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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artist Jul 27. 2017

Part 2. 4 알바분투기, 어둠의 세계

군대와 사회 사이에서

군대를 다녀 온 나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한국사회'였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덕에 자연 속에서의 놀이는 실컷 할 수 있었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대학교 1학년 때 까지 흔히하는 편의점 알바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6월달에 전역하여 9월달 가을 학기에 복학 할 수 있었지만, 사회를 공부하고 내공을 쌓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정했다.


이병월급 3만원일 때부터 차근 차근 모은 군대 월급과 부모님에게 받은 조금의 돈, 백오십만원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처음 일하게 된 것은 쇼핑몰 보안요원이었다. 해병대를 나왔다는 것 자체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던 것 같

다. 업무는 단순했다. 안전, 보안에 관한 것을 항상 생각하며 나머지 시간에 손님들을 돕는 것. 처음에는 하루 종일 서 있는 것이 힘들었다. 8~9시간 지정 된 곳에서 서 있어야 하는데, 장시간 서 있다보니 무릅과 허리가 아팠다. 

건강한 시절이라서 그랬을까? 시간이 조금 지나니, 적응되어 그렇게 힘들지 않았고, 함께 일하는 분들이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어 이야기 하는 것도 즐거웠다. 


맥주집, 아직 군대 머리가 남아 있어 누가봐도 군인 같았던 시절, 맥주집 알바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가서 외워야 하는 테이블은 왜 내가 생각한 순서되로 놓여져 있지 않은 건지, 외우기가 쉽지 않았다. 

간단한 화채를 만들거나 노가리를 굽는 것도 알바들이 했는데, 울려되는 벨에 반응하랴 안주 만드랴 만만하하 않았다. 손님들 중 안주가 맛이 없다, 맥주 맛이 왜이러느냐 화내는 사람들은 기본이고, 간혹 거품이 조금 많이 따라지면 어김없이 불평이 뒤 따랐다. 

내성적인 성격이 많이 고쳐졌다고 생각했지만, 처음보는 여자손님들 앞에서는 어김없이 부끄럼 많은 꼬마 남학생이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재밌는지 일부로 벨을 눌러 날 놀리는 여자 손님들도 있었다.


유흥주점 웨이터,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사회 속에 모르는 것이 많고 궁금한 것이 많던 나에게 밤의 문화는 미지의 세계였다.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벼룩신문 구인란을 보는데 유흥주점 웨이터 모집광고가 눈에 띄었다. '흠..그래, 이 기회에 어둠의 세계도 한번 경험해 보자!'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전화를 드리니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런 곳도 이력서를 보는 구나! 내심 조금 놀라며 노트북의 이력서를 출력하여 면접장소로 갔다.


유흥주점의 사장님, 어두운 지하의 검고 붉은 조명 아래 얼굴에 큰 상처가 있고 온 몸에 문신이 가득한 우락부락 몸매의 소유자 일 것 같았다. 하지만 노래바(노래방이 아님)사장님의 인상은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군대에서 흔히 본 작업의 신 중사님 정도!?의 적당한 덩치와 몸매, 약간은 강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청소를 마친 빈 방으로 나를 데려간 그는 직접 여러가지를 질문했다.  잘 할 수 있겠냐고 묻기에, 잘 할 수 있다고 대답 했다.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래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조금 못 믿어워하는 눈치였지만, 마땅한 지원자가 없었는지 나를 고용했다.

그 날 저녁 정장바지와 하얀 와이셔츠를 구입해 실전에 투입되었다.

일단 서빙을 하는 것이 주임무이다. 그리고 그 임무를 수행하며, 손님들을 기쁘게 해드려야 팁을 받을 수 있다. 

한달 기본급이 워낙 낮아 때문에 팁을 얻지 못하면 최저임금에 턱 없이 모자란 월급이었다. 

손님이 오거나 예약이 들어오면 카운터를 보는 매니저 이모는 

'보도방'이라 불리는 곳에 전화를 하고, 그 곳에서 손님숫자에 맞게 젊은 여자들을 보내준다. 


대게 아저씨 손님들, 30대 이상의 남자분들이 주로 왔는데 규모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서 그런지 5명 이내의 그룹이 많았다. 

이전에 티비속 서빙을 하는 웨이터 분들은 한 손으로 쟁반가득한 술을 들고 거침없이 걸어 다녔는데, 초짜인 나는 그런 것은 너무 고급 기술이었나 보다. 처음에는 술 쟁반을 두 손으로 들고 다녔는데, 한번은 재털이와 담배등으로 한 손을 사용해야 했고, 평소 운동신경만 믿고 한 손으로 들고 가다, 쟁반을 쏟아 술병은 다 깨어지고 욕은 욕대로 먹는 일도 있었다.


