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쫓던 개

[꽁트]

by 겨울나무

정길은 회사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회사를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도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도 계단이나 바닥에는 오늘도 빈 상자갑 한 장만 깔아 놓고 그 위에 누워 잠을 자거나 종일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이른바 노숙자들이었다.


정길은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띄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이젠 전처럼 그런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지도 않았으며 아무 관심도 없었다.


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오죽하면 저럴 수밖에 없으랴 싶은 측은한 마음에 성의껏 돕곤 하였던 정길이었다. 너무나 안 됐다는 생각에 적은 돈이나마 가끔은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곤 하던 정길이었다.


그러나 몇 달 전에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저 많은 사람들 중에도 몇 달 전에 정길을 감쪽같이 속였던 그런 사람들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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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서너 달이 훨씬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날도 정길은 퇴근을 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막 지하철 계단을 부지런히 걸어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대략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우물쭈물하면서 정길의 앞을 슬며시 가로막고 애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어쩌다 지갑을 잃어버려서 시골에 내려갈 차비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꼭 한 번만 도와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 주신댜면 그 돈은 계좌번호만 알려주시면 시골에 내려가는 대로 바로 입금해 드리겠어요, 네에?”


“……!”


그는 잔뜩 울상이 된 표정으로 정길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얼른 보기에도 그만하면 반반하면서도 세련된 차림이었다. 그리고 첫눈에 보기에도 꽤나 아름답고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정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끌리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여인이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히야! 이렇게 멋진 아가씨가 어쩌다가……!’


정길은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이런 미인이 자존심까지 송두리째 내버린 채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하는 생각에 황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차비뿐 아니었다. 그 이상의 어떤 부탁이라 해도 힘이 자라는 데까지 들어 주고 싶다는 충동이 불끈 솟아오르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런 아가씨와 잘 사귀면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김치국부터 미리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정길은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를 향해 되묻게 되었다.


"시, 시골이라면……?"


"천안입니다. 기차를 타고 거기 가서도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한참 더 들어가야 되는 곳이거든요.”


여자는 마치 큰 죄인이나 된 듯 이렇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축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측은하고 가엾어 보이는지 생각 같아서는 꼭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더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정길은 저도 모르게 급히 안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5만 원권 지폐 한 장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5만 원 권 한 장을 더 꺼내서 내밀었다. 그동안 아끼고 아껴가면서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금쪽 같은 비상금이었지만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자 순간 여자의 표정이 활짝 밝아졌다. 그리고는 이제야 살았다는 듯 펄쩍 뛰며 지폐 한 장을 도로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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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닙니다. 5만 원이면 그런대로 넉넉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도로 받으세요.”


”아, 아닙니다. 어차피 도로 돌려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넣어두세요.“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아무튼 잘 쓰겠습니다. 그리고 입금할 계좌번호나 좀 알려주시겠어요?“


여자는 곧 휴대폰을 꺼내더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정길은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 아무 걱정말라고 사양을 하였다.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교양이 있고 세련된 미인이어서 아마도 더욱 정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었으리라.


그러나 여자가 계속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알려주게 되었다.


여자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몇 번이고 머리를 숙여 가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솔직히 정길은 이렇게 마음에 쏠리는 여자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어디 가서 차라도 한 잔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갈 길이 워낙 멀다는 걸 알기에 별수 없이 아쉬운 작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길은 여자의 뒷모습이 인파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일 줄을 모르고 그 여자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자 그제야 흐뭇한 표정으로 비로소 전철역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정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 소리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더구나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도와주었다는 것이 그만큼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전철에 몸을 실은 정길이 약 2,30여 분이 지난 뒤에야 집에서 가까운 청량리역에서 내리게 되었다. 전철에서 내린 그가 막 지하도를 빠져나오고 있을 때였다.


"어이! 정길이 아닌가?"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정길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얼른 뒤를 돌아보니 그 역시 청량리 부근에 살고 있는 친구였다. 정길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어이구, 이거 영철이 아닌가?"


”우리 오랜만인데 식사나 같이 할까?“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그거 좋고말고.“


두 사람은 반가운 마음에 서로 손을 힘껏 잡고 흔들다가 우선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음식과 소주도 같이 주문을 했다. 음식점 안을 둘러보니 제법 손님들이 많은 편이었다.


