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주체적인가요?
우리는 언제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행동 할까? 이 과정을 어떻게 배우고 인식하는 것일까? 나에게는 이 과정이 해병대라는 조직을 선택하면서 시작되었다. 친가와 외가를 포함한 여러명의 남자들 중, 나 이전에 아무도 해병대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해병대를 선택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남자 아이치고는 조용하고, 울음도 많아 스스로에게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5학년 담임선생님의 격려와 함께 결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남자답게 강해지는 것, 여자에게 신사가 되는 것이었다. 울음이 나올 때 마다 혀를 깨물고 허벅지를 꼬집어 울지 않으려 했고, 신체적으로, 체력적으로 튼튼해지기 위해서 초등학생 육상부를 하면서는 코피를 흘릴 때까지 달리기 연습을 하는 나름대로의 노력했다.
이 후 어린시절의 내가 그렇게 잘 울었떤 것은 어머니가 나를 임신했을 때, 너무도 많이 울었기 때문인 것을 알게되었다.
26살,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부족한 것이 많았던 아버지가 싫었고, 혼자 남겨진 산속의 집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더불어 산악부 선배들 중 멋있는 분들은 대게 해병대를 전역했다는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자원 입대 한 것 같다.
그 중 특히 최강식 형의 역할이 컸다.
실제 인생에서 만나고 경험 한 사람들 중 본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첫번째 인생선배가 국방의 의무를 한 곳이기에 후배 역시 경험하고 느껴야했다.
지원서를 작성하고 몇 번의 시험을 통과하여 재수없이 바로 해병대의 부름을 받았다.
포항훈련소에는 '인간개조의 용광로'라는 말이 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을 받으며 대학교선배들을 따라 다니며 술을 얻어마시던 스무살 남자가 군인이 되는 첫번째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예전에 따 놓은 컴퓨터 자격증을 이용하여 육군의 행정병에 지원하여 합격한 상태였다. 20년을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의 말, 선배들의 말을 듣고 결정을 했다면 해병대를 지원한 것은 어쩌면 내 인생 최초의 100% 자발적인 결정이었다. 이제까지의 관성에 어긋나는 행동에서 찾아오는 반발력이었을까? 결정에 반대하는 주변의 의견도 많았고, 고민의 시간도 있었다. 주변 친구들도 그랬지만 특히 어머니가 반대하셨다. 왜 편하고 안전한 길을 나두고 구지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자식의 안전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해병대라는 한 단어에는 많은 이야기와 수식어가 뒤따른다. 개병대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추측에는 해병대 나오면 성격 버린다던? 네가 그 힘든 생황을 견딜수 있을까?입대하면 바로 후회할걸? 등등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녀온 사람들은 지원하여 타군과 다르다는 자부심과 사회에서 여러가지 능동적인 은 보통 해병대를 갔다 오지 않은 '카더라'통신요원들이다. 반면 실제로 그곳을 다봉사활동을 통해 행동으로 말을 대신한다. 사회에 부정적인 이미지는 과한 전우애와 술이 만나 생긴 좋지 않은 사건들로 생긴 것이다. 자신의 젊은 날과 스스로 내린 선택을 사랑한다면, 동기를 만나 술을 마시더라도 기본 예의는 지키는 해병이 되어야겠다.
훈련소 정문에 '해병대는 이 곳에서 시작된다' 라는 강렬한 글씨가 포항을 찾은 우리 가족을 맞았고, 입영환영행사 이 후 가족에게 큰절을 한 후 6주간의 훈련병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첫 일주일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발, 각종 신체검사와 인적성검사 이 후 제식훈련을 시작으로 진짜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은 시작된다.
긴장을 해서 그럴까? 4일간은 대변을 보지 못해 불편한 배를 이끌고 훈련을 받았고, 그 때의 그 답답함은 지금까지도 변비최장기간으로 남아 개인적인 기록이 되었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는 철학가 니체의 말은 훈련병에게 큰 힘이 된다. 2년이라는 인생의 시간을 건 자발적 선택을 했지만 훈련소에 들어오면서 부터는 자발적인 결정은 하나도 할 수 없다.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능동적인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는 어떤 누군가에게 아이러니가 되겠지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배움의 과정이자 자신의 선택한 결정에 대한 책임이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어떤 조직에 들어가서도 이 점은 반복될 것이다. 회사에 지원하는 것은 자발적이지만 이 후 일정기간 이상은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야만 자신의 일을 확실히 배울 수 있다.
