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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Dec 03. 2022

내가 어렸을 때는(5)

[전쟁통에 병정놀이와 학교 생활]

한번 일어난 6.25 한국 전쟁은 1년이고 2년이고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적군과 아군은 서로 밀고 밀리는 지루한 싸움을 벌써 몇 해째나 되풀이하는 동안 이제는 모두가 지치고 탈진해 있는 상태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 역시 그동안 몇 차례의 피란을 다니다가 이제는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어떤 때는 피란을 어느 정도 가다가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피란을 가다 보면 어느새 국군이 반격해 온다는 소식에 어디쯤 가다가 되돌아오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마을로 되돌아오다가 보면 다시 인민군이 반격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피란 보따리를 싸는 번거로운 일도 허다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금방 적군이 다시 쳐들어온다고 해도 피란을 가지 않고 마을에서 그대로 버티고 있기도 하였다.


 어차피 운이 나쁘면 피란을 가다가 개주검을 당하기도 하고 그냥 앉아있다가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차라리 그냥 마을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죽엄을 택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처럼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하자는 대로 피란을 가자고 하면 따라가야 했고, 어른들이 피란을 가지 않으면 그대로 마을에 남아 지낼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런 전쟁통이었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제법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틈이 나는 대로 마을에서 대장이 된 형들이 전쟁놀이를 하기 위해 소집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쟁놀이는 늘 마을 뒷산에 있는 잔디밭에서 이루어지곤 하였다. 거기서 대장이 된 형들의 명령에 따라 제법 엄한 군사훈련을 받곤 하였다.      


군사훈련은 으레 총 대신 잘 깎아진 막대기 총을 하나씩 어깨에 메거나 들고 받는 제식 훈련도 받았으며 목청껏 군가를 부르면서 마을의 남쪽 성황당 고개까지 행진을 하곤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구의 지시였는지는 몰라도 매일 이른 아침마다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여름에는 잡초를 뽑거나 산길을 깨끗이 쓸곤 하였다. 그리고 밤이 되면 가끔 아랫마을과 윗마을 아이들과의 치열한 전쟁놀이도 벌어지곤 하였다.     


전쟁놀이는 지금 가만히 생각해 봐도 매우

아찔하면서도 위험한 놀이였다. 전쟁놀이밤마다 마을 앞에 있는 논바닥을 포복 상태로 기어 다니며 벌어지곤 하였다.      

그때 주로 사용한 무기로는 빈 깡통 속에 박격포탄이나 M1 총알에서 뺀 화약, 그리고 수류탄 속에서 빼낸 화약을 잔뜩 넣은 다음 깡통 입구를 돌로 찌그려뜨려 불을 붙여 상대방에게 힘껏 던지곤 하였다.


당시에는 그만큼 군인들이 흘려버린 탄환들을 쉽게 구할 수가 있어서 아이들은 위험하지 탄환 속에 들어있는 화약을 빼내는 일도 익숙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단 화약에 불이 붙은 깡통을 적진에

 던지게 되면 깡통에 들어있던 화약이 무섭게 불을 뿜으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치 럭비공처럼 논바닥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곤 하여 사방을 환하게 바추기도 하였다. 화약이 다 탈 때까지 소리도 여간 요란한 것이 아니었다.   

   

불이 붙은 깡통은 무서운 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사방이 환해지는 바람에 적진을 환하게 비추곤 하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명 조명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뒤에서는 보급을 맡은 아이들이 계속 화약을 넣은 찌그러뜨린 깡통이나 돌멩이, 그리고 벽돌을 구해서 계속 보급하곤 하였다.   

    

불이 붙은 깡통만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통에 집이 탈 때 빨갛게 달구어져서 단단하게 굳어진 흙벽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머리에 제대로 맞으면 큰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면서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전쟁은 캄캄한 밤일수록 더욱 위험했다. 적진과 적진의 수효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깡통으로 만들어진 조명탄이나 벽돌을 던질 때는 주로 멀리 던지기를 잘하는 아이들이 담당하곤 하였는데 일명 적진을 최전방에서 살피는 수색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난 그때 몸은 약했지만 그나마 돌은 멀리 잘 던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나 역시 수색대로 뽑혀 활동을 하다가 적진에서 던진 벽돌에 눈이 맞기도 하였다. 그 덕분(?) 눈이 온통 퉁퉁히 부운 채 눈을 전혀 뜰 수가 없어서 3년 동안 몹시 고생을 하며 견디기도 하였다.    