또 다른 힘든 점은 보도방 아가씨들과의 호흡이었다. 젊은 남자웨이터인 내가 아저씨 손님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주방 삼촌에게 부탁하여 과일안주나 서비스를 넣어주는 것과 룸에 들어갔을 때 재떨이를 비워주거나,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것이 전부였기에, 그 아가씨들이 옆에서 하는 몇 마디가 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쉬웠다.

하지만 난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본 어리숙한 남자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스쳐지나가듯 만나는 그들에게 점수를 얻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당연히 나는 팁과의 거리는 멀어졌다.


가끔은 만취해 추태를 부리는 손님도 있었다. 이런 경우 내가 직접 손님을 상대해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매니저 이모가 출동하여 능수능란한 말솜씨와 리드로 그들을 택시로 이끌었다. 물론 그 손님들이 남기고 간 구토의 흔적과 깨진 술병을 치우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 전에 가지고 있던 어둠의 세계에 대한 이미지는 어둡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도 범죄자이거나 성격이 더러워 함께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대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그곳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곳 만큼 그렇게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카운터를 보던 매니저이모는 세상의 풍파를 많이 겪어 왠만한 술주정 손님에게도 화를 내거나 손님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없었다. 주방에 일을 하던 삼촌은 지명수배자의 신분이었지만, 알바를 막 시작해 어리버리한 나를 위해 과일이나 노가리 같은 안주를 서비스로 줄 곧 내어주며 응원을 마다 않는 친절한 분이었다.


물론 내가 그 유흥주점 웨이터로 일한 시간이 짧은 만큼, 진짜 위험한 일을 보거나 경험하지 않은 것이 지금 그 때의 경험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일로 우리들의 인생은 언제나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법이라는 사회규범 밖에도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은 찐득하게 존재하며, 어느 시끌벅적한 유흥주점의 시계도 국회의사당의 그것처럼 계속 흘러간다는 것이다. 



고층창문닦이

고층빌딩 창문닦이 알바는 내가 한 가장 위험하지만 시급이 센 알바였다. 산악부를 하며 암벽등반을 한 경험이 주요했다. 전문적인 고층건물청소 업체가 없는 중소 도시의 10층 건물이었다. 카페를 운영하고 계시는 사장님이 유리창이 더러워 청소를 하고 싶은데, 주변의 건물들로 인해 크레인이 접근 할 수 없어 나에게까지 연락이 닿은 것이다.

혼자는 할 수 없으니 동아리 후배 한명을 섭위 했다.  장비실에서 벨트와 자일, 등반장비를 챙겨 그곳으로 향했다.

빌딩 옥상에 우리 몸무게를 버텨 줄 만한 확보물을 찾아 자일을 설치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안전하강수칙만 잘 지키면 문제 없을거야!'  

암벽등반을 하며 수많은 하강을 했지만, 이렇게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의 옥상은 처음이었다.


수평의 옥상에서 수직으로 변하는 난간에 서서 자일을 서서히 풀었다. 몸이 밑으로 향하며 중력이 점점 심하게 느껴져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다 잡았던 마음은 떨리고 있었다. 

천천히 목표로 하던 유리창에 도착하여, 자일에 내 몸을 고정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당시 암벽화를 신고 있었는데, 유리창에 물과 세정액등이 묻으니 매끈매끈한 암벽화 바닥창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뿔사, 이 곳은 암벽등반 장의 바위가 아닌데!!' 

처음이라서 겪는 시행착오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대가가 걸려 있었다. 발이 미끄러워 옆으로 이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나중에 옥상으로 올라 갈 때도 안전상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전문적인 업체가 아닌 개인대 개인의 약속이었고, 계약서나 보험 같은 것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 믿을 건, 내 자신과 이 자일뿐. 

'괜찮아, 할 수 있을거야! 괜찮아, 괜찮아!' 

약 한시간의 창문청소는 떨리는 마음으로 금세 지나갔다. 


발이 미끄러워 올라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다행히 아무런 문제 없이 단단한 옥상의 시멘트를 밟을 수 있었다.

기다리고 계시던 카페사장님은 수고했는 말과 함께 봉투를 건네 주었다. 하얀 봉투 속에는 한시간의 창문닦이 알바로 17만원이라는 거금이 있었다. 17만원은 당시 크레인을 한 번 부를 때 드는 비용이었다.

그 돈을 조금 더 의미 있는 곳에 썼더라면 좋았을 텐데, 떨리는 마음에 지친 나는 함께 온 후배와 구경온 친구를 데리고 대부분의 알바비를 회전초밥집에서 굶주린 배를 채우는데 사용하였다. 


훗 날 철이 조금 더 들고 이 알바를 생각했을 때 깨달은게 있다면, 쉽게 번 돈은 쉽게 쓰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 되거나 주식에서 우연찮게 많은 돈을 단 시간에 번 사람들이 쇼핑이나 유흥에 그 돈을 물쓰듯 하게 된다. 이 것은 고층창물닦이, 이 경험과 비슷하지 않을까? 더불어 내 안전과 직결되었던 소중한 돈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돈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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