훈련소에서 가장 힘든 기간이 5주차 극기주인데, 식사량은 3분의 1로 줄이고 훈련량은 오히려 늘려 전우애을 쌓아가던 동기끼리 다툼이 많아 지기도 한다.
이러한 극기주 중 999, 1000기는 뜻 밖의 행운을 만났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훈련소를 방문한 것이다.
아직 이병 작대기 하나 달지 못한 훈련병들은 어깨에 별로 가득한 장군들은 물론이고 1949년 해병대 창설 이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첫 훈련소 방문 장소에서 함께 식사하는 영광을 누렸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식당에 설치 된 금속탐지기 및 보안대를 통과하고 통닭과 과일, 돼지고기가 담긴 반짝 반짝 깔끔히 빛나는 식판을 마주하고 30분의 대통령방문 행사가 끝나길 기다려야 했다.
군대가 할 일이 없게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과 자신의 군대 34개월 보름동안의 여러 이야기를 하셨는데, 사실 배고픔에 자세한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우리보고 아직 군기가 제대로 안 들어간 것 같다는 말에 움찔 하여 '맞습니다' 라고 답하였고, 노무현대통령은 열심히 해서 빨간 명찰을 달길 빈다고 했다.
든든히 먹은 대통령과의 한끼 식사가 큰 힘이 되었는지 극기주와 천자봉행군을 잘 마치는 나도 해병이 될 수 있었다.
실무부대 배치 전산 추첨에 희망지역 3개를 적어냈다. 집과 가까운 포항을 적어낸 나약함 때문이었을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백령도가 나왔고, 난 서해최북단 백령해병이 되었다. 산악부 동아리 활동을 하며 암벽등반을 경험하고 훈련소에서 1.5km를 5분 30초 정도에 뛴 기록을 보고 행정관님은 나를 백령도에서 유격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으로 지정하였다. 그 소식으로 중대의 관심을 한껏 받는 이병이 되었다.
자신의 그릇을 넘어서는 기대는 독이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였을까? 훈련병과 교관 뿐인 훈련소에서 그렇게 활발하던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보통 이병생활을 한 후, 생활과 훈련을 잘하는 해병 중에 조교를 뽑는 것이 관례였던 그 때 이례적으로 갖전출 온 이병을 유격조교로 뽑아서 더 그랬을까? 많은 선배해병들이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 했다.
더불어 훈련소에서 배운 경례법과 제식은 왜 실무부대 마다 다른지, 조그만한 내무실 청소에는 왜 그렇게 많은 법칙과 순서가 존재하는지, 표정에서 전투복 입는 방법, 행동 하나 하나가 부족함 투성이였고 맞선임은 나를 대신해 많은 꾸지람과 비난을 감수해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군생활 중 불행의 대박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시청각교실의 벽 한편에 군생활의 느낌을 적는 자유게시판이 만들어졌고 각 소대의 이병들은 그 빈칸을 채워야했다. 모두 익명으로 해준다는 행정관의 말만 믿고, 그 당시 이병의 답답한 마음을 솔직하게 적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630일이나 남았다. 언제쯤 따뜻한 봄이 올까?' 라고 적었고, 중대는 발칵 뒤집어 졌다. 갖들어 온 이병이 날짜를 세고 있어? 완전히 개념없는 놈이구만!
이 일으로 선임해병들은 물론 유격담당 중사에게 완전히 찍혀 유격조교에서 제외되고 기대주에서 문제투성이가 되었다. 따뜻한 봄을 외쳤던 나에게 침묵의 봄이 온 것이다.
한 조직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감정이다. 그 당시 이 왕따, 집단놀림형상에는 양쪽 모두에게 그 원인이 있다판단했다. 집단에 어울리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의 부제와 기존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을 배척하려는 현상이 합쳐져 생기는 것이다. 오랜기간 형성된 집단을 쉽게 바꿀 수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내가 바뀌자!
간부는 물론 많은 중대원의 미움은 고향에서 수백km 떨어진 외딴 섬에 한 청년을 극도의 외로움을 주었지만 한 편으로는 큰 동력이 되었다.
그 외로움과 조직에 적응하지 못한 내 자신이 실망스러웠지만, 어려움은 극복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630일 이후, 떳떳한 해병이 되어야 했기에 부족한 내 자신을 깨닫고 묵묵히 군생활에 임하는 계기로 삼았다.
