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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Sep 21. 2022

추억의 ‘펜팔’( 2 )

[편지 내용만으로는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없었다]

라디오 방송으로 남성일기라는 제목의 편지가 소개되고 난 뒤부터 전국의 여성들로부터 펜팔 편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나고 기분좋은 행운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편지가 올 때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여성인가 하고 봉투를 개봉하기 전부터 공연히 가슴이 벌렁거리며 가슴이 벅차게 울렁거리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뜻밖의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요즘 말로는 흔히 대박이라고 했겠지만, 그때의 표현으로 ‘땡’을 잡은 것이 틀림없었다. 땡을 잡았다는 것은 뜻밖에 생긴 좋은 수나 우연히 걸려든 복을 속되게 표현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었다.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의 소개와 가족관계, 그리고 고운 마음을 담아 정성껏 자신의 소개를 자세히 써서 보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봉투 속에 멋드러진 포즈를 잡고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내오는 여성도 있었다.

     

또 심지어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진과 함께 호적등본까지 보내오는 여성도 있었다.      


그렇게 편지가 오기 시작하면서 라디오 방송에 사연이 나가면 전국에서 적게는 약 15통, 그리고 많게는 20통 안팎의 편지가 오곤 하였다.     


편지가 왔으니 그다음에는 답장을 보내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며 도리였다. 아니 도리이기 이전에 정성껏 써서 보낸 편지이기에 답장 역시 일일이 정성껏 써서 보내게 되었다.      

 

☘ 차츰 마음의 짐이 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할 일 없이 가만히 놀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 많은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쓸 시간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래서 답장을 한번 보내려면 어느 날 하루를 잡아 큰마음 먹고 한꺼번에 답장을 쓰기로 하였다.    

편지 답장을 쓰는 날이면 일단 편지 봉투를 방바닥에 쭉 늘어놓고 주소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편지 내용을 다시 읽고 그 내용에 따라 일일이 답장을 써서 넣곤 하였다.    

  

그런데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 가끔은 헷갈리기도 하여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린다 해도 여간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A라는 사람한테 보낼 편지가 B나 C에게 바뀌어서 보내게 되는 실수도 따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여러 통의 편지 답장을 쓰기 위해 신경을 쓰다 보니 아주 오래전에 방영된 빨간마후라라는 한국 영화가 문득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 영화의 스토리 중에 젊은 조종사 한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와 연인에게 동시에 편지와 선물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어머니와 연인의 편지와 선물을 실수로 바꾸어 보내게 되어 한바탕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일일이 신경을 써가면서 편지 답장을 모두 쓰고 나면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하였다. 기쁨과 설렘도 잠시 벌써부터 시간도 부족하고 힘이 딸려서 지칠 일이었다.     

 

편지 답장을 다 썼다고 해서 바로 부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체통이 시오리 나 떨어진 읍내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읍내 장에 가는지를 알아본 다음 인편으로 부탁하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는 직접 달려가서 가서 부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거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내가 쓴 편지 답장이 가기도 전에 왜 아직까지 답장을 안 보냈느냐고 독촉 편지가 오기도 하였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그 여성에게만 특별히 따로 먼저 보내기도 하였다.   

   

날이 갈수록 편지는 속속 자꾸만 쌓이고, 누구에게 먼저 편지 답장을 보내야 할지 늘 무거운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르게 된다. 즐거움과 기쁨의 나날만을 보낼 줄 알았던 일이 그때그때 답장을 보내주지 못한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벌써부터 마음의 짐이 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그런 나날을 보내는 동안 나중에는 그나마 편지 내용으로 보아 내 마음에 드는 서너 명과 편지를 주고받기로 마음먹었다. 서너 명을 뺀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여간 미안한 일이었으며 마치 큰 죄를 저지른  것처럼 나쁜 사람이 된 느낌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이 좀 편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끈질긴 여성들     


그러나 내가 답장 보내기를 포기했다고 하여 상대편에서도 선선히 물러나 주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상대방도 더 이상 보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왜 답장을 보내지 않느냐고 마치 협박처럼 독촉 편지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독촉 편지만 보낸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간혹 어떤 사람은 멀고 먼 타도에서 우리 마을까지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마다 마치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답장을 보내지 못한 변명을 하느라고 고역을 치르곤 하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배웅을 하기 위해 버스가 다니는 국도까지는 4키로 정도를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국도까지 같이 걸어가서 돌려보내곤 하면서도 마치 못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씁쓸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대화를 통해서, 그리고 상대방의 표정을 보면 어느 정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곧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몇몇 여성들은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든 없든 그런 건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끝까지 막무가내인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내 말 한마디에 곧 포기하고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는 여성들이 대부분이긴 하였지만…….      

