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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Dec 06. 2022

내가 어렸을 때는(6)

[내 생애 최고의 공포스러웠던 선생님]

전쟁으로 인해 생사를 넘나드는 잦은 피란 생활, 그리고 학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이윽고 그 지겨운 전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전쟁이 완전히 끝나서가 아니라 휴전이란 이름으로 잠시 전쟁을 멈추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953년 7월 27, 학교를 제대로 다녔다면 나는 어느덧 5학년 2학기가 되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6.25 전쟁은 정확히 3년 2개월 2에 온 나라가 온통 초토화되고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야 휴전이란 이름으로 일단 숨을 돌리게 된 것이다.    

    

아마 1953년 9월쯤으로 기억한다. 휴전이 되자 학교도 다시 정식으로 개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이 편안히 앉아서 배울 교실도 책상도, 교과서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개학을 하게 된 것이다.     

 

난 2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껑충 뛰어서 5학년 2학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정확히 3년 2개월간 학교를 다니지 못한 공백 상태에서 5학년 2학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학년이었던 다른 친구들 중에는 그대로 2학년 2학기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보다 3년이나 선배인 학생들도 나와 한 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같은 학년이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해 나이 차이가 많이 나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이미 4학년때 결혼을 한 남학생도 나와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였고, 여학생 한 명은 이미 약혼을 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 10살 가까이 많은 학생도 나와 같은 반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 모두가 전쟁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개학을 하긴 했지만, 막상 학교에 간다 해도 교실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여전히 운동장 바닥에서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떤 선생님은 동네 창고나 큼직한 사랑방을 빌려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난 너무 약골이어서 1,2학년 때는 부모님의 등에 업혀 다녔지만, 5학년 때는 그나마 스스로 걸어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난 학교라는 곳이 두렵고 싫었다. 워낙 약골이어서 여전히 툭하면 아이들한테 매를 맞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5학년 말기가 되자 나에게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6학년으로 올라가게 되면 다른 학교에서 새로 전근을 오실 선생님이 우리반 선생님이 된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바로 우리 마을과 가까운 옆 동네에 사는 분이었는데 우리 반 담임이 된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 선생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 소문을 들은 난 나대로 엉뚱한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잔꾀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 전학을 오게 된 선생님은 나의 친척 아저씨뻘이 된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고 덜 괴롭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멋도 모르는 아이들은 내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 새로 부임하신 담임 선생님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덧 학년을 마치고 6학년으로 올라가게 되자 마침내 소문대로 새로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우리 반 교실도 새로 생겼다. 교실이라고 해봤자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군용 천막을 운동장 한구석에 세워놓고 그 천막 안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바람을 바로 맞지 않고 공부를 하게 된 것만 해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아늑하면서도 그런 천국이 따로 없었다.  

   

천막 교실 바닥에는 가마니로 짠 거적때기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탄알 궤짝을 드문드문 세워놓은 그 위에 길다란 널빤지를 얹어 놓고 앉아서 책상 대신 사용하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천막 앞쪽에는 칠판도 있었고 청소용 싸리 빗자루와 수수 빗자루도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친구들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가 두려웠던 나였다. 그런데  6학년이 되기가 무섭게 학교는 가고 싶은 곳이 아닌 그야말로 더욱더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지옥 같은 곳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 모두가 새로 온 담임 선생님 때문이었다.   

   

아웃 마을에 사는 선생님, 더구나 내가 꾸며낸 거짓말이기는 하였지만, 선생님이 나의 아저씨뻘이어서 아이들이 나를 괴롭힐 때마다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선생님은 그게 아니었다. 그건 나 혼자만의 믿음이요, 커다란 착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지금까지 친구들의 괴롭힘만 받을 때가 훨씬, 아니 백번 더 나았다. 그처럼 선생님이 나에게 가하는 폭행과 폭언이 너무나 무자비하고 두려운 악마로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학교를 제2의 가정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만큼 학교란 아이들이 즐거워하며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곳, 그리고 항상 학생을 사랑하는 인자한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어서 마치 가정보다 더 아늑한 보금자리이어야 한다는 뜻이리라.       


