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곧 가양대교가 나타나면서 고속도로보다 더 시원스럽게 뚫린 자유로로 이어진다. 여기서 다시 3분 정도 달리다 보면 다시 왼쪽 멀리로 나지막한 산이 하나 눈에 보인다.
이 산이 바로 고양시 지도면 행주내리 덕양산성이며 해발 124미터의 그 유명한 행주산성인 것이다. 이 행주산성은 권율 장군이 군사 2800명으로 왜군 3만대군을 섬멸한 행주대첩지이다.
임진왜란 3대첩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그리고 김시민의 진주성 대첩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중에 또 하나의 승첩지인 행주산성 정상에는 행주대첩비가 높다랗게 세워져 있다. 권율 장군이 왜적의 무리를 통쾌하게 격파하고 사상 초유의 국란을 극복해 낸 민족의 얼을 한데 모아 세운 높이 15미터의 대형 대첩비인 것이다.
계사년 2월 12일, 그날 왜적을 격멸한 성의 모습은 안타깝게도 별로 찾아보기가 어렵다.
명나라 말기의 장수인 이여송이 한성 탈환전에서 패하자 전라감사 권율이 한성을 수복하기 위해 승장 처영과 함께 한성부 서쪽 20리 행주산성까지 진출하게 된다.
한편 한성의 왜군 본진은 권율이 일전을 결할 자세로 행주에 배수의 진을 치게 되자 이번에야말로 원한을 갚을 기회라며 총대장과 소서행장 등 왜군 3만이 7대로 나뉘어 손바닥만 한 이 행주산성을 한입에 집어삼킬 듯 무서운 기세로 몰려들어왔다.
선두에는 1백여 기나 되는 홍백 기를 높이 들고 달려 나오고, 양옆으로는 괴상야릇한 차림새로 분장한 병사들이 춤까지 추면서 무서운 기세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권율 장군은 이런 날이 오기를 늘 고대해 왔기에 오히려 두러워하기는커녕 신바람이 났다. 그러기에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이 전투를 하기 위해 호남의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던 것이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도착하는 즉시 성책을 2층으로 축조했고, 포구가 40개나 되는 화차와 수차석포 등을 장치해 놓았으며 병사들에게는 횟가루와 고춧가루 등을 넣은 주머니까지 허리에 차도록 지시하였다.
군사들은 이에 사기가 충천하여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활과 화살촉을 점검하였으며 창검의 날을 다시 세우고 화차와 총통, 석포와 석탄을 정비하는 등 빈틈없는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마침 왜군 제1대장 소서행장군이 맨먼저 조총을 쏘아대며 돌진하고 있었다. 그러자 산의 정상 즉, 지금의 대첩비가 세워진 자리에서 권율 장군이 공격 개시 신호를 하자 조선군의 함성이 행주 벌 아침 공기를 뒤흔들면서 화차, 진천뢰, 수차석포를 비롯한 포탄과 석탄 화살 등이 적진에 벼락을 치듯 날아가기 시작했다.
단 일격에 왜군과 그들의 말이 파도치듯 나가자빠지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임진년 4월, 첫번째로 상륙하여 상승의 깃발을 날리던 소서행장도 권율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소서행장이 무릎을 꿇게 되자 그 다음에는 석전삼성, 전야장강 등 역전의 장수들이 돌진해 왔으나 장강 역시 흉부에 관통상을 입고 물러서게 된다. 그다음에는 무퇴의 용장이라는 흑전장정이 제3대를 이끌고 진격해 왔다.
이들 왜병은 장대 위에 누대까지 만들어 그 위에 올라가 성 안으로 조총을 무섭게 퍼붓고 있었다. 그러자 조방장 조철이 화포로 이를 깨뜨리고 칼날을 꽂은 포를 쏘아대자 흑전장정은 차마 후퇴는 못하고 게걸음으로 옆으로 피하고 있었다.
이들은 약관 22세의 총대장이 4대를 이끌고 나온다. 인마가 넘어지면 밟고 진격하는 인해전술. 왜병들은 이미 외책을 넘어섰고, 부장이 내책으로 접근하자 이에 겁먹은 조선 병사들이 도망을 치고 있었다.
이를 본 권율이 크게 노하여 도망치는 자의 목을 베며 ‘후퇴하는 자는 이런 벌을 면치 못한다’고 외치자 전세는 다시 수습됐다. 그리고 아군의 포문이 적장을 향해 집중포화를 퍼붓자 마침내 일본 총수가 파편을 맞고 말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이어 함께 진격하던 왜군 5대장과 그때까지 계속 싸우고 있던 왜장도 총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네 명의 장수가 중상을 당하게 되자 제6대장 등이 지키고 있는 서북편 성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승병들이 준비한 횟가루와 고춧가루를 사정없이 날리자 왜병들은 눈을 뜨지 못하고 모두 도망쳐 버리게 되었다.