  

그렇게 몇몇 여성들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리고 만나기도 하면서 1,2년이 지났다. 그런데 결과는 모두 나에게 실망만 안겨주고 말았다. 편지의 내용만을 읽고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이상형이라고 짐작하고 상상했던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편지 내용만 읽어 보면 그렇게 마음씨가 곱고 예쁠 수가 없었다. 바로 내가 원하던 그런 여성상들이었다. 그러나 운이 없었음인지 정작 만나보고 나면 내가 원하던 그런 여성상과는 하나같이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1,2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편지도 오지 않았다. 한동안은 펜팔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직장 생활에만 충실하게 되었다.   


두 번째 도전     


그렇게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던 중 다시 펜팔을 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총각 냄새가 물씬 풍기도록 다시 방송국에 보낼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다. 첫 번째 편지로 인해 그토록 힘든 고역을 치렀으면서도 이번에야말로 내 맘에 꼭 맞는 여성을 만나리라는 기대를 안고 다시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방송국으로 남성 일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글을 보낸 지 얼마 만에 운이 좋았음인지 다시 방송이 쉽게 나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며칠 뒤부터는 어김없이 펜팔이 또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처럼 나의 마음도 다시 들뜨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전국에서 약 15명 내지 20여 명의 여성들로부터 펜팔 편지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그동안 잔잔했던 가슴이 다시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많은 편지들 중에 이번에는 운이 좋았음인지 정말 내 마음에 맞는 좋은 여성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여성은 고향이 경기도 여주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편지에 명함 사진을 동봉해 왔는데 인상도 좋고 편안해 보이면서 왠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현재 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어린 남동생과 세 식구가 살고 있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더구나 언니가 하나 있었는데 언니 역시 펜팔을 이용하여 좋은 사람과 이미 결혼을 하여 잘 살고 있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어쩐지 인상도 그렇고 편지 내용을 봐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여성이어서 내가 직접 찾아가서라도 꼭 한 번 만나보고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여주행 버스에 오르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날, 난 마침내 직장에서 휴가를 내서 주소만 가지고 여주를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게 되었다. 물론 여성에게는 내가 찾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깜짝 놀라게 해보고 싶은 속셈이었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여 우리 집에서 여주까지의 거리는 몇백 리가 되는 먼 거리였다. 그리고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고 버스도 자주 다니지 않았다.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여주 읍내에 내리게 되었다. 여주 읍내에서 그 여성네 집인 가남면까지 가려면 다시 2키로가 넘는 길을 다니는 버스가 없어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주 읍내에서 서울까지 가는 막차가 몇 시에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약 한 시간 뒤에 막차가 있다고 하였다.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음이 조급했다. 그 여성이 사는 집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려면 이미 막차가 끊어지기 때문이었다.   

   

난 할 수 없이 읍내에 되돌아와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일찍 떠날 생각으로 미리 여관까지 봐두고 그 여성이 살고 있다는 집을 향해 물어물어보면서 조급한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뒤 마침내 그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 마을 낮은 언덕배기에 도착하여 마을을 내려다 보니 내가 살고 있는 고향 마을과 달리 초가집들이 드문드문 있는 전형적인 시골 동네였다.  

    

난 마침 그 언덕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불렀다. 그리고 얼마간의 용돈을 주고 그 여성 이름을 말했더니 당장 저 집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난 그 집에 가서 어떤 사람이 와서 잠깐 할 말이 있으니 잠깐 나와 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곧 신바람이 나서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한 여성이 나를 향해 부지런히 뛰어오고 있었다. 첫눈에 보기에도 사진으로 본 나와 펜팔을 주고 받던 바로 그 여성이었다. 그녀는 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게 되었느냐며 몹시 놀라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그녀를 만나보니 사진으로만 보았을 때보다 더 순진하고 마음씨가 온순하며 착해 보여 더욱 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잠깐 이야기나 나누다가 가려고 온 것이라고 했더니 그녀는 그러지 말고 우선 집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난 처음부터 집에 들어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며 예가 아니라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어머니도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며 극구 집으로 들어가기를 권하며 나의 팔까지 잡아당기며 끌고 있었다. 생판 처음 만나보는 이성의 집에 들어가다니 이런 무례하고 염치없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난 어느 새 나도 모르게 그녀가 끄는 대로 발걸음은 이미 그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서자 그녀의 어머니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보다 더 좋아하며 밝은 낯으로 그렇게 환대해 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치 대단한 손님이라도 되는 듯 그 집에서 그토록 분에 넘칠 정도로 융숭한 대접 받아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 * )                       

      

                - 다음 회에 다시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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