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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Mar 01. 2023

그놈의 돈가스 때문에

[영어를 몰라 손해를 보았던 수치스러운 일]

지금도 그때의 일이 가끔 생생하게 떠오를 때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오곤 한다.   

   

60년대 초, 그러니까 벌써 60여 년 전의 먼 옛날이야기이다.      


난 그때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충무로에 있는 모 영화사에 조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조감독이라는 말에 혹자는 대단하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고 있는 영화사는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구나 규모가 작은 영세(零細)한 영화사였기에 그 내막을 자세히 알고 보면 별 볼 일 없는 직업(?)에 불과했다.    

  

요즘 영화계의 구조는 얼마나 어떻게 변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그곳에 있을 때 영화계의 구조는 대부분 연출부제작부, 촬영부 진행부, 그리고 조명부 등 네 개의 분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때 내가 속한 부서는 연출부였으며 연출부에는 감독을 비롯하여 그 밑에 세 명의 조감독이 있었다. 조감독 역시 첫째, 둘째, 셋째의 서열이 있었다. 조감독들은 주로 감독 밑에서 감독이 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난 조감독 중에서도 맨 막내인 셋째인 말단 조감독이어서 감독이 시키는 대로 담배를 사오거나 잔심부름, 그리고 회사 청소 등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첫째 조감독쯤 되면 그나마 얼마만큼의 수입이 고정되어 있어서 그런대로 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서열이 둘째인 둘째인 조감독과 나처럼 셋째는 말이 좋아 조감독이지 영화 한 편을 완전히 끝낸 뒤에야 어느 정도 보수를 받곤 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용돈 정도밖에 안 되는 보잘것없는 보수였다.      


영화 한 편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아주 짧게는 5~6개월, 그리고 오래 걸리는 작품은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기에 몇 년 동안은 아무 보수도 없이 교통비며 식사비 등 모두를 나 스스로 자비로 해결해야 할 때가 많았으니 영화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정말 못할 일이 그 일이었다.   

    

몇 년이 걸려서라도 영화 촬영을 무사히 끝내면 그나마 다행이며 보람이 있다고 하겠다. 여러 달 걸려서 촬영하다가도 이런저런 사정(주로 제작비)에 의해 펑크가 나서 손해만 보고 그만두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처럼 영화 촬영이 순조롭지 못하고 펑크가 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조감독들은 그에 따라 몇 달 동안 수입이 전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어떤 때는 별 도리없이 손목시계까지 전당포에 맡겨놓고 직원들이 함께 점심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내 손목시계 역시 전당포에 맡겨놓고 점심을 한번 먹었다가 회사에서 손목시계를 찾을 돈을 주지 않아 아끼고 아끼던 손목시계만 영영 잃어버리고 마는 지금 생각해도 씁쓸한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때 우리 회사 직원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즐겨 먹던 음식은 주로 돈가스였다. 명동에 있는 어느 음식점에서 돈가스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그때 돈가스가 식성에 맞기도 하였지만, 다른 음식들보다 그 음식점에서 파는 돈가스가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명동에 있는 음식점에서는 돈가스 한 그릇에 얼마에 팔고 있었을까? 


돈가스 한 그릇에 20원이었다. 돈가스 한 그릇에 20원이라니? 아마 요즘 사람들은 그 가치가 얼마쯤인지 쉽게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당시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3원이었다. 다시 말해서 20원짜리 돈가스 한 그릇값은 시내버스 여섯 번이나 일곱 번 정도 승차할 수 있는 값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전차 승차 요금은 2원 50전이었다.   

   

또한, 광화문 거리에 있는 음식점마다 음식값을 종류별로 하얀 종이에 써서 가게 앞에 주렁주렁 앞에 걸어놓곤 했는데 대부분 음식 한 그릇값이 99원씩이었다.      


난 99원이라는 음식값이 늘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왕이면 1원을 올려 100원이라고 하면 계산하기도 수월하고 간단했을 텐데 무슨 이유로 음식점마다 99원에 팔고 있는 것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음식값이 100원이 넘으면 그만큼 세금이 비싸게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또한, 그때 웬만한 사람들은 ‘파랑새’란 담배를 즐겨 피웠는데 파랑새 담배 한 갑에 3원이었고, ‘진달래’ 담배는 10원이었다.


진달래보다 조금 고급 담뱃값은 15원인가 20원쯤이었는데 맛도 순하며 입맛에 밎았지만 서민들은 주로 값이 저렴한

'파랑새 '를 많이 피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파랑새나 진달래  백양 모두가 필터가 없는 담배였다.


그래서 담배를 피울 때마다 담뱃가루가 입안으로 들어오곤 하여 그때마다 ‘퉤퉤’하고 뱉으면서 피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 필터가 달린 고급 ‘아리랑’ 담배가 시중에 나오기는 했지만…….


그런 세월을 보내던 중 뜻밖에도 청파동에 있는 어느 호텔 레스토랑을 가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원래 시골에서 자란 촌 무지랭이어서 그런 고급 호텔을 들어가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내가 돈가스를 좋아한다니까 문단의 대선배가 나를 그곳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바짝 긴장한 마음으로 호텔 안으로 들어서니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실내에서는 아름다운 G선상의 아리아의 선율이 은은하고도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요즘 말로 끝내주는 분위기였다.    

  

명동에서 늘 먹던 돈가스 집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은근히 문단 선배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그의 움직임에 따라 수프를 먹음 다음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돈가스를 먹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이런 양식을 즐겨 먹어온 사람처럼 되도록 세련되고 우아해 보이게…….     


거기까지는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잘 넘겼다. 돈가스도 이미 다 먹었다. 호텔 돈가스여서 그런지 명동에서 먹던 돈가스보다 더욱 맛도 그만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비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웨이터가 오더니 ‘디저트’는 어떤 것으로 하실까요? 하고 정중히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디저트’란 말을 난생처음 듣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음식을 또 주문해 달라는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웨이터의 물음에 한마디로 딱 거절하고 말았다.      


“난 디저트는 사양할게요.“  

   

그러자 문단 선배는 무엇인가를 주문하더니 나를 향해 웃으면서 물었다.   

  

”공짜로 주는 건데 왜 안 먹겠다는 거지?“     


난 그제야 ‘아차!’하고 후회를 하게 되었다. 웨이터가 다시 어떤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입가심’으로 무얼 먹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을…….    

 

그러나 이미 버스는 지나간 뒤였다. 조금 전에 그렇게 강경하게 안 먹겠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디저트’를 주문할 수도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나의 영어 실력이 이 정도라니! 두고두고 몹시 씁쓸하면서도 민망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그때의 무식했던 일이 가끔 떠오를 때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움에 지금도 저절로 입가에 나오는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곤 한다.      


”망할 녀석 같으니라구. 여기가 미국이야 영국이야? 우리말로 ‘입가심’이나 ‘후식’은 어떤 것으로 하실까요?‘ 하고 물으면 어디가 덧나나?“ 


그러나 난 지금도 돈가스를 가끔 즐겨 먹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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