  

나 말고도 마을 아이들 중에 가끔 다치는 아이들도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은 자식이 전쟁놀이를 하다가 그렇게 다쳐도 전혀 관여하지 않고 크게 나무라지도 않은 것 같다. 어느 가정이나 자식이 다쳤으면 다친 대로 그러려니 하고 낫기만 기다리곤 하였다. 아마 그때는 전쟁통이었기에 어른들 역시 그만큼 아이들한테 전쟁놀이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쟁놀이와 병정놀이, 그리고 마을 뒷산 청소를 하기도 하였지만, 어쩌다 가끔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부르면 시오리가 넘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학교에 가기도 하였다.     

 

◆  폐허가 된 학교      


그때 내가 다니던 학교는 온통 폭격을 맞아 모두 불타버리고 두 개의 교실만 동그마니 남아 있었다. 운동장 역시 포탄에 맞아 여기저기 크고 작은 웅덩이가 마치 분화구처럼 움폭움푹 흉하게 파여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교실이 없어서 선생님은 작은 칠판 하나를 학교 울타리에 아름드리로 크게 자란 플라타너스 나무 기둥에 못을 박고 걸어놓은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책상이나 걸상도 없이 아이들은 그 나무 아래 거적대기를 하나씩 깔고 앉아서 공부를 하곤 하였다.   

   

그땐 누구나 교과서도 없었으며 공책도 없었다. 그러기에 흔히 공책 대신 미군들이 먹고 버린 초콜릿 포장지를 인두로 잘 다려서 공책 대신 그 뒷장을 사용하거나 심지어는 껌 종이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종이가 그만큼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종이만 귀한 게 아니었다. 연필도 귀했다. 그래서 어쩌다 연필이 생기면 아까운 마음에 몹시 아껴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연필을 거의 다 쓰고 난 뒤에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끝까지 아껴 쓰곤 하였다.     

 

! ! ……!”     


교무실 앞에 매달아 놓고 치던 그 흔한 학교 종도 전쟁으로 인하여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기에 정해진 공부 시간이나 쉬는 시간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애들아! 공부 시간 됐대. 선생님이 모이래!”     


한 아이가 손나팔을 만들어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소리 지르면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그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하나둘씩 우르르 플라타너스 나무 밑으로 다시 모여들곤 하였다.     

  

한 아이의 목소리가 바로 공부 시간을 알리는 시업 종소리였으며 그렇다고 쉬는 시간도 따로 정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이제 그만 쉬었다 다시 공부하자고 하면 그게 쉬는 시간이고 공부 시간이었다. 그러기에 수업은 2,30분만에 끝나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이 넘기도 하였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여름철에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날이었다.      


한창 공부를 하다가 비가 쏟아지게 되면 공부를 하다 말고 모두가 도망을 치기에 바빴다. 도망을 치는 것은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근처 어느 집 처마 밑으로 피하기도 하고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예 집으로 달려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산은커녕 우비조차 없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교육과정 이수라든가 수업일수 등을 따질 필요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가끔은 선생님들은 마을을 순회하며 가르치기도 하였다.     

 

교실이 없어서 그랬는지 플라타너스 나무 밑의 수업이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가끔 선생님들은 예고도 없이 마을로 와서 가르칠 때도 있었다.   

   

선생님들이 우리 마을에 올 때는 으레 우리 마을 뒷동산이었다. 선생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 마을 아이들은 모두가 아랫동산으로 모이곤 하였다. 어느 한 학년만 모이는 게 아니었다. 마을에 있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아이들이 모두 모이곤 하였다.

선생님들이 마을로 와서 가르치는 것은 학과 공부가 아닌 주로 노래를 가르치곤 하였다. 그런데 똑같은 선생님이 오곤 했지만 그때마다 가르치는 노래가 달랐다. 가르치는 방법은 선생님이 노래의 1소절을 선창하면 아이들이 따라서 복창하는 방법으로 배우곤 하였다.    

 

국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는 주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여 잘 자라는 노래를 가르치곤 하였다. 그런데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주둔하고 있을 때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배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선생님인데 어째서 가르치는 노래는 때에 따라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아마 그것은 군정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들 역시 그때마다 위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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