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꿀이 죽

-제7화-

by 겨울나무

밀고 밀리는 치열했던 한국 전쟁이 일단 휴전이란 이름으로 막을 내리게 된 전후의 일로 기억하고 있다. 아마 그때 난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쯤 된 어린 나이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당시 전쟁으로 인해 집이란 집들은 모두 불타버렸음은 물론 잠을 잘 보금자리까지 잃어버렸기에 잠을 편히 잘 잠자리마저 마땅치 않아 임시로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은 가혹하게도 추운 겨울에 입을 옷은 물론이고 먹을 양식마저 모두 앗아가 버리는 불행을 낳고 말았다.

그런 참담한 현실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우 말 그대로 목구멍에 풀칠만 하기에도 바빴다. 그리고 그날그날 죽지 않고 연명하고 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기며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힘겨운 고행의 나날이 기약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헐벗고 굶주린 탓에 겨울철에는 더욱 춥고 모질며 혹독하기만 하였다. 날씨는 왜 그렇게 모질게 춥고 눈은 또 왜 그렇게 많이 내리고 있었던지……!

먹을 것이 궁하던 시절이어서 그땐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동냥을 하는 걸인들이 많았다. 특히 겨울철에는 동냥을 하러 다니다가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못해 가끔 길바닥에 쓰러져 얼어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비극적인 참변은 걸인들뿐만이 아니었다. 헐벗고 굶주린 추운 날씨에는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모두가 전쟁이 할퀴고 간 비극의 결과요,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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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 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부대찌개’란 음식이 우후죽순처럼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면서 한때는 이 부대찌개가 많은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쌀쌀한 겨울 날씨에 갖은 양념과 솜씨를 다해 먹음직스럽게 만든 부대찌개는 얼큰하면서도 특히 추운 날씨에 술안주로는 그만이다. 그리고 부대찌개는 대부분 ‘의정부 부대찌개’란 간판을 내걸고 서로 자기네 음식점이 원조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토록 의정부 부대찌개란 명칭을 영업주들이 선호하게 된 것은 아마 짐작컨대 그 당시 의정부와 동두천에 미군 부대가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해 보게 된다.

난 오래전에 부대찌개란 과연 어떤 음식일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부대찌개를 잘한다는 집에 가서 한번 맛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부대찌개를 보자마자 나는 6.25 전쟁 때를 다시 떠올리며 바로 짐작하게 되었다.

소시지 등을 넣어 먹음직스럽게 솜씨를 다해 정성껏 요리한 그 부대찌개, 그것은 바로 한국 전쟁 직후에 부대의 짬밥 통에서 퍼다가 집에서 끓여 먹던 바로 그 꿀꿀이죽과 요리 방법이 너무나 영락없이 흡사하다는 것을…….

난 그 뒤부터 그런 선입견으로 인해 절대로 부대찌개를 일부러 먹으러 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어서 미군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였지만 감지덕지하고 먹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부대찌개는 엄연히 깨끗한 재료를 써서 위생적으로 요리한 것이어서 그때의 꿀꿀이죽과 지금의 부대찌개는 엄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이 글을 읽으면서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꿀꿀이 죽을 먹을 수가 있겠느냐며 너무 더럽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며 구역질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배고픔과 굶주림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동란이 끝난 휴전 직후, 우리 마을 사람들은 틈이 나는 대로 수시로 앞을 다투어 달려가곤 하는 곳이 있었다.

그건 어른이나 아이들을 가리지 않았다. 틈만 나면 수시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양동이나 그 밖의 찌그러든 들통을 한 개, 또는 두 개씩 들고 그곳을 가기 위해 자주 길을 나서곤 하였다. 그들 모두가 다름아닌 꿀꿀이죽을 구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꿀꿀이죽을 구하러 가기 위해서는 우리 마을에서 약 4키로 이상 작은 산을 몇 개 넘어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면 제법 큰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 부대는 어느 작은 마을 낮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미군 부대 철조망 밖에는 시멘트로 둥글게 원통 모양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쓰레기통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것은 미군들이 먹다 버린 갖가지 음식 찌꺼기 즉, 짬밥을 버리기 위한 통이었던 것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갈 때마다 욕심껏 그 짬밥을 양동이 가득 퍼담고 나면 4키로나 넘는 먼 길을 무거운 줄도 모르고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되돌아오곤 하였다. 그곳에 가면 우리 마을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을 사람들도 수시로 오곤 하였다.

