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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artist Jul 25. 2017

Part 2. 1 대학교, 교과서 넘어 세상으로

산악부 동아리

대학교에서 보낸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양한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산악부 동아리였다. 새내기로서 멋모르고 동기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던 3월의 어느 날, 캠퍼스는 동아리 모집에 다양한 천막들이 등장했다.

여러 가지 활동들에 눈이 갔다. 패러글라이딩, 검도, 스쿠버, 그중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산악부. 사실 그저 암벽 등반하는 것이 멋있어 보였다. 당시에는 스포츠클라이밍이 널리 보급되지 않은 시기였다. 암벽등반은 그저 잡지나 텔레비전 속에서 용감한 남자들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이었다. 나도 멋진 남자가 되고 싶었다.


첫 암벽등반

산악부에 들어온 첫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은 하얀 바위를 오르는 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수요일 저녁, 신입생 환영 등반에 대한 회의가 있었다.

선배들은 떠나기 전, 실내에서 준비하는 것부터가 등반의 시작임을 가르쳐 주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대상지를 선택하고, 등반코스에 관해 선배들의 기록을 뒤지고, 인터넷을 통한 조사가 필요하다.

더불어 개인은 자신이 담당할 분야를 책임지고 준비해야 한다.

목요일 오후, 자신의 담당에게 맞게 의복, 식량, 암벽장비를 준비하여 배낭을 쌌다. 먼저, 엄청난 크기의 배낭에 깜짝 놀랐다. 이런 배낭을 본 적이 없었다. 배낭 한편에는 70L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에는 그 글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브랜드 이름 정도로 착각했었던 것 같다.

(70L의 의미는 배낭을 물로 가득 채웠을 때 70kg=70L까지 가능한 것이다)

암벽등반을 위해 1박 2일의 짐을 꾸리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했고, 마치 자취방을 옮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암벽장비를 보는 것만으로 신기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는 선배의 말속에는 등반의 긴장감이 흘렀다.

금요일 오후에는 식량을 샀다. 먹거리 구매도 등반에 있어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육체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많은 활동이라 먹는 것이 부족하다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돈을 팍팍 써서 비싼 음식, 고기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가격이 확 뛰어올라 대학생 용돈으로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2학년 선배는 지역에서 가장 싼 명당들을 알려주었다.

장을 보고 돌아와 짜장면으로 저녁을 먹고, 마지막 마무리 패킹을 했다.


멋진 남자의 대가

다음날 토요일 아침, 우리가 향한 곳은 삼천포에 있는 와룡산 상사바위이다. 석회암 바위가 삼천포 화력발전소가 내려다보이는 천왕봉에 위치해 있다.

버스를 타고 남양동 사무소에서 내려 도암재까지 몇 시간이 걸렸을까? 처음 메어본 무거운 배낭에 압도당해 나도 동기들도 말을 잃었다. 주룩주룩 비 오듯 흐르는 땀과 거친 호흡도 힘들었던 그 시간을 다 표현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도암재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거친 숨이 채 정상으로 돌아오기도 전에 암벽장비를 챙겨 상사바위로 향했다.

20분쯤 걸어 바위 밑에 도착했다. 하늘에 닿은 바위 끝이 아주 멀리 있는 듯하다. 약 70m, 아파트 20층 높이의 바위가 첫 암벽 등반에 나선 우리를 압도한다.

벨트를 착용하는 동안 긴장감으로 정신이 조금 나간 것 같다. 무거운 배낭에 지친 육체는 엄청난 바위 앞에 더욱 지쳐간다. 대학교에서 점심도 사주고, 저녁이면 삼겹살은 구워주던 다정했던 선배들은 군대 교관같이 바뀌었다.

"정신 안 차려 박대하!" "잘 못 하면 다쳐! 진짜 죽을 수도 있어!"

권재형이 내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한다. 헬멧, 턱끈, 벨트, 카라비너, 하강기, 동그란 안경 너머 선배의 눈빛이 날카롭다.

바위에서 조금 떨어져 2학년 선배의 등반을 지켜본다. 마치 스파이더맨을 보는 듯 암벽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30m 정도를 올라가 멈춰 섰다. 잠시 준비를 하는 듯하더니 "확보준비완료"를 외쳤다.

내 차례가 왔다. "산악부 35기 박대하 출발 준비 완료" 크게 외친다고 외쳤지만, 저 바위에 매달린 형은 만족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임복형이 말했다.

"그게 아니지! 뱃심을 써야지!"

나는 다시 몇 번을 배에 힘을 주고 고함을 치고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첫 암벽의 떨림은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발을 바위벽에 붙이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부분을 죽어라. 찾았다. 잡을 만한 바위가 없을 때는 손톱으로 까칠까칠한 바닥을 긁었다.