두 사람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살고 있지만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오늘 만나게 되었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반가움에 저녁 식사에 반주까지 곁들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꽃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였다.


언뜻 음식점 출입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정길은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니 누굴 어딜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거야?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아, 아니야. 아니 분명히 천안을 간다더니……?“


“아니 천안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정길은 찔끔해서 어색한 표정으로 얼버무리고 말았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 막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선 여자, 그는 몇 번을 다시 자세히 보아도 조금 전에 차비가 떨어졌다고 울먹이던 그 여자임에 틀림없었다.


"아니, 술은 마시지 않고 누굴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거야? 혹시 아는 사람인가?"


갑자기 이상하게 변한 정길의 표정을 보자, 친구는 음식점으로 들어서고 있는 그 여자와 정길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아, 아니라니까. 아, 아무래도 내가 잘못 본 게 틀림없어."


정길은 친구의 재촉에 흠칫 놀라 이렇게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흘글흘금 그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선 여자는 일단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구석진 자리에 앉아 손을 번쩍 들어 보이고 있는 어느 여자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한번 까딱해 보이고는 곧바로 그곳을 향해 급히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또래의 여자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직 정길이와 시선은 마주치지 않은 것 같았다.


여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의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신바람이 나서, 그러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신바람이 난 듯 자랑스럽게 지껄이고 있었다.


“야! 나 조금 전에 대박난 거 너 모르지?”


“대박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여자는 주변 사람들을 의식했는지 사방을 한번 두리번거리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한쪽 손을 펴서 입에 대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속삭이듯 귓속말로 소곤거리고 있었다.


“글세. 아까 지하철역에서 순진하면서도 머저리 같은 남자 하나를 만났거든."


"그래서? 뜸만 들이지 말고 어서 결론부터 말해 보라니까.”


"알았어. 그 머저리가 말이지. 내가 잔뜩 울상을 하고 연기를 하니까 글쎄 오만 원짜리 지페를 두 장이나 선뜻 내놓지 않겠니?"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핸드백 속에서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서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있었다.


“어머 그래? 너 엊저녁에 좋은 꿈을 꾼 모양이다.”


두 여자가 주고 받는 말을 거기까지 들은 정길은 자존심이 상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두 여자가 주고 받는 말로 보아 그들은 사기꾼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말해서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반반한 얼굴을 밑천삼아 할 일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돈이나 뜯는 미인계 사기꾼이 틀림없었다.


'으이구, 저걸 그냥…….‘


거기까지 이야기를 엿들은 정길은 갑자기 속에서 불덩이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조금 전에 머저리 같은 남자를 만났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정길은 지금 친구가 옆에서 계속 뭐라고 지껄이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건성으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척하며 정작 귀는 여자 쪽으로만 쏠리고 있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 너 오늘 횡재했구나! 그럼 웬만하면 더 뜯어내지 못하고?"


"야, 이 맹꽁아, 꼬리가 길면 잡한다고 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더 주겠다는 걸 뿌리치고 이리로 곧장 달려온 거란 말이야. 그 머저리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은 불쌍하고 안 됐더라. 호호호…….”


생각 같아서는 당장 쫓아가서 머리채라도 움켜잡고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단단히 창피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따라 선뜻 그럴만한 용기도 나지 않았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닳고 닳아빠진 여자들에게 오히려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두 여자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점을 빠져나가면서 다시 떠들어대고 있었다.


"자, 그럼 오늘은 다른 데로 가서 확실하게 쏠 모양이니까 넌 그저 따라오기만 하란 말이야."


"알았어. 더럽게 잘난 체 하고 있네."


정길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힘껏 깨물었다.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졸지에 닭 쫓던 개 꼴이 만 것이다.


"으이구, 저것들을 그냥……."

정길의 이상야릇한 표정과 행동이 이어지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아, 이 사람아 왜 그래? 갑자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 아니야. 아니라니까 자꾸만 그러네."


정길은 어색하게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날, 정길은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헤어졌는지조차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여자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쳇! 사람 하나 병신 되는 거 시간 문제라니까. 새파랗게 젊은 것들이 그래 해 처먹을 일이 없어서 그런 더러운 짓을 하고 다녀? 에이구, 더러워서 퉤엣!"


