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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Apr 21. 2020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가나안 농군학교 견학기]

아마 위에 적힌 제목만 보아도 너무나 유명했던 일이어서 웬만한 분들은 ‘아하, 바로 그 이야기로구나!’ 하고 미리 짐작할 사람들이 많으리라.     


맞는 이야기이다. 이 구호는 너무나도 유명한 가나안 농군학교로 들어서는 정문에 커다랗게  게시했던 그 학교의 교칙이 아니면 표어와 비슷한 철학이 담긴 글귀이다.      


아주 오래전, 우연한 기회에 가나안 농군학교 견학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본인의 희망에 따라 가고 싶어서 간 그런 견학이 아니었다. 그저 직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가기로 계획이 됐다고 하여 아무 생각이나 기대도 없이 그냥 무작정 따라나섰던 단체 견학이었다.       


위치는 경기도 광주시(그 당사에는 광주면)동부면에 위치한 시골이었다.      


시외를 한동안 달리던 버스가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른 것 같았다. 버스를 멀리 주차해 놓은 우리 일행이 마침내 버스에서 내려 목적지인 가나안 농군학교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학교로 걸어가는 길 양쪽에는 군데군데 젊은 여인네와 남자 일꾼들이 군데군데 땡볕에 앉아서 밭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 여럿이 떠들썩하며 걸어가고 있었지만 전혀 관심이 없었는지 그 누구도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땀흘려가며 일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한 아치형 정문 위로 다음과 같은 글귀가 커다랗게 부착되어 있었다. 그 학교의 정문이라고 하는데 정문이 아니라 얼른 보기에도 무슨 작은 규모의 농장 입구처럼 부실하게 세워진 문이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     


글씨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련된 글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어딘가 서툴게 쓴 촌스러운 간판에 불과했다. 그 글씨가 쓰여있는 바탕 재질도 너무나 시시하다 못해 촌티가 물씬 풍기고 있는 듯하여 미리부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필이면 왜 시골구석에 뭐가 볼 것이 있다고 견학을 온 거지?’     


첫인상부터 기대 이하여서 솔직히 마음속으로는 벌써부터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정문에 들어서고 나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노인 한 분이 우리들을 반가이 맞이하며  우선 역시 허술하게 흙벽돌로 지어진 어느 단층 토막집 안으로 안내했다. 안내를 하고 있는 그가 바로 이 농군학교의 교장인 김용기 장로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허름한 한복 차림의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김용기 교장, 옷차림새나 첫인상으로 보아 전혀 위엄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말로만 들어오던 그토록 유명한 이 학교의 교장이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초라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앉혀 놓고 곧 그의 강의는 시작되었다.      


그는 이곳 전혀 그 어느 농작물도 자라지 못해서 버리다시피 했더 이 황무지의 땅을 헐값에 구입한 후 이곳에 학교를 세우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이곳 주민들은 김용기 교장을 미친 사람 취급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버려진 황무지에 무슨 농작물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약 3년 뒤, 이 버려졌던 땅은 기름진 옥토로 변하고 어느 농작물이나 심기만 하면 그 어느 땅에 심은 것보다 잘 자라게 되었다. 그동안 피와 땀을 흘려가며 거름(퇴비)을 주고 정성껏 가꾼 보람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이 땅이 너무나 기름진 옥토로 변하게 되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사고 싶은 땅으로 변하였고, 그 땅값이 그 부근에 있는 다른 땅들보다 무려 10배나 치솟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대단한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 처음부터 좋은 땅을 사서 농사를 지을 것이지 하필이면 왜 힘들게 황무지를 구입해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인가. 그 가장 큰 목적은 이 땅의 황무지로 버려진 땅 모두를 언젠가는 모두 기름진 옥토로 가꾸어 놓고 싶은 야심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여기서 일단 자리가 잡히면 다시 다른 황무지를 찾아가서 개척해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전체를 옥토로 만들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럼 그 넓은 땅은 언제 누가 다 농사를 짓고 가꾸고 있을까?   

  

그 토막집 벽 여기저기에는 붉은 글씨로 작은 종잇장에 쓴 수많은 글씨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흔들리고 있어서 눈길르 끌게 하고 있었다. 글귀의 내용도 가지각색이었다.      


‘국가에 충성!’ ‘맹세’ ‘죽도록 일하자!‘ ’회개‘ ’제2의 인생‘ 등…….     


 설명을 듣고 보니 그 글씨들은 물감으로 쓴 글씨가 아닌 그 모두가 혈서라고 하였다.

더욱 놀란 것은 그 혈서를 쓴 사람들은 그 모두가 한때의 실수로 흉악범들이 되어 오랫동안 감방살이를 하다가 만기가 되어 출소 후, 오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뒤늦게 후회하면서  새 사람이 되겠다는 각오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쓴 글씨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이 학교의 농사를 짓는 일꾼이라 하였다.        