◆ 꿈속에서도 두렵고 공포스러운 선생님     


마침내 6학년 수업 첫날, 선생님은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보더니 처음부터 자리를 바꿔주었다. 난 그때 세 번째 줄에 앉아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맨 앞줄로 바꾸어 앉으라고 한 것이다.      


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이 나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맨 앞줄에 앉혔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맨 앞줄로 자리를 바꾸어 앉으면서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뒤를 훑어보며 그거 보라는 듯이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 보이기도 하였다. 마치 선생님이 먼 친척 아저씨뻘이기에 나를 특별히 자리까지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듯이…….     


뜻밖의 첫 번째 봉변     


내 자리를 바꾸어 준 선생님은 간단히 자신의 소개를 마친 뒤 바로 수업으로 들어갔다. 아마 사회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손에 교과서를 들고 연신 읽어대며 가끔 곁들여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교과서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선생님의 얼굴만 바라보며 듣고만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런 선생님이 너무나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마음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저 선생님의 얼굴만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이었다.    

 

1919년 3월 1일 무슨 일이 일어났지?!”     


“……?!”     


교과서를 읽으면서 설명을 하고 있던 선생님이 갑자기 이렇게 소리치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느닷없이 1919년 3월 1일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나에게 묻고 있었던 것이다. 뜻밖의 질문을 받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침을 한번 꼴깍 삼킨 뒤에도 무슨 영문을 몰라 아무 대답도 못한 채 선생님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러자 바로 그 다음 순간이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껑충 내 책상(널빤지) 위로 올라서더니 내 머리통을 장화를 신은 발로 무자비하게 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 번도 아닌 서너 차례나…….     

그날은 마침 이른 봄철이서서 비가 와서 땅바닥이 많이 질었었나 보다. 그래서 선생님은 장화를 신은 채로 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흙이 잔뜩 묻은 장화발로 내 머리통을 힘껏 짓밟았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화 발로 더구나 흙투성이가 된 발로 머리통을 맞아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머리통이 아프긴 했지만 너무나 공포에 질린 나는 울음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발길로 얻어맞은 머리통보다 더 아픈 것은 마음이었다. 너무나 창피하고 굴욕적이며 수치스럽기도 하고 무안한 마음에 도무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수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흙발로 무섭게 짓밟히는 꼴을 본 다른 친구들 모두들 역시  바짝 긴장한 표정이 되어 숨을 죽인 채 선생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무서운 존재로 보인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교실 안은 마치 물을 끼얹은 듯 무거운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조금 뒤 선생님은 다시 나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지 분명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무튼 무언가를 다시 묻고 있었다.     

 

……?!”     


또 한번의 불의의 습격을 당한 나는 또다시 잔뜩 겁에 질린 채 선생님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앞쪽에 세워두었던 싸리빗자루 하나를 거꾸로 들고 오더니 또다시 나의 머리통을 마구 때리는 것이 아닌가.     

난 다시 그대로 당할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이렇게 선생님이 두렵고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될 줄이야   

  

그런데 내가 더욱 억울하면서도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선생님의 태도였다. 가끔은 다른 친구들한테도 질문을 하곤 했는데 그때 선생님의 태도는 백팔십 도로 달랐다.


만일 다른 아이들이 대답을 못하거나 틀렸다 해도 나한테 하던 것처럼 무섭게 때리거나 야단을 치지도 않았다. 때리거나 야단을 치기는커녕 그때마다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답을 알려주거나 그냥 지나가곤 하는 아주 부드럽고 인자한 선생님으로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러는 것일까? 정말 나를 특별히 사랑해서였을까?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님이 매일 나만 때리고 나만 야단을 치는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 이어지게 되자 친구들은 전보다 한층 더 나를 우습게 여기고 괴롭히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나는 학교라는 곳이 더욱 고통스럽고 두려운 곳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웃 마을에 사는 선생님이 새로 우리 반 선생님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내가 은근히 기대하고 바랐던 나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차라리 그 선생님이 우리 반을 맡지 않았던 것만도 훨씬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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