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700점의 나라

아직도 토익을 붙잡는 대한민국

by DataSopher




“요즘도 토익 해?”

이 질문은 이상하게도 안부처럼 들립니다. 취업 준비생에게는 생존 확인이고 이직을 준비하는 직장인에게는 보험 점검이며 스스로를 다그치는 사람에게는 ‘나 아직 경쟁 중이야’라는 자기 암시죠. 한국에서 토익은 불안을 측정하는 체온계가 됐습니다.


데이터로 보면 이 체온계가 왜 아직도 깨지지 않았는지 보입니다. 국내 주요 기업 채용 공고를 분석한 자료에서 채용 공고 722건 중 612건(약 84.8%)이 TOEIC 성적을 전형에 반영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중 기준점수를 제시한 기업들에서 700점 이상 요구 비중이 가장 컸다고 하죠. ([미래를 보는 창 - 전자신문][1])


토익은 ‘영어 실력’이라기보다 채용 시스템이 쓰는 분류 태그에 가깝습니다. 사람을 빠르게 줄 세우기 위한 가장 값싼 필터.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생깁니다. 토익이 ‘실력’이라면 한 번 잘 보면 끝나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재응시, 재응시, 또 재응시죠. 왜냐하면 토익은 능력의 증명이라기보다 기회의 문턱을 통과하는 통행증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토익 정기시험 응시 목적을 보면 취업 준비가 가장 큰 비중(41.8%)으로 나타납니다. ([edu.chosun.com][2])

공부가 실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 열리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존재할 때 학습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문턱은 상황에 따라 높아지거나 옆으로 이동하니까요.


국제적으로도 비슷한 맥락이 보입니다. ETS의 TOEIC 전 세계 응시자 보고서에서는 응시 목적 중 ‘취업/구직’이 큰 비중(예: 2024년 보고서에서 27%)을 차지합니다. ([ETS][3])

더 오래된 보고서에서는 한국이 ‘취업 목적 응시 비중이 높은 나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ETS][4])

이 말은 곧 한국의 토익 문화가 노동시장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개인의 게으름이나 집착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습관.


또 하나의 데이터는 더 솔직합니다. 2025년 12월 말 시험의 응시자 평균 점수는 682.9점으로 발표된 바 있습니다. ([Lec][5])

여기서 저는 숫자 자체보다 “평균이 계속 공유된다”는 현상이 더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점수로 서로를 비교하면서도 평균이라는 집단의 담요 속으로 숨습니다. “나만 뒤처진 건 아니야.” 토익은 개인에게 성취의 도구인 척하지만 사실은 집단 불안을 관리하는 장치처럼 작동합니다.


그럼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사람을 이런 방식으로 뽑아야 하냐”로요.


기업 입장에서는 이해가 됩니다. 지원자가 수백, 수천 명일 때 ‘대화’로 검증할 시간은 없습니다. 토익은 간편하고 값싸고 책임도 회피하기 쉽습니다. “점수 기준으로 뽑았어요”라고 말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사회 전체로 보면 비용이 큽니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교재, 같은 문제 유형, 같은 요령에 시간을 씁니다. 그 시간에 만들 수 있었던 포트폴리오, 읽을 수 있었던 책, 쌓을 수 있었던 실무 경험은 증발합니다. 개인의 시간 손실이 사회의 생산성 손실로 누적됩니다.


AI 시대에는 이 모순이 더 선명해집니다. 번역·요약·작문 보조가 일상화될수록 “문법을 맞췄는가”보다 “무엇을 설계하고, 무엇을 설명하고, 무엇을 설득하는가”가 중요해지니까요. 토익이 ‘언어의 본질’을 담기 어려운 시험이라는 사실은 예전에도 알았지만 이제는 기술이 그 간극을 더 크게 벌립니다. 시험은 점점 고정되어 있는데 실무 언어는 점점 살아 움직입니다.


그렇다고 저는 “토익을 당장 버리자”는 낭만을 말하고 싶진 않습니다. 구조가 존재하는 한 개인이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전략도 필요하니까요. 우리가 최소한 정확히 이름 붙이면 좋겠습니다.

토익은 영어 실력의 완전한 증명이 아니라 채용 시장에서 통용되는 신호(signal)입니다. 신호는 필요할 수 있지만 신호가 목적이 되면 삶이 말라갑니다.


제가 바라는 희망은 하나입니다. 기업과 개인이 동시에 조금씩 이동하는 것. 기업은 점수의 필터를 완화하고 과제·포트폴리오·직무 대화 같은 방식으로 “실제 일”을 더 보려는 움직임을 늘리고 개인은 토익을 ‘문턱 통과 옵션 중 하나’로만 다루는 것. 토익 점수는 상승할 수 있어도 내 시간의 가격까지 싸게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한국이 아직도 토익을 붙잡는 이유는 불확실성을 싫어하는 사회가 확실한 숫자에 기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확실성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 나은 질문을 던질 때 숫자는 성장으로 가는 지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도 토익을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그 점수는 당신을 증명하나요 당신의 불안을 달래주나요?”


여러분의 시간을 가장 많이 가져간 ‘문턱’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되찾는 법을 함께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1]: https://www.etnews.com/20251128000287

"[에듀플러스]“국내 기업 85% 'TOEIC 필수'…700점 이상 요구 ..."



[2]: https://edu.chosun.com/m/edu_article.html?contid=2025041080088&utm_source=chatgpt.com "2024년 국내 토익 정기시험 평균 점수 '683점'…응시 목적 1 ..."



[3]: https://www.ets.org/pdfs/toeic/toeic-listening-reading-report-test-takers-worldwide.pdf

"ETS TOEIC L&R 2024 Report on Test Takers Worldwide"



[4]: https://www.in.ets.org/content/dam/ets-india/pdfs/toeic/toeic-listening-reading-report-test-takers-worldwide.pdf

"2021 Report on Test Takers Worldwide — TOEIC® ..."



[5]: https://www.lec.co.kr/news/

articleView.html?idxno=751329&utm_source=chatgpt.com "2025년 12월 28일 시행 토익, 응시자 평균 총점 682.9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