사실 암벽등반은 7할이 다리이고 나머지가 3할을 차지한다. 하지만 긴장한 나는 팔 힘으로만 올라가고 있었다. 아래로 끊임없이 처지는 엉덩이는 어찌나 무거운지, 고장 난 도르래를 당기는 것 같았다. 얼마나 올랐을까? 바닥에서 10m가 넘게 올라온 사실을 깨닫고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이 까마득한 협곡 위 다리를 건너는 것 같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온몸이 뻣뻣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체력은 빠져가는데 코스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을 만났다.

1미터쯤 툭 튀어나온 바위를 넘어가야 하는데, 턱 위의 보이지 않는 작은 바위를 잡고 몸을 옆으로 눕혀서 통과해야 했다. 무서웠다. 허공에 몸을 눕혀야 하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멋진 남자가 되는 것이 상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의 한구석에 숨어 들어가는 용기를 짜내어 왼발을 뻗어 본다. 오른발도 뒤따라 날려본다.

용기가 부족해서였을까? 힘이 부족해서였을까? 조금의 차이로 바위 턱을 넘지 못하고 떨어졌다.

"앙카(추락)!!!"

"앙카!"

위에서 확보를 보던 형이 민첩하게 반응하여 떨어지던 몸은 공중에 정지했다.

잠시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될 뻔했어! 성공할 뻔했어!'

힘은 빠졌지만, 용기는 더 커졌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해 보자!'

떨어진 만큼 다시 올라 왼손으로 홀드(암벽에서 손으로 잡 수 있는 바위를 일컬음)를 찾았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왼발을 바위벽에 단단히 디디고 오른발을 날렸다.

"오오~!" 이번에는 성공이다! 사실 몇 번의 실패가 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동기들이 암벽등반에 입문하는 동안 태양은 바다 넘어가고 있었다. 정재욱 대장은 더 늦어지기 전에 철수를 시작했고, 하산하여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검푸른 하늘에 부지런한 별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부지런히 준비한 식사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얼마 후, 새내기의 암벽 첫 경험을 축하하기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암벽등반 처음 해보니까 어때?" 한 선배님이 물었다.

"….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멍해졌다.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이 함께 밀려왔다.

"어려웠습니다…."

대답을 제대로 못 한 만큼 마음은 복잡했다. 선배들이 주시는 술은 끝이 없었고, 등반 첫 경험의 떨림과 피곤함에 취한 밤은 깊어갔다.




지리산 종주


암벽등반을 경험하고, 산악부원으로서 조금씩 산을 배워갔다.

 5월이었다. 계절의 여왕에게 맞게 민족의 모산, 지리산을 종주하게 되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을 띵 구기로 하고, 오전 수업만을 듣고 동아리방으로 왔다. 며칠간의 준비를 마무리하고 12시 선배의 승합차로 출발. 몇 주일 전부터 선배들은 지리산 종주는 '1학기 산행의 꽃'이라는 말하였다. 그래서 그럴까? 다를 때보다 더 긴장되고 설렜다.


도착한 지리산 입구에는 오월의 푸르름 대신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우리를 맞이했다. 하느님 처음부터 어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잠시의 원망을 뒤로하고 노고단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굵은 비로 인해서 갈수록 무거워지는 배낭과 키슬링(예전 방식의 배낭)에 체력과 정신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첫 암벽등반 이후, 운동을 꾸준히 하여 체력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는데, 착각이었다. 코재를 올라 노고단 산장으로 가는 돌계단에서 다리에 쥐가 나고 말았다. 서 있을 수 없어 돌계단에 신음하며 누웠다. 쏟아지는 빗물이 얼굴을 떼렸다. 재욱대장님과 임복형이 드러누워 괴로워하는 내 옆에 계셨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고통 속에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안도감이 날 일으켰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경련에 운행 속도는 느렸다. 예정 시간보다 한참 늦게 도착한 산장에는 많은 선배님이 와 계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술과 고기가 나왔다. 과일과 각종 안주가 배낭 속에서 끝없이 등장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오르막에 굶주린 배를 채웠다. 멀리서 찾아온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있었지만, 일학년들의 상태는 이미 반쯤 꿈나라에 가 있었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부대장 권재형이 하꼬비(일본어로 보따리는 하꼬비(運び)라고 부르는데,'가다, 진행하다' 정도의 뜻이다. 주로 음식점 서빙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 일본에서 전파된 대학교 산악부 문화에 영향을 끼쳐 1학년을 지칭함)는 일찍 자란다.

'휴~ 그래도 다행이다! 얼른 쉬고 싶었어!'

배낭 안으로 들어온 비에 젖은 침낭에 몸을 던져 넣었다. 하지만 내일의 산행 걱정과 밤새 계속된 산장 파티로 인해서 제대로 된 잠을 이룰 수는 없었다.


새벽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피곤함 몸을 일으켜 보니 누워 편안히 잠 잘 수 있었다는 것이 사치였음을 느낀다. 아침밥을 준비하는데 선배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산장 조리실 구석 한편에 앉아서 침낭도 없이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형들이 보였다. 여태껏 강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선배님도 잠에 겨워 꾸벅꾸벅하며 졸고 계셨다.

