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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artist Jul 25. 2017

프롤로그  죽음의 검은 계곡

남극의 크레바스에 빠지다



어??? 


"하악, 하악"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평평한 얼음 위의 눈이라고 생각한 곳을 자신 있게 밟은 순간, 갑자기 눈이 푹 꺼지며 땅이 아래로 주저앉았다. 어?? 아악! 나는 잠시 무중력을 느끼며 중력의 힘으로 지구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손을 휘저었지만 아무것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무게 중심을 잃어서 몸이 360도 회전을 하며 거꾸로 정신없이 떨어졌다. 이마와 빙벽이 부딪칠 때에는 골을 울리는 아픔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비명을 질렀을까? 떨어지며 나는 비명을 지른 것 같지 않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여러 번의 암벽등반을 하며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져서 일 수도 있다. 떨어지는 짧은 시간이 마치 몇십 년처럼 느껴졌다. 내가 살아온 만큼 비례하는 농축된 시간이었을까?


몸이 빙벽과 부딪치고 나는 죽음의 크레바스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떨어지는 그 찰나의 시간,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죽는구나', '죽으면 시신도 못 찾을 테고, 부모님은, 동생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차갑게 얼은 바닥과 부딪치며 사망의 생물학적 상태로 변할 것이다.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자일이 위쪽으로부터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살았다!' 상우형과 연결한 자일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저 몇 초 전의 일이었다.

만약 자일로 서로의 몸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추락사했을 것이다.

등골이 오싹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자일로 이어진 희망이 죽음의 강물에 휩쓸리지 않게 해주었다. 삶을 이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내 몸을 점검하고 상황을 파악했다. 상우형이 크레바스 위 어딘가에서 자일을 잡고 버티고 있을 것이다. 위에는 도움을 줄 팀원들과 내 몸무게를 충분히 버텨 줄 장비들이 있다는 것에 조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자일의 매듭을 확인했다. 수십 번 수백 보아왔던 팔자 매듭이 안전벨트와 연결되어 있었다. 추락으로 비뚤어진 몸의 균형을 맞추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떨어지며 부딪친 머리와 발목의 상태를 확인했다. 큰 골절은 없었다. 당장 움직이는 것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아쉬운 듯 나를 바라봤다. 자일을 따라 위를 보니 30미터는 족히 넘어 보였다. 좁은 구멍을 통해 남극의 하늘은 빛이 되어 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 빛은 차가운 죽음의 계곡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크레바스 내부는 대체로 항아리 모양으로 왼쪽에는 크레바스가 좁아지고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넓어지고 있었다.


프로답지 않게 내 장비 상태는 비정상이었다. 신겨져 있어야 할 아이젠이 없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대장님과의 커뮤니케이션과 급박한 시간 등의 이유로 아이젠을 신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피켈이 장비 걸이에 꽂혀 있어 만약에 있을 다른 일에 대비할 수 있었다.


'대장님, 저 괜찮습니다.' 마음속에는 저 위의 팀원을 향해 나의 상황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그랬을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박사님의 위에서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고 했지만, 크레바스 깊이가 깊어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상황을 파악하고 기다리는 중, 자일이 밑으로 더 떨어졌다. 헉! 다시 조금 밀려 깜짝 놀랐지만, 위에서는 구조가 시작된 신호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음이 많이 진정되고 나서야 상우형 걱정이 들었다. 상우형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충격으로 다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만약 형이 80kg의 내 몸무게를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죽어서도 죄를 짓는 부족한 후배가 되었을 것이다.

형의 가족들과 형이 그렇게 사랑하는 산악부 후배들에게 두고두고 욕먹을 그런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안전장비를 확인하고 재킷을 뒤져보니, 사탕 하나와 휴대폰이 있었다. 두 다리를 벌려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셀카를 찍었다. 다시 태어난 기념이랄까? 구조 중 떨어져 몇십 년 뒤 발견되었을 때, 마지막 모습을 위해서랄까?

스스로를 생각해도 조금 미친 것 같았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었다.


우리의 삶 속에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기억되는 순간이 있다. 하늘을 날아갈 듯이 기뻤던 순간, 땅이 무너내릴 듯 슬펐던 순간 등. 이 순간들이 모여 현재의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기억을 더듬어 내 존재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인생정리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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