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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Apr 15. 2020

'행주치마'의 유래에 관하여

[유래와 어원, 그리고 위인 일화]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 중에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행주외동에 위치한 산성이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대첩 등, 이 3대 대첩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던 우리나라를 마지막 위기에서 극복시킨 빛나는 대첩이 아닐 수 없다.       


이 3대 대첩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삼척동자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상식이라 하겠다.       

우선 느닷없이 이 3대첩을 들추어내게 된 이유부터 설명해 보고자 한다.        

   

오래전, 모 공공기관의 관공서로부터 위인전을 한 권 써보라는 원고 청탁을 받은 바 있었다. 바로 임진왜란의 3대첩 중에서 통쾌할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거둔 행주 대첩의 주인공인 권율 장군의 전기를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권율 장군이 이 행주산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 첫째는 장군의 유비무환 정신이라 하겠다.      


장군은 언젠가는 일본군이 이 행주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미리 완벽한 철저하게 전투 준비를 갖추어 놓게 되었다.       


장군은 우선 일단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식량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충분한 군량미와 전쟁을 할 때 군사들이 목이 마를 것을 염려하여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샘물까지 여기저기 파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지형상 일본군이 한강을 따라 배를 타고 와서 산성 남쪽 절벽을 타고 기어 올라올 것을 예상하여 미리 산성 위에 큼직한 돌멩이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일본군들이 절벽을 타고 올라올 때 그 돌덩이들을 굴려 그들을 물리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철저하게 해놓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전쟁은 곧 장군의 예상을 적중하게 되었다.   


한강을 통해 배를 타고 온 일본군들은 이미 산성 절벽을 개미떼처럼 무섭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찬스를 기다리고 있던 장군이 마침내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을 하기에 이르렀다.    

  

“다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돌덩이를 굴려 내려라!”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위처럼 큰 돌덩이들은 절벽으로 까맣게 기어올라오고 있는 일본군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굴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자 무섭게 굴러 내려오는 돌덩이를 맞은 일본군들이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며 그들 대부분이 강물 속으로 무참하게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한강으로 굴러떨어진 일본군의 숫자가 부지기수여서 한강물이 한동안 온통 빨간 피로 물들었었다고 한다.   


어쩌다 산성 위까지 올라오게 된 일본군들은 미리 만들어 놓은 대형 사다리로 여러 명이 눌러 그 자리에서 압사하여 죽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행주산성 전투에사 가장 큰 쾌거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보다도 돌덩이들의 위력이었으리라.        


또한 행주산성에서의 전투에서 크게 일조를 한 것은 그 마을에 살고 있던 아낙네들까지 솔선수범하여 힘을 합쳐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그때부터 아낙네들이 사용하고 있는 앞치마의 이름을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가 교과서는 물론, 그 어느 문헌에서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원고 청탁을 받은 나는 내심 은근히 기분이 좋았었던 게 사실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잘못 전해내려오고 있는 행주치마에 관한 이야기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행주치마의 유래가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의 최영희 교수가 고증한 결과를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사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아낙네들이 앞치마를 이용하여 돌멩이를 날랐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었다. 왜냐 하면 그 당시 행주산성에서의 전쟁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아낙네들은 이미 강화도로 대피를 시켰기에 그 마을에는 아낙네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럼 돌멩이들을 날랐다는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란 말인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돌멩이를 나른 것은 사실이며 군사들이 마대를 앞치마처럼 두르고 날랐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허무한 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아아, 역사란 이렇게 왜곡되어 전해지기도 하는구나!  지금까지 행주치마는 오직 행주산성 전투에서 아낙네들이 앞치마로 돌을 날랐다는 것을 사실처럼 자랑스럽게 여겨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낙네들이 돌을 날은 게 아니고 군사들이 날랐다는 이야기를 꼭 바로잡아 써야 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던 것이다.      