먹을 양식이 몹시 궁했던 시절, 그 짬밥 통은 정말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마치 목숨을 이어줄 생명줄처럼, 그리고 구세주처럼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역할을 톡톡히 기여했던 게 사실이다.

정말 그랬었다. 사람들은 그때 미군 부대 짬밥 통에서 퍼온 미군인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들을 일명 ‘꿀꿀이죽’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돼지에게 먹일 죽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말만 돼지에게 먹이기 위한 꿀꿀이 죽이지 일단 사람들이 먹을만한 것은 모두 다 골라 먹은 다음 그 나머지만 돼지의 몫이 되곤 하였다.

4키로가 넘는 먼 길을 무겁게 들고 온 짬밥은 우선 큰 그릇에 쏟아놓고 종류별로 분류하게 된다. 그 속에는 먹다 남은 갖가지 건더기 즉, 소시지, 빈 깡통, 잼, 껌, 과자, 식빵, 햄……등 이름도 모를 별의별 외국 음식 찌꺼기들이 모두 다 그 속에 함께 섞여 있었다.

심지어는 빈 캔, 담배꽁초, 씹다 버린 껌 등,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럽거나 지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건더기가 많은 것만 해도 고맙고 황송하게 생각하며 벌써부터 먹고 싶은 마음에 누구나 입에 군침이 도는 바람에 입맛이 쩍쩍 다셔지기도 하였다.

정성껏 골라낸 소시지 햄 등의 건더기들은 바로 물에 헹구어 씻어낸 다음 바로 냄비에 넣고 약간의 양념을 넣어 끓여서 식구들이 다 같이 나누어 먹곤 하였는데 그 맛이 그렇게 일품일 수가 없었다. 그때의 그 기가 막혔던 꿀꿀이죽 의 맛을 지금까지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요즈음 음식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른바 ‘부대찌개’ 꿀꿀이 죽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딱 한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일까!

그 첫 번째가 바로 배고픈 서러움이라고 하였다. 그건 실제로 며칠씩 굶다가 너무나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소리내어 울어본 적이 있는 뼈저린 경험을 체험해 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가난한 생활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오던 우리 민족,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한국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온통 비행기 폭격으로 파괴되고 잿더미가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로 인해 또한 양식마저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누구나 눈만 뜨면 오직 먹을 걱정만을 하며 나날을 보내는 고통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 역시 피란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오긴 하였지만, 너나 할 것 없이 굶기를 밥먹듯 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목숨만 겨우 연명한 채 가엾고 슬픈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배가 너무 고프다 보니 눈에 띄는 웬만한 것은 다 먹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산에서 캐낸 칡뿌리는 고급 양식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늦가을이나 이른 봄까지는 삽과 곡괭이를 들고 산으로 가서 칡뿌리를 캐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봄이 되면 산과 들로 쏘다니며 산나물이나 들나물을 캐서 양식 대신 끊여먹거나 무쳐 먹곤 하는 일이 일과 중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먹거리를 찾기 위해 쏘다니며 나무나 풀의 열매, 그리고 연한 풀이나 나뭇잎 등, 닥치는 대로 날로 먹어치우며 허기를 달래곤 하였다. 그러다가 그것들이 하도 냄새가 고약하고 지독하거나 구역질이 날 정도로 먹기가 어려우면 도로 뱉아버리기가 일쑤였다.

봄이면 이제 막 새로 물이 오른 소나무 껍질을 벗겨 씹어먹을 수 있는 이른바 송기는 가장 인기 있는 좋은 먹거리가 되었다. 송화나 솔방울의 씨도 역시 훌륭한 간식거리 중의 하나였다.

어디 그뿐이랴.

