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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Oct 01. 2022

추억의 ‘펜팔’( 3 )

[염치도 체면도 모두 망각하고]

펜팔을 주고 받던 그 아가씨가 이끄는 대로 우선 활짝 열려 있는 그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앞마당에는 이미 그녀의 어머니까지 나와서 밝은 낯으로 나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게 맞이해 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보다도 어머니가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어머니 옆에는 중학교 3학년쯤 돼 보이는 그녀의 남동생도 엄마를 따라 덩달아 약간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따라 어색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몹시 마음이 편안했다.   

    

난 안내에 따라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집의 구조는 얼른 보기에도 대문 옆에 허술한 툇간이 하나 있었고, 안방과 건넌방, 그리고 안방에 딸린 부엌 하나가 전부였다.      


마루에 있는 기둥 위에는 베니어로 된 네모상자가 걸려 있었고 그 네모 상자에는 전선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첫눈에 보기에도 라디오를 듣기 위해 걸어놓은 스피커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원하는 집집마다 스피커 하나씩 달아주고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으며 한 달에 얼마씩 라디오 방송 청취 요금을 받아가는 사업이 성행하였다.


그 스피커 하나만 달아놓으면 하루 종일 아니, 날마다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스피커를 본 나는 문득 아아! 이 집은 그래도 우리 집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고향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뒷동산에 커다란 스피커 하나를 달아놓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 스피커를 통해 라디오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처녀는 그 스피커에서 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나와 펜팔을 하게 되었다는 것도 금세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다시 나를 안방으로 안내하더니 안방 한가운데에 있는 따뜻한 화롯불 가로 이끌었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어느 시골집이나 그때는 추운 겨울에는 화롯불을 의지하며 살았다.  

     

어머니의 안내에 따라 그 집 식구 세 명, 그리고 나를 포함해 모두 네 사람이 화롯가에 모여 앉아 불을 쬐게 되었다.


나는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용건을 간단히 설명한 다음, 초면에 너무 무례하게 방에까지 들어오게 되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고 손사래를 치면서 펄쩍 뛰고 있었다.  

난 이상하게도 금방 한 식구나 된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전에는 그런 무례한 짓을 한 적이 전혀 없었던 나였다.     


난 약간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그 집 벽에 걸린 액자를 무심코 바라보게 되었다. 커다란 액자 속에는 여러 가지 사진이 같이 들어 있었고 그중에는 신부와 신랑이 마주 서서 찍은 결혼식 사진도 함께 들어있었다.   

  

내가 한동안 액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 어머니가 다시  자랑스러운 듯 사진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 결혼사진에 있는 신부가 바로 내가 찾아간 그 아가씨의 언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니가 지금의 아가씨처럼 먼저 라디오를 통해 펜팔을 하던 끈에 바로 좋은 남자를 만나 약 2년 전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도 펜팔을 통해 얼른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을 갔으면 원이 없겠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남편을 일찍 여의고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3남매가 잘 자라는 것만 바라보며 큰 낙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도 덧붙여 설명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런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아가씨는 그저 수줍은 듯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주 조신하고 조용한 아가씨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말을 할 때 조금도 함부로 나서지 않고 수줍은 듯 착해 보이는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직접 그런 모습과 태도를 보니 내 마음에 더욱 쏙 들게 되었다.         

 

정작 내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주인공인 그 아가씨는 별로 말이 없었다. 입이 무거운 편인 것 같았다. 그 대신 엉뚱하게도 그의 어머니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다 보니 어쩌면 그 아가씨가 아닌 그 아가씨의 어머니를 만나러 간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멍멍탕, 그리고 나일론 뽕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가 이번에는 문득 생각이 난 듯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먼 길 오느라고 시장할 테니 우선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를 묻게 되었다.       


어머니의 물음에 난 펄쩍 뛰면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저녁은 읍내에 있는 음식점에 가서 사 먹고 그곳 여관에서 잠을 자고 내일 떠날 계획이라고 대답했다.   

   

난 다시 펄쩍 뛰면서 밥을 먹고 가면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안 된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덩달아 벌떡 일어서더니 내 팔을 꼭 잡고 보잘것없는 반찬이지만 저녁을 먹어야 한다며 말리고 있었다.

     

그때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는데  아가씨의 동생까지 덩달아 내 손을 잡고 매달리며 앉으라고 권하고 있었다. 난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러나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예의가 아니고 도리도 아니었다. 어떻게 난생처음 만난 아가씨네 집에서 해주는 밥을 넉살 좋게 앉아서 먹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한수 더 떠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기왕에 늦었으니 천천히 저녁이나 먹고 놀다가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에 환할 때 가라는 것이 아닌가!     


잠까지 자고 가라니? 난 또다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아무 대꾸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어머니가 다시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어서 말해 보라고 재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할 수 없이 장난삼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멍멍탕이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사실 평소에 내가 실제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멍멍탕이긴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그 집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멍멍탕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멍멍탕이란 이름 외에도 개장국, 영양탕, 보신탕, 사철탕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도 불리우곤 하였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 난 그때는 이 멍멍탕 음식을 몹시 즐기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약 40여 년 전에 어떤 계기로 인해 완전히 끊어 버리고 지금은 전혀 입에도 대지 않지만…….     


내가 멍멍탕을 좋아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난색을 표하고 있었다. 집에 없는 멍멍탕을 갑자기 어디서 구해오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아무 반찬이나 해줄 테니 오늘은 그냥 먹자고 하면서 급히 부엌으로 부리나케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 아가씨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서 부엌으로 나갔다.       


그래서 방에는 나와 아가씨의 동생만 둘이 앉아 있었다. 밥을 하는 동안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한참 뒤, 마침내 아가씨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도 물 주전자 등을 들고 뒤따라 들어오셨다.   

     

난 밥상 위에서 아직도 펄펄 끓고 있는 뚝배기를 보고 두 눈이 둥그렇게 된 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밥상 위에는 내가 먹고 싶다고 말한 먹음직스러운 멍멍탕이 푸짐하게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을 본 어머니가 다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멍멍탕은 큰딸의 남편 즉, 큰사위가 몹시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위가 오면 끓여주려고 미리 사다가 얼려놓았던 것인데 마침 내가 좋아한다고 하여 아껴주었던 것을 미리 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두 사람이 똑같이 멍멍탕을 좋아한다며 깔깔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 알고 보니 멍멍탕은 그 집 식구들모두가 다 좋아하고 있었다. 그 아가씨까지도…….      


갑자기 염치가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넉살이 좋아진 푼수가 된 것일까. 어쨌거나 난생처음 찾아간 그 집에서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멍멍탕으로 그 집 식구들과 같이 저녁을 배불리 먹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난 곧 늦었다며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읍내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더욱 실례가 될 것 같았고 체면도 말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늦은 밤에 어딜 가느냐고 식구들 모두가 자고 내일 가라고 붙잡고 난리였다. 그래서 못 이기는 척하고 다시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런 염치도 체면도 없는 일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가 또 이끌리듯 자리에 앉자 어머니가 이번에는 나에게 나일론 뽕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마침 조금은 할 줄 안다고 했더니 반색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저녁은 먹었으니 이제부터는 다 같이 나일론 뽕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고 하였다. 그리고 어디선지 화투를 꺼내더니 판을 벌여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집 식구들은 밤마다 틈만 나면 세 식구가 같이 나일론 뽕을 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였다.


난 그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진퇴양난이 되어 다시 우물쭈물하고만 있었다. ( * )

   


 -3회로 끝낼 계획이었으나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다음 회로 연장하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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