초소에 근무를 들어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면 끊임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북한의 존재는 엹어지고 그리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마련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휴가를 받아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 안 풍경, 해병대입대를 말리던 어머니, 편지를 보내 준 고마운 친구들,
방한복을 뚫고 들어 오는 바람이 잦아들면 인간 근원의 외로움을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그 누구와도 똑같을 수 없는 유일한 개체로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이 존재한다.
신이 인간을 만들때 신의 능력
미친 듯 산을 쫓아다니는 사람은 자신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 할 절대적인 존재가 세계의 여러 산에 숨겨져 있기라도 하는 듯 산을 찾아헤매고,
이병의 끝 자락 이었다. 맞선임 해병을 따라 가족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동생에게 하거나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동생이 해병대 장교가 되는, 해병대학사장교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보통의 학사장교가 2년이면 끝날 것을, 이 해병대 학사장교는 대학교 4년 장학금을 받고 2년의 의무 복구기간을 더해 6년이나 해병대에서 근무해야 하는 제도였다.
"형님아, 해병대 할만하나? 내 해병대 장교 지원했데이"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나에게 해병대 생활을 물었다.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좋으냐고 조언을 구했다.
맞선임이 뒷편에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쁜 말은 하지도 못했고, 아직 무엇이 뚜렸이 좋은 점인 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해 볼만하다" 그저 이 한마디로 대답을 대신했다.
동생은 면접과 신체검사, 체력테스트 등을 거쳐 진짜 해병대학사장교가 되었고, 2학년 부터 장교로서의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장교가 되어 영문학과의 특기를 살려 해병대한미연합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이라크 해외파병을 가는 등 나보다 더 멋진 해병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해병대라는 공통점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10살이나 어린 사촌동생도 해병대원으로서 울릉도에서 근무함으로써 명절이면 작은 전우회를 기대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5개월이나 중대 막대로서 생활을 마치고 내가 가르치고 보살펴야 하는 맞후임을 들어왔다. 수십번 했던 예상과는 다르게 그 친구는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 일단 뚱뚱하고 느렸다. 훈련소를 거치며 살이 많이 빠진 것이라고 했지만, 신체적으로 준비가 안 되어 있어 훈련을 받거나 구보등을 할 때마다 뒤쳐졌다.
가슴아프고 답답했지만, 내가 그를 '해병'으로 만들어 줘야 하겠다는 의지가 불타 올랐다.
그의 행동은 하나 하나가 문제 투성이었다. 스스로 강한 해병이 되기 위해 들어 왔다 했지만 강한 정신은 보이지 않았다.
큰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줬다. 구보 중 낙오(뒤쳐지는 것)하지 말라고 꾸지람을 줬다.
중대전체 구보를 마치고 맞후임에게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다시 구보를 나섰다. 그는 힘들어 했지만 잘못된 해병정신에 사로 잡힌 나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데리고 산악구보코스로 이끌었다.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지막한 오르막이었다. 그는 달리다 말고 서버렸다.
내가 그렇게 강조한 것에서 벗어난 것이다. '너의 저질 체력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저질 정신력을 뭐라하는 것이다.' 뛰다 힘들어 걸어가더라고 쉬지 않고 이 코스를 완주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해병대 정신이 없는 것이라고 화를 냈다.
부대 구석에 위치한 사용하지 않는 초소로 그를 데리고 꾸지람을 줬다. 말 하는 것을 제일 먼저 듣는 이는 말 하는 자신이라 했던가? 스스로의 말에 영향을 받은 건지, 꾸지람의 정도가 점점 강해지자 화는 더 솟아 올랐다. 난 그의 가슴을 한 대 때렸다. 그 날 초소의 일은 효과가 있는 듯 했다. 몇 일이었지만 그의 행동은 조금 더 빨라졌고, 나는 이 후 몇 번의 폭력과 폭언을 일삼았다.
'야 뚱댕이, 그러고도 해병이야?' '억울하면 더 잘해', '이렇게 군생활 막하고 전역하고 해병대 나왔다고 자랑하고 다닐꺼지?' 등등
중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와의 싸움 이 후,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던 나에게 이상한 자극이 몰려왔다. 나의 폭력에 그는 그는 가만히 있어야 했고, 내 말을 들어야만 했다. 둘만의 관계에서 나는 분명히 권력자였다.
중대의 구석진 어딘가에서 그를 다그치며 주먹을 뻗으려는 때였다. 내 스스로의 모습에 흠짓 놀랐다. 폭력을 즐기고 있었다.
'강한해병'을 만들겠다는 선의의 목적에 숨겨진 폭력과 권력의 더러움이 날 지배했다.
