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희야, 너는 책 왜 읽는데?”
“대희야 네가 얘기해 봐. 넌 책 왜 읽는데?”
나는 이 질문을 받고 진짜로 5초 정도 멈췄다.
아니, 이걸 왜 나한테 묻지 싶었다.
같은 일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대학교 cc로 시작해서 결혼까지 간 아내가 있고, 지금 5년 차 부부다.
와이프도 연애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서슴없이 말하는 편한 관계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선을 안 본다.
작년 말이었다.
일 때문에 친구를 만났다가 자연스럽게 저녁을 먹게 됐고
식사를 마친 뒤 친구 집으로 넘어갔다.
“잠깐 이것만 정리하고 가자.”
이 말은 항상 위험하다.
보통 그 ‘잠깐’이 우리한테는 2~3시간이다.
그날도 그랬다. 업무는 이미 끝났고
괜히 노트북만 켜져 있었고
우리는 이미 잡담을 시작하고 있었다.
술은 아니고, 그렇다고 안 마신 것도 아닌
애매한 1.5차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나는 그때 술을 조금 멀리하던 시기라 셋 다 꽤 멀쩡한 상태였다.
근데 사람이 멀쩡하면 이상하게 더 위험한 대화를 한다.
술 마시면 웃고 넘어갈 얘기를 멀쩡하면 끝까지 간다.
한 2~3시간쯤 지났을까.
사는 얘기를 하다가
친구가 갑자기 와이프를 보며 말했다.
“너도 책 좀 읽어. 유튜브 먹방 이런 거 그만 보고.”
“책 읽으면 진짜 시야가 달라진다니까.”
톤이 약간…
남편이라기보다는 팀장에 가까웠다.
퇴근 후에도 회의하는 느낌.
이 친구는 그때 파주에서 회사 본사 신축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
우리가 같이 집을 지어드렸던 건축주이자 모 회사의 사장님이었고,
그 사장님이 서울대 철학과 출신이었다.
나도 집을 지으면서 겪어봤는데 정말 보통 분은 아니었다.
그 사장님은 2~3주에 한 번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회사인지 북클럽인지
가끔 헷갈릴 정도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친구는 책을 읽기 시작했고
원래도 성격이 집요한 친구라 어느 순간부터는 거의 집념으로 읽고 있었다.
약간 이런 느낌이다.
“이 챕터만 넘기면 내 인생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 같은데?”
그래서였을까. 그 열정이
와이프에게 그대로 향했다.
아니, 향했다기보다는 그냥 던져졌다.
와이프가 바로 받아쳤다.
“또 그 소리하네. 내가 읽고 싶으면 읽겠지.”
“왜 자꾸 강요해.”
그 순간 공기가 딱 바뀌었다.
아, 이거 여기서 잘못하면 싸움 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역시나
“대희 봐. 책 자주 읽으니까 애가 달라 보이잖아.”
야 이건 좀 아니지.
나는 여기서 바로 싸함을 느꼈다.
그래서 바로 말했다.
“야 왜 나까지 끼워 넣냐. 나도 안 읽고 싶으면 안 읽어.”
그냥 분위기 좀 풀려고 한 말이었다.
근데 그때 와이프가 나를 보며 물었다.
“대희야, 너는 책 왜 읽는데?”
아…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이건 도망 못 간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내 의견 궁금하면 둘 다 5만 원씩 내.”
농담이었다.
진짜였다.
솔직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괜히 이 사이에 끼어서 새우등 터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근데 둘이 동시에 지갑을 열더라.
그때 느꼈다.
아, 오늘은 가볍게 넘기면 안 되는 날이다.
이건 10만 원짜리 질문이다.
과연 내가 10만 원치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1분 정도 생각한 뒤
나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너희 오감 중에 하나만 남겨야 하면 뭘 남길 것 같아?”
둘 다 시각을 골랐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시각으로 제일 많은 정보를 얻잖아.”
“영화를 봐도 자막만 있어도 볼 수 있고”
“듣지 못해도 표정이나 제스처로 어느 정도 소통이 되잖아.”
“그만큼 우리는 보는 걸로 많이 이해하는 것 같아.”
“근데 유튜브는 그냥 보여주는 걸 받아보는 느낌이야.”