둘째 날이 밝았다.

맛을 포기하고 오늘을 버티기 위해 아침밥을 밀어 넣었다. 축축한 배낭을 메고 종주 둘째 첫발을 내디딘다. 어제 내린 비로 방수 기능을 가졌다는 비싼 고어텍스 신발은 물을 한껏 담은 고무장화처럼 변해 있었다. 그 속에서 몇 시간을 불은 지 모르는 발에서 물집이 생기는 소리가 들렸다.

한발 한발 걸을 때마다 찌릿찌릿 신호가 왔다. 옆에서 성이형과 성식형은 여기가 어디다. 지리 10경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지만, 그것들이 귀에 들어올 여유는 없었다.

키슬링을 메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어깨와 허리의 고통이 찾아왔다. 일 학년 동기끼리 돌아가면서 30kg 무게의 하나의 키슬링을 메었다. 시간의 결정권을 쥔 신이라도 되고 싶었다. 내 시간은 짧게 동기의 시간은 길었으면 했다. 이 무거운 중력의 굴레를 벗어나는 시간이 빨리 왔으면 하였다. 동기와 함께 헤쳐 나가야 할 쉽지 않은 목표 앞에서 간사함과 이기심을 본다. 오후에는 먼저 무릎이 아파 내려가 버린, 현주까지 원망하였다. 아파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는 그런 몸이었는데, 나약한 나는 그를 원망했다.


또 한가지 어려움은 목마름. 선배들은 무겁게 지고 온 물을 많이 먹지도 못하게 하였다. 갈증을 이기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간혹 물을 많이 마셔 물 중독이 오거나 운행이 불가능할 만큼 탈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땀을 많이 흘리는 상황에서는 체내 염분과 수분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자는 물을 아껴 종주가 끝날 때까지 수통이 바닥을 보이지 않게 한다. 그리고 팀을 책임지는 대장이나 의료담당은 정제염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종일 소변을 한 번만 누웠던 것 같다. 색깔이 얼마나 노랗던지 하하하!


온종일 고통과 어려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휴식 시간에 나오는 간식은 얼마나 맛있던지 천국행 순간 이동 티켓 같았다. 과일이며 초코바를 먹은 후 잠깐은 힘든지 모르고 다시 걸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쉴 때면 홍수가 난 신발을 벗어던지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땅을 향해 재껴진 고개를 꺾어 위를 보면, 비가 갠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미소 짓고 있었다. 몽글몽글 머리끝에 땀이 떨어지고, 어느새 살랑살랑 바람이 귓불을 스쳐지나며 우리를 응원해주었다. 자연 속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자연에서 위로를 받는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지리산의 풍경을 감상할 시간은 적었지만, 이렇게, 저렇게 원초적 고통과 즐거움으로 하루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치밭목 산장에 도착해서 보니 많은 형이 우리를 반겨 주웠다. 술 한 잔에 피곤이 녹아내리고, 짙어지는 어둠은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내일은 별것 없다는 말은 특히 큰 위안이 되었다. 이날 역시 우리하꼬비는 일찍 꿈나라로 직행했다. 형들에게 술 한 잔이라도 더 열심히 돌려야 했었는데…. 하는 짧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틀에 걸친 산행으로 더 이상의 생각은 무리였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다.

등산화는 아직 축축하고 이틀의 강행군에 몸은 지쳤지만, 선배들의 도움으로 천왕봉에 오를 수 있었다.

감격과 행복으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 제일 높은 그곳을 올랐으니 이제는 하산길이다. 이 길만 내려가면 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근육과는 다르게 덜컥 겁이 났다. 얼마 동안을 참았지만 나아질 기미는커녕 상태는 점점 심해졌다. 지치고 약해진 나의 마음은 포기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뒤에 처져서 대장님과 같이 쩔쩔매며 힘겹게 따라가는데 앞에서 키슬링을 메고 가는 용덕이가 보였다. 다른 여러분의 선배도 지리산 종주를 함께 해 주신다.


하산길의 끝이 보인다.

대원사 계곡까지의 내리막을 끝마쳤다. 혼자였다면 결코 이 멀고 험한 길을 지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동기, 선배들이 함께 해주었기에 가능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의식이 큰 에너지가 되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지리산 종주를 마칠 수 있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면 우리의 키슬링보다는 2학년 선배 형들의 배낭이 훨씬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1학년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선배들의 사랑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리산 종주는 없었으리라.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부분이다.

부실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는 다르게 잠과 함께 빠르게 지나갔다. 산행 평가를 하는데 왜 목이 메는지…. 비와 땀이 만들어낸 눈물의 종주는 영원의 기억 속에 남았다. 2박 3일의 지리산 종주는 나를 한 단계 발전시켜줄 한발의 전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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