난 바로 권율 장군의 전기문을 써달라고 부탁을 해온 관공서로 연락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새로 쓰는 전기는 최영희 교수의 기고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아낙네가 아닌 군사들이 마대를 이용하여. 돌멩이를 날른 것으로 쓰겠다고…….


그러나 관공서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뜻밖이었다.     

 

지금까지 수백 년간 행주치마의 유래가 행주싸움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 국민이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 내용을 갑자기 바꾸게 되면 ‘행주치마’의 유래가 무색해질 수도 있으니 그냥 아낙네들이 날른 것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가 그렇게 이어져 왔으니 아무리 확고한 고증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아낙네가 날른 것으로 써서 행주치마의 유래는 그대로 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난 어이가 없었다. 모처럼 큰 기대를 가지고 위인전 하나를 써보려던 나의 기대는 그만 맥이 빠지고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기분이 마냥 씁쓸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 역시 그런 왜곡된 전기는  쓰고 싶지 않다고 정중히 청탁을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나라의 모든 역사와 유래, 어원 등, 그것들은 아무리 고증이 철저하게 된 이야기라 해도 난 그때부터 일단 모든 이야기에 대해 일단 의심부터 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문헌 등을 참조해서 고증된 이야기라고 해서 과연 다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역사라 하여도 그리고 실제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사람이 쓴 이야기라 해도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역사나 유래를 기록할 때 그것을 맨처음에 쓴 사람이 얼마나 정확하게 사실대로 썼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을 좀더 미화하기 위해 남긴 글일지조차 그것을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이 전무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그래서 때로는 악인이 성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 역사와 유래가 아닌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수천 년 전, 이미 신라 때 천문 연구로 사용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 첨성대 역시 누군가는 그것마저 부정하는 학자들도 간혹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난 요즈음 브런치에 ‘어원 풀이’와 ‘위인 이야기’를 열심히 게재하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내가 올리고 있는 이 글들 역시 내가 직접 그 현실을 직접 목격했더나 겪고 나서 쓰는 글이 아니다. 그래서 되도록 여러 가지 많은 책들을 살펴보면서 그중에서 특히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글, 그리고 교훈이 될만한 글을 골라 올려놓곤 하는 것이다.  

   

어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가끔은 댓글로 잘못된 부분을 친히 지적해주고 가르쳐 주는 작가님들이 계시기에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사실 역사나 유래는 그렇게 해서 자주 수정하고 고쳐나가면서 바로 잡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여전히 몹시 조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바로 어제 올려놓은 위인 일화 ‘황희 정승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아도 그와 비슷한 예가 아닌가 미루어 짐작해 보게 된다.       


황희 정승은 그의 성품이 너무나 어질고 마음씨가 착해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때마다 도와주곤 하여 자신은 평생 몹시 가난한 살림을 이어갔다고 위인일화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높은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도 식사는 늘 죽으로 때울 정도로 검소한 생활이 습관화 된 위인 중에 위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책에서 보면 ‘황희 정승’의 이야기는 내가 올린 내용과 정 반대로 기록된 이야기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쓴 일화처럼 황희 정승이 검소하고 소탈하며 남을 돕기는커녕, 뇌물을 너무 좋아해서 뇌물을 가장 많이 받아먹은 사람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허영심이 많고 욕심이 많은지 황희 정승은 하인을 자그마치 천 명이나 두고 지냈다고도 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이미 올려놓은 황희 정승의 일화는 그와 정 반대의 인물아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한 인간의 삶이란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악인이 될 수도 있고, 선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어찌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가히 짐작이라 할 수 있으랴.  


끝으로 언제나 부정적인 일이나 사건보다는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두는 것이 정신 건강상으로 볼 때 훨씬 더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역사와 유래는 어찌 됐건, 거짓이든 진실이든, 후손인 우리들은 그들의 좋은 점, 그리고 귀감이 되고 본받을 점을 많이 읽어보면서 각자 개인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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