“그래서 그런지 기억이 그렇게 오래 남지는 않더라.”
“근데 책은 좀 다르더라.”
“분명 글자인데 읽다 보면 머릿속에서 장면이 만들어져.”
“그래서 어떤 장면은 유튜브보다 더 선명하게 남더라.”
나는 그게 좋아서 책을 읽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옆에서 친구가 또 얹었다.
“대희 말 잘 들어봐.”
야… 이놈 오늘 제삿날인가. 왜 이렇게 불을 붙이냐.
그래서 나는 바로 말을 이어갔다.
“근데 너는 아마 책을 교과서처럼 읽는 스타일 아니야?”
“읽다가 이해 안 되는 부분 나오면 다음 장을 못 넘기는 그 느낌.”
“공부 잘했던 애들 그거 진짜 심하더라.”
와이프가 바로 말했다.
“맞아. 딱 그래.”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근데 나도 책 읽어도 다 이해 못 해.”
“그냥 이해 안 되면 이해 안 되는 대로 넘어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걸 정답처럼 찾으려고 하기보단”
“그냥 내가 이해한 만큼 가져가.”
“그게 맞는 해석인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더 남더라.”
“그리고 같은 책도 상황마다 다르게 읽히더라.”
“기쁠 때 읽을 때랑 힘들 때 읽을 때랑 받아들이는 게 다 달라.”
“책은 그대로인데 읽는 내가 바뀌니까 내용이 바뀌는 느낌.”
여기까지 말하고 나는 잠깐 멈췄다.
“그래서 나는 너한테 책 많이 읽으라고 굳이 말하고 싶진 않아.”
“너는 사람도 많이 만나고 밖에서 이것저것 많이 하잖아.”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운동 하나도 안 하고 책만 읽는다고 해서 건강한 사람은 아니잖아.”
“책은 주식이 아니라 영양제 같은 거 아닐까.”
“밥은 안 먹고 영양제만 먹는다고 건강해지는 건 아니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와이프가 친구를 보며 말했다.
“야 차라리 이렇게 말하지 그랬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은 내가 너 살렸다.
근데 친구가 또 물었다.
“그래서 넌 책 읽으면서 뭘 얻는데?”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리는 살면서 시간도 없고 돈도 제한돼 있잖아.”
“책은 그 사람이 평생 겪고 얻어낸 걸 제일 싸게 맛볼 수 있는 방법 같아.”
“약간… 인생 시식 같은 거지.”
“다 살아보긴 부담되니까 한 입만 먹어보는 느낌.”
그리고 나는 하나 더 덧붙였다.
“그리고 가끔은 내가 지금 맞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을 때가 있거든.”
“
그럴 때 책 보면 아, 나만 이러는 건 아니구나 싶더라.”
“먼저 살아본 사람이 옆에서 괜히 한마디 해주는 느낌?”
말을 마치고 나는 바로 10만 원을 챙겼다.
이건 합법적인 수익이다.
둘 다 좀 놀란 표정이었다.
“야 대희 너 달라 보인다.”
나는 그 낯간지러움을 못 이겨 말했다.
“세치의 혀도 책 읽다 보면 훈련되는 거야.”
웃으며 넘겼다.
그날은 그렇게 부부싸움 직전에서 겨우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그 10만 원을 들고서점에 갔다.
읽어보고 싶던 책을 같은 걸로 세 권 골랐다.
그리고 그 친구 부부에게 건네며 말했다.
“언제까지 읽자 이런 거 하지 말고”
“그냥 나중에 만나서 어떻게 느꼈는지만 얘기하자.”
굳이 읽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현장에서 일이 잘 안 풀릴 때,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을 때.
예전에 책 한 권을 읽다가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거기서 멈췄을 거다.
근데 그날은 그냥 넘겼다.
이해 못 한 채로.
그리고 한참 뒤에 다시 봤는데
그때는 이상하게 이해가 되더라.
책이 바뀐 게 아니라
그 사이에 내가 조금 바뀌어 있었던 거다.
그때 알았다.
책은 나를 가르치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보여주려고 있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우리는 모든 삶을 다 살아볼 수 없으니까.
가끔은 내가 아직 살지 않은 인생을 잠깐 빌려 살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내가 어디쯤 와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