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에선 앞으로 5년간 AI·신기술 인재 58만 명이 부족하다는 보고서가 쏟아집니다. 이공계 인재 부족의 원인으로는 빠짐없이 이렇게 정리하죠.
① 보상이 부족하고 ② 직업 만족도가 낮고 ③ 직업 안정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해법도 똑같습니다. 성과 중심 보상체계로 바꾸고, AI 중심 경력 사다리를 만들고,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겠다.
겉으로 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한 발만 더 들어가 보면 이 설명은 어딘가 결정적인 한 조각이 빠져 있습니다. 왜 청소년들은 여전히 이 모든 걸 알아도 의대를 택하느냐?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정책 문장은 아무리 화려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을 먼저 볼게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공학은 저성장 자산입니다.
최근 자료를 보면 자연계 상위 1% 학생의 약 77%가 의대로 향하고, 일반 이공계 학과로 가는 비율은 10% 남짓에 불과합니다. 이미 수학 잘하는 아이 = 의대 준비생이라는 공식이 고착된 사회입니다.
한편 AI 인력 숫자만 보면 상황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AI 인력은 약 5만 7천 명, 이 중 58%가 석사 이상 고학력자이고, 일반 근로자보다 약 6% 높은 임금 프리미엄을 받고 있습니다.
고학력, 고임금, 미래 유망 분야라면 청년들이 줄을 서야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연구기관은 향후 5년간 58만 명 이상이 부족할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이 말은 곧 시장이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사람들의 선택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진짜 원인 첫번째, 의대는 보험입니다.
우리는 의대 쏠림을 종종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라고 단순화합니다. 데이터를 해석하는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의대 쏠림은 불안의 지표에 가깝습니다.
제조·수출 중심 한국 경제는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고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안정 서사가 더 이상 모두에게 열려 있지 않으며 스타트업과 테크기업은 성장 스토리는 화려하지만 구조조정·빅테크 감원 뉴스도 동시에 노출됩니다.
이 모든 신호를 종합한 청소년과 학부모에게 의대는 이렇게 보입니다. 이 나라에서 평생을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확정이자. 의사는 AI가 들어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직업이고, 인구 고령화와 의료 수요를 생각하면 수요가 급감할 가능성이 낮은 직업입니다.
반면 공학·AI 분야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팀이 해체되고, 기술이 바뀌면 경력도 리셋되고, 회사 하나 잘못 만나면 구조조정 1순위가 됩니다.
즉 의대는 안정적인 채권, 이공계·AI는 고레버리지 들어간 성장주처럼 보이는 겁니다. 이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성과 중심 보상을 외쳐도 학생들의 선택은 달라지기 어렵습니다.
진짜 원인 두번째, 실패하면 끝나는 사회에서 누가 도전하나
또 하나 중요한 변수는 실패 비용입니다.
AI 연구자, 개발자, 창업자는 직업 특성상 실패를 전제로 움직이는 사람들입니다. 논문 10편 중 1편, 서비스 10개 중 1개만 살아남는 세계죠.
그런데 한국의 현실에서는 벤처 한 번 망하면 대출·신용·평판이 크게 떨어지고 이직을 자주 하면 충성심이 없다는 레이블이 붙고 공공·대기업 채용에서는 여전히 깔끔한 이력서가 선호됩니다. 실제 한국은행 연구는 한국의 연공서열 임금 체계와 경직된 승진 구조가 젊은 AI 인력을 해외로 밀어내는 요인이라고 지적합니다.
같은 실력의 엔지니어가 한국에서는 팀 막내로 야근하다가 해외에선 프로젝트 오너로 대우받는 구조라면 인재가 국경을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운 자본 흐름입니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내놓는 해법이 성과급을 조금 더 드리겠습니다 사회적 위상을 높이겠습니다. 라면 인재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줄 건가요, 아니면 성과 못 내면 조용히 나가달라는 뜻인가요?
실패해도 다시 기회가 오는 구조 없이 성과 중심만 외치면 강도 높은 성과주의입니다.