.
'어! 이건 아니지... 이것은 잘못된 일이야!!!' 뒤늦은 깨달음이 있었지만, 그 맞후임은 중대에 적응 하지 못하고 일병휴가 후 다른 부대로 전출갔고, 그는 간부들에게 나의 행동들을 알렸다.
그 짧은 몇 개월, 난 분명 내가 가진 알량한 권력과 폭력이라는 행위에 중독 된 것이다. 나는 다시 소대막내가 되었고, 폭력을 행사한 관심병사가 되어 간부들의 각 종 감시를 받아야 했다.
잘못된 사랑의 비참한 말로였다.
마치 첫사랑을 오래도록 기다리던 청년에게 그 기회가 주어졌지만, 어떻게 상대방을 사랑하고 배려해야 하는 지 몰랐다. 바닷새를 사랑한 노나라 임금처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한 것이다.
심지어 그 방식이 비이상적이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멈추지 못했다.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사랑은 상대방에게 사랑이아 아니다.
맞후임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 따랐다. 상처가 아물며 한 번의 실패를 거울 삼아 친절하고 이해심 깊은 선배해병이 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군미필자 후배들은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을 핑계삼아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이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을 것이다. 군인의 존재이유는 내가 속한 국가를 지키기 위함이다. 개인의 철학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미스터 흑룡
군대에서 상병이 되고 병장이 되면 시간이 제법 생겨 각자의 취미와 미래의 계획에 맞게 여러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많은 해병대원들과 같이 나도 웨이트트레이닝에 빠지게 되었다.
병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봄, 내가 속한 대대는 육체미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중대원들의 여론에 힘입어 나는 출전을 결정하였다. 준비 하는 동안 신체력으로는 피곤 할 지라도 마음은 항상 즐거웠다. 입대 전 생활체육보디빌딩 자격증이 있는 선배해병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인 운동을 할 수 있었다. 훈련이 있는 날이건 없는 날이건 하루 2시간은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일요일이면 6시간 이상 집중했다.
대회 당일, 주계(삭당)탁자를 붙여 무대가 만들어지고, 각 중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모였다. 스무살을 갖넘어 군대에 온 우리모두는 보디빌딩에 '보'자도 모르는 초짜들이었다.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근육이 더 잘보여지는지, 포즈에 따른 힘은 어떻지 주는 건지 아무 것도 모른체, 해병대 빨간 반바지에 식용류를 바르고 무대에 올랐다.
대회의 수준은 낮았지만, 참가자의 열정만은 가득했다.
당시 내가 속한 중대뿐만 아니라 나보다 먼저 운동을 시작한 선배해병들의 몸이 더 좋았다. 그런데 하늘이 도운걸까? 그 병장해병들은 휴가를 나갔고 운 좋게 내가 '미스터 흑룡'이 될 수 있었다.
보디빌딩은 종합 예술이다, 자신의 몸이라는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재료를 가지고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조각상을 만드는 행위이다. 작품을 만드려면 각 종 도구가 필요한데, 제일 먼저 정신적인 것, 인내, 절재, 꾸준함 등이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된다.
두번째로 근육을 단련 할 물리적인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여러 형태의 운동기구이다.
세번 째로 적절한 음식과 휴식이 필요하다.
이 세가지 도구를 잘 활용해야만 자신이 원하는 예술작품을 얻을 수 있다.
군대는 물질적인 환경은 좋지 않지만 첫번째 도구인 정신적인 것이 충만한 곳이다. 시멘트로 만든 아령과 낡은 벤치 하나만 있어도 중력에 저항하고 인내하며 생활을 절재하고 꾸준함으로 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운동하며 군생활에 임했다.
이 후, 대학교에 복학하여 2만명의 학우와 교직원 중 몸짱을 뽑는 주최하는 대회에 3년 연속 출전하여 꾸준히 입상하는 등 지금도 나만의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해병대 훈련을 통해, 특유의 '강함'을 추구하는 문화를 통해 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있는 것, 자신 안의 내면의 강함이야 말로 수십년을 내려 온 '해병대 정신'이다.
이병, 일병, 상병, 병장 평범한 네 계급을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경험한다. 이 시간은 사회에 각 개인의 청,장년기를 축약한 것인다. 일병은 이병을 챙겨주고, 병장은 상병을 챙기고, 전역한 선배들은 휴가나온 후배들을 챙긴다. 사회초년생으로서 해야 할 일, 중간 위치에서 해야 할 일, 부대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자질을 농축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이 군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