 어른들의 모습을 흉내 내며 친구들과 드라이브도 다녔다.
그렇게 12년 교육은 마무리되었고, 인생의 또 다른 챕터는 자유보다는 방종에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세월이 지나서야 그 주말 아침, 실망감은 사실이었지만, 절망의 절벽 끝에 서 있지 않았음을 알았다. 스스로 시간관리를 잘못해서, 혹은 지능이 모자라서 수능 성적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수능 점수의 뒤에는 지역적, 문화적 특성, 부모님의 경제력, 학력 등 성장에 얽힌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이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별한 부모님을 만나거나 특출난 학생이 아니라면 평범한 학생으로서 수능이라는 가장 검증된 방식,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방식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게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 '돈이 되는 길, 타인에게 인증받는 길'이다. 한국을 삼킨 자본주의를 이끄는 대기업, 회사들을 위한 대학교육제도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대학생들은 대학을 서열화하고, 자신보다 낮으면 무시하고 자신보다 높으면 질투를 한다. 이것은 기존 사회에서 어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며, 동시에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대학, 전공 등 개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결정이었지만, 환경의 영향으로 선택의 자유는 없었다. 객관식 문제를 풀 듯 주어진 것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이십분 남짓의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이 내 4년의 대학 생활을 결정한 것이다. 당시의 나의 선택은 사유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진 좁은 틀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다.
수능의 등급과 등수로 말해졌던 나는 넓은 세상을 만나면서 다른 수식어와 숫자를 부여받았다.
대학에서 만난 동기와 교수님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만나는 많은 사람들, 자연이 영감과 가르침을 주었다.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수능 5등급의 박대하는 존재하지 않았다. 수능이 정의한 나의 등급은 높지 않았지만, 자연친화지수, 감정지수는 높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지능지수 이외 다양한 재능이 존재한다. 튼튼한 신체와 도전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공부 못하는 혹은 성적이 만족스럽지 않은 삶의 후배들은 가슴을 펴길 바란다. 서울대학교 간 친구보다 내가 세상 구경은 더 했고 여자친구도 더 많이 만났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보다 분명히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다!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상상해보라! 하늘의 별들이 한 줄로 서있다면?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하나의 프레임 속에 숫자가 아니다. 3차원을 넘어서는 다양한 차원에 각자의 위치가 있다. 우리 개인도 스스로를 믿고 자기의 색을 자신 있게 표현할 때, 은하수가 흐르고 검은 밤이 미소 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