잠자리나 매미, 그리고 개구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을 잡은 다음 껍질을 벗겨 구워 먹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먹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여름에 비가 온 뒤에는 사람들 모두가 산으로 돌아다니며 버섯을 따는 일에 혈안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여름과 가을에는 먹을거리들이 많은 철이었다.

수수와 보리깜부기, 목화송이 따먹기, 삘기, 찔레 등 먹을거리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문득 생각이 난 김에 몹시 지저분하고 혐오스러운 추억 한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넘어갈까 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미군 부대 짬밥 통 속에서 꿀꿀이죽을 퍼다 먹던 것보다 어쩌면 더 지저분하고 혐오스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배가 너무 고프면 체면이고 뭐고 없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시절, 시골의 우리 고향 마을은 약 5,60호나 되는 집들이 모여 한데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끼니때마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어느 집이나 반드시 아궁이에 불을 때야 가능했다. 밥을 지을 때는 그때마다 어김없이 굴뚝에서는 연기가 펑펑 피어오르곤 하였다. 굴뚝에서 연기가 많이 나오게 된 것은 대부분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를 베어다 땠기 때문이었다.

“아아, 저 집은 양식이 있어서 오늘도 저녁밥을 짓는 모양이군!.”

가끔 마을 사람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집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곤 하였다. 끼니때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만 보고도 어느 집은 양식이 떨어져서 굶고 있고, 어느 집은 양식이 아직 남아서 밥을 짓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만 보고도 몹시 부러워하곤 하였다.


그러기에 양식은 이미 바닥이 나서 비록 밥을 지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왠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끼니때마다 아궁이에 애꿎은 군불이라도 지펴서 굴뚝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집들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체면을 중시하며 살아온 민족이었다. 그러기에 그 어려운 시절에도 잘 먹은 척하기 위해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날지언정 잇몸을 쑤시고 다녔다는 옛날 양반들의 모습을 따라서 흉내를 내게 된 것이리라.

그런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곧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마을 공동 우물가에는 아낙네들 몇 명이 나와 빨래도 하고 요강을 깨끗이 부시는 일도 하고, 그나마 양식이 좀 있는 사람들은 보리쌀이랑 호밀도 씻고 있었다.

그때 웬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우물가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개가 길가에 있는 풀을 연신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개는 그나마 여유가 좀 있는 집에서 기르고 있는 개였다.

그리고 조금 뒤, 풀을 계속해서 뜯어 먹고 있던 개가 갑자기 먹었던 풀을 심하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개는 토하는 일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한동안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주머니 한 사람이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한 마음에 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게 되었다.

아아, 그런데 이런 뜻밖의 횡재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개가 풀을 뜯어 먹고 있다가 풀숲에 토해낸 것은 금방 뜯어먹은 풀잎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통보리 쌀이었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반가운 마음에 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리고는 곧 풀숲에 개가 토해버린 그 아까운 보리쌀을 정성껏, 그리고 알뜰하게 손으로 일일이 주워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개가 토한 그 보리쌀을 알뜰히 주운 아주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집을 향해 달려갔다. 그다음 아주머니는 그 보리쌀을 물로 말끔히 그리고 깨끗하게 잘 씻어낸 다음 물을 넉넉히 퍼넣은 솥에 그 보리쌀을 넣고 멀겋게 보리죽을 끓이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낟알이 들어간 죽이었던 것이다.

그 뒤, 마을에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게 되었다. 개가 토해낸 보리쌀을 주워 간 아주머니네 집에는 마침 며칠이나 굶은 가족들이 기운이 떨어져 모두 방에 축 늘어져 누워 있었 상태였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그날 마침 멀겋게 쑨 보리죽을 한 그릇씩 퍼서 가족들에게 먹였더니 가족들이 그나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이 한 가지 예만 들어보아도 그 당시의 가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고 여겨질는지도 모를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만큼 배가 고팠던 시절에 벌어졌던 일을 조금도 보탬이 없이 그대로 글로 옮긴 실화였음을 솔직히 밝혀두고 싶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