정길은 그 뒤부터 그 여자 생각만 하면 공연히 욕설이 나오고 죽이고 싶도록 울분이 치밀어 오르기도 하였다.





"아, 아저씨, 죄송합니다만……, 갑자기 지갑을 잃어버려서 그러는데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


갑자기 웬 젊은 여인 하나가 정길의 옆으로 바짝 다가서며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여자는 정길이보다 조금 앞에서 사방을 흘금흘금 두리번거리며 걸어가고 있던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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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은 멈칫 놀란 표정이 되어 걸음을 멈추며 반사적으로 여인의 위아래를 훑어보게 되었다. 몇 달 전에 만났던 그 여자 또래였다. 옷차림이나 생김새 역시 대략 서른 안팎의 비교적 세련된 미인이었다. 그런 여자가 지금 잔뜩 우거지상이 되어 정길을 향해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정길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옳지! 너 정말 오늘 임자 만났다!‘


정길은 그동안 이런 기회가 오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하며 벼르고 별러 왔던가! 그토록 오랫동안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려 온 기회가 드디어 저절로 굴러들어온 것이다.


'오냐, 너 오늘 잘 걸렸다. 한 번만 속지 두 번까지 속을 병신이 어디 있는 줄 알았더냐!’


정길은 잔뜩 울상이 된 채 버티고 서 있는 여자의 아래위를 한 번 훑어보고 나서 태도로 여인을 향해 되묻게 되었다.


"허어, 그거 안 됐군요. 그런데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신지요?"


그러자 여자는 조금 안심이 된 듯 밝아진 표정으로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집이 좀 멀어요. 대전이 집인데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왔다가 그만……."

”아아, 그러시군요.“


정길은 집이 대전이라는 말에 순간 가슴 속이 갑자기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유 있는 태도로 알겠다는 듯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옳지. 잘들 논다. 잘 놀아. 흥, 그땐 천안이라더니 이번에는 대전이라. 충청도라고 대답하기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지? 흥, 돈을 좀 더 뜯어내려면 부산이나 제주도는 어때서?‘


정길은 제대로 걸렸다는 듯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여자를 향해 조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아아, 그럼 대전까지 가시려면 기차보다는 고속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이 전혀 없어서…….”


여자는 매우 쑥스럽고 창피한 듯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요런 앙큼한 것 같으니라구. 너 오늘 나한테 딱 걸렸다!'

정길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아가씨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허어, 사정이 매우 딱하게 되셨네요. 그럼 제가 고속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거기 가서 버스표까지 제가 끊어 드리는 게 어떨까요?”


정길의 물음에 당연히 펄쩍 뛰면서 돈이나 달라고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또 어떻게 된 영문이란 말인가. 그러자 갑자기 여자가 반색을 하면서 활짝 밝아진 표정으로 정길의 말대로 순순히 따르겠다는 것이 아닌가. 정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바쁘실 텐데 그렇게 해주시겠어요? 이거 죄송하고 황송해서 어쩌죠? 제가 마침 서울 지리에 좀 약한 편이어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습니다만…….”


’허걱. 이 일을 어쩐다……!!‘


정길은 갑자기 뒤통수라도 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떨떨해지면서 금세 벌레 씹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희망은 있었다.


’흥, 어디 네가 얼마나 끈질긴가 두고 보자. 제까짓 게 터미널에 도착하면 바로 본색이 드러나고 말겠지!'

두 사람은 별 도리없이 전철을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내리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정길은 창구로 가서 대전으로 가는 버스표를 사게 되었다.

그러나 정길이 버스표를 건네주자 여자는 계속 고마워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고속버스에 오르면서도 활짝 웃는 낯으로 정길을 향해 몇 번이고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정길은 그저 얼떨떨하면서도 멍청해진 표정이 되어 여자를 향해 건성으로 마주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시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혹시 이거 내가 귀신한테 홀린 거 아니야?'

잠시 뒤에 고속버스가 서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여자가 다시 밝은 표정으로 정길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길이 역시 버스가 멀리 사라질때까지 그 자리에 선 채 건성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마치 벌레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진 정길의 표정, 그것은 흡사 닭 쫓던 개의 모습과 크게 다를 다를 바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