그러자 육순 노장인 소천천강경이 제7대를 이끌고 와서 노련한 작전을 펴 성의 승군진영을 뚫기 위해 왜병 전군이 총공세로 나왔다. 그리고 아군의 화살이 바닥이 난 것을 눈치챈 왜병들은 더욱 기세를 울리게 되었다.
이에 권율 혼자 독전하는 한편 아군이 사력을 다해 석포로 저항하고 있을 때 마침 경기수사 이빈이 배 2척에 화살 수십만 개를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 광경을 본 아군들은 탄성이 오르고 다시 화살이 비오듯 쏟아지자 막바지 공격을 퍼붓던 왜병들이 불가항력인 상태에서 당황하며 물러나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왜병들은 후퇴에 앞서 그들의 시체를 네 곳에 쌓아놓고 태워 그 냄새가 10리 밖까지 진동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전과는 왜군 사상자가 2만3천, 조총, 병마 등 주요 노획물도 727점이나 됐다.
* 대첩비문에 새겨진 한석봉의 글씨
행주산성에 올라가 본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는 일이겠지만 관망이 매우 좋다. 드넓은 행주 벌,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 물, 국회의사당과 63빌딩도 멀리 보인다. 동쪽 멀리로는 남산의 서울 타워도 또렷하게 보이고 남쪽으로는 김포공항, 동북쪽으로는 도봉산까지 뚜렷하게 보인다.
행주대첩비 바로 아래는 대첩을 거둔 지 10년 뒤인 1603년에 세운 대첩비가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행주 대첩비의 비문은 이항복이 지었으며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이항복도 그렇지만 만천하의 귀재라는 한석봉의 글씨는 안타깝게도 음각이 마모되어 식별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 삼국시대 때에도 전략의 요새
행주산성은 삼국시대에도 고구려 백제가 쟁탈전을 벌였던 전략 요충지였다, 그리고 6.25 한국동란 때에는 인천에 상륙한 맥아더 장군이 서울로 진격할 때 이곳 행주나루를 건너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행주산성은 이미 백제 시대 때 축성한 것으로 행주싸움 때에 보강해서 쌓았다는 토성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길이 50여 미터에 나지막하게 생긴 언덕, 비록 그것만 보일 뿐 그 어떤 곳에서도 그날의 전흔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토성 바로 아래 60도가 넘는 경사를 내려다보게 되면 이 골짜기 저 산마루에서 그날의 함성과 포성, 그리고 조총이 콩볶는 듯한 소리, 바위 구르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러오는 듯하다.
행주산성 정상에서 북쪽으로 50여 미터쯤 걸어가면 산비탈이 나온다. 그 산비탈에는 칡덩굴이 이리저리 뒤엉켜 자라고 있다.
이 칡덩굴은 행주대첩 당시 바위나 돌을 묶어서 운반하는 데 매우 유용하고 편리하게 사용되었다고 하며 그래서 지금도 칡덩굴을 소중하게 가꾸고 있다는 관리자의 설명을 듣게 된다.
* 행주치마의 유래
우리들은 지금도 행주치마라고 하면 권율 장군이 행주 싸움을 할 때 아낙네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라주었다고 유래된 것이라고 배웠으며 또한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행주치마의 유래에 대해 열심히 추적하고 분석해 본 역사 학자들이 있다. 사학자 신석호 박사와 국사편찬위원장 최영희 씨가 바로 그들이었다. 임진왜란에 관한 여러 가지 서적을 뒤적여 본 결과 행주대첩과 행주치마는 전혀 근거가 없는 무관한 이야기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임진왜란 당시 부녀자들 모두를 미리 강화도로 피란을 시켰으며 산성에는 호남지방에서 올라온 권율 장군 뿐, 여자라고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기록이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행주치마의 유래를 행주대첩에 관련지어 설명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다만 아녀자가 아닌 군사들이 마대자루를 허리에 동여매고 돌을 날랐다는 기록은 나와 있다고 하였다.
결국, 행주치마는 행주대첩과 관련된 것이 아닌 부엌에서 식기나 바닥을 닦을 때 요긴하게 쓰이는 행주에서 연유된 것인데 항간에서 잘못된 야담으로 전해진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필자는 이미 80년대에 이와 같은 사실을 신문기사를 보고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모 기관에서 ‘권율 장군’의 전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신문 기사에 실린 내용을 설명하며 행주치마에 관한 이야기는 빼고 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행주치마에 관한 유래는 이미 널리 알려지고 굳어진 역사이니 그대로 아녀자들이 돌을 날랐다고 써달라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필자는 권율 장군의 전기 쓰기를 거절한 적이 있다.
이런 사실 한 가지만 보아도 한번 정해진 역사나 유래는 아무리 고증을 거쳤다 해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 것이 역사이며 유래라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