진짜 원인 세번째, 돈보다 중요한 건 이야기다
데이터만 보면 AI 인력은 임금 프리미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의대를 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공계·AI 분야에 매력적인 이야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이미 강력한 서사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살린다,
전문직이다,
안정적이다,
가족과 주변이 쉽게 이해한다.
반면 이공계·AI 인재의 서사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코딩하는 사람?
밤새는 개발자?
언제 잘릴지 모르는 IT 노동자?
한국의 많은 기업이 여전히 연구·개발자를 밑에서 일만 하는 을로 대합니다. 기획·영업이 판을 짜고 개발은 시킨 대로 만드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면 이 분야에 도전하는 청년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해외에서 인재를 빨아들이는 회사들은 조금 다릅니다. 연구자 이름을 전면에 세우고, 실패한 프로젝트 경험도 커리어로 인정하고, 우리가 이런 문제를 같이 풀어보자는 장기적인 비전을 보여줍니다.
연봉표만으론 인재를 못 부릅니다. 사람은 결국 어떤 이야기에 내 인생을 걸 것인가를 보고 움직입니다.
그럼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의대 vs 공대 싸움이 아닙니다.
이공계 인재 부족을 해결하려면 이공계 처우만 올리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의대 쏠림을 욕하기 전에 의대 말고는 믿고 걸 수 있는 선택지가 없게 만든 구조부터 손봐야 합니다.
의대만 안전한 나라에서 여러 직업이 함께 안전한 나라로 가야됩니다.
공학·AI·연구직에 대해 장기 고정급 + 명확한 성과 보너스 구조를 만들고, 구조조정 시 연구·개발 직군이 항상 1순위가 되지 않도록, 공공·대기업·스타트업을 오가는 안전한 회전문을 설계해야 합니다.
의대는 정원 논쟁 이전에 지역 의료, 필수과 기피, 수가 체계 같은 구조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의사 = 특정 대도시 대형병원 쏠림 구조를 완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해도 다시 설 수 있는 AI·이공계 생태계가 필요합니다.
파산·실패 경험이 있는 창업자와 연구자가 공공기관·대기업 채용에서 오히려 도전 경험으로 인정받는 인사 정책이 필요합니다. 정부 R&D 과제도 실패율 0%를 요구하는 대신 명확한 가설·실험·검증 과정을 밟았다면 실패도 성과로 인정하는 평가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10대가 공학을 선택해도 이상한 애 소리 듣지 않는 문화입니다. 네이버 데이터랩에서 의대 쏠림, AI 인재, 이공계를 함께 검색해 보면, 입시철마다 세 단어의 검색량이 동시에 튀어 오르는 패턴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과 부모가 같은 시기에 어느 길이 우리 아이에게 더 안전한가를 계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학교·미디어·콘텐츠에서 공학자, 연구자, 데이터 과학자의 실제 삶을 보여주는 이야기, 사람을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기술자의 롤모델을 꾸준히 비춰줘야 합니다. 공대는 세상의 문제를 기술로 고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데이터로만 보면 한국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AI 인력을 보유했고, 임금 프리미엄도 존재하며, 정부도 정책 보고서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현장은 사람이 없다고 울상이고, 청소년은 여전히 의대로 몰립니다.
제가 보는 진짜 문제는 숫자보다 이야기입니다.
이공계·AI를 선택했을 때 가족에게 설명하기 쉬운가,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가, 이 일을 평생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그림이 그려지는가.
지금의 한국은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장 대신 생존을, 도전 대신 보험을 선택합니다. 의대 쏠림은 그 결과로 나타난 하나의 지표일 뿐입니다.
장기 투자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이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한국의 테크 기업과 AI 생태계에 진짜 장기 자본이 붙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시장에선, 기술도 자본도 결국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질문은 단순합니다.
10대 아이에게 공학·AI를 추천했을 때 괜찮은 선택이야라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는 날, 대한민국은 비로소 무늬만 AI 국가가 아니라 사람과 데이터가 함께 성장하는 진짜 기술 국가가 될 거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