◆  일반 사회와는 너무나 다른 농군학교의 특별한 규칙들      

  

내가 가장 감명받은 것 중의 하나는 뭐니뭐니 해도 이 학교의 특별하고도 유별난 규칙들이라 하겠다.      


농군학교의 정문을 들어설 때 이미 보았던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라는 구호는 그냥 폼으로 써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몇 가지 이 학교 규칙만 보아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학교 규칙에는 모든 게 ’3‘자로 통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우선 그때 교장의 설명을 듣고 지금까지 기억이 나는 대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밥은 3시간 이상 일하고 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2. 3보까지는 걸어가도 좋다. 그러나 그 이상을 갈 때는 걷지 말고 반드시 뛰어가도록 하여라.        


 3. 여자가 출산을 했을 때는 3일만 쉬도록 하여라. 그다음 날부터는 반드시 일어나서 맡은 바 일을 해야 한다.         

 4. 두루마리 화장지는 30센티 이상을 사용하지 말아라.     


이와 같은 엄한 교칙에 의해 일반 이 학교에 입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모두가 누구나를 막론하고 매일 눈을 뜨기가 무섭게 지런히 일을 해야 하고 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교장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      


강의 도중에 교장은 아들에 관한 이야기도 자랑스럽게 늘어놓고 있었다.


아들은 이미 어느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지금은 현역 장교로 복무 중이라고 하였다.      


아들은 다달이 받은 월급 모두를 아버지인 교장에게 드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용돈을 쓸 일이 생기면 그때마다 아버지에게 요구하여 받아 쓴다고 하였다.    

  

어느 날, 아들은 교장에게 용돈 100원만 달라고 요구하였단다. 이발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에 제대로 이발을 하려면 이발료가 적어도 500원 이상 몇천 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골 마을에 백 원에 이발을 해주는 가장 싼 이발소가 있어서 100원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에 교장은 아들에게 선뜻 100원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이발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교장에게 50원짜리를 되돌려 주게 되었다. 아들에게 이게 웬 돈이냐고 물었더니 100원짜리 이발을 하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50원에 해주는 곳도 있어서 50원짜리 이발을 하고 남은 돈이라고 하더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아들은 결혼을 이미 두 번인가 세 번째 했다고 하였다(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는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들 모두가 명문 대학을 나온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어떤 고생이 되더라도 참고 견디며 살아보겠다고 일단 결혼은 했지만 석 달 이상을 견디지 못하고 헤어지곤 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너무나 일이 고되고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이 학교에 들어올 때 혹시 밭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여자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 여자가 바로 현재의 며느리라고 자랑삼아 설명해 주었다.    

  

◆  외국에 갈 때는 늘 두루마기와 흰 고무신 차림의 교장      


교장은 필리핀 대통령인 ’막사이사이‘ 상도 수상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 막사이사이상이란 세계적으로 공헌한 업적이 인정되는 인물을 선정하여 주는 영예로운 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장준하, 김활란, 이태영, 장기려, 김임순 등이 수상한 바가 있다.       


어느 해 교장은 일본을 가게 되었다. 일본 정부에서 수여하는 대단한 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교장은 언제 어딜 가나 늘 두루마기 차림의 흰 고무신이 그의 유일한 의관이었다. 언제나처럼 이처럼 영예롭고도 대단한 행사에 참석할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행사도 행사이니은 멋진 양복 정장차림으로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권장해보았으나 그의 고집 또한 대단했다.      


“이 차림이 어디가 어때서? 이런 때일수록 우리나라의 고유 의상인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보여줄 수 있는 더 기회가 아닌가. 안 그래?”     


마침내 교장이 일본 시상식 행사장 도착하게 되었다.   

   

행사장 입구로 들어서는 대로변 길가에는 일본 경찰들이 이미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개미 한 마리라도 함부로 얼씬조차 할 수 없은 삼엄한 분위기였다.


그때 김용기 교장이 초라한 모습으로 지팡이까지 들고 이 길로 들어서자 일본 경찰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성질을 내며 소리소리 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외국 국빈이 이 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감히 어디서 웬 노인이 어물쩡거리고 있느냐고 화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바로 오늘 초대를 받고 참석하게 된 한국 사람 김용기라고 설명했지만 그들은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이런저런 확인 절차를 마친 뒤에야 행사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필리핀으로 상을 받으러 갈 때에도 옷차림은 늘 두루마기에 밀짚모자, 그리고 흰 고무신 차림이었다.      

 

그래서 어느 기자는 늘 흰 고무신을 신은 채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고 하여 그를 가리켜 ’흰 고무신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실망만 했던 견학, 그러나 견학을 난 뒤에는 너무나 많은 감동을 받았고, 또한 너무나 많은 깨달음을 일깨워 준 뜻있는 견학이 아닐 수 없었다.      



끝으로      


여기 소개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에 직접 김용기 교장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큰 감동과 감명을 받고 다시 기억이 나는 대로 적게 된 글이다.


교장은 그 후, 경기도 하남, 강원도 등으로 자리를 옯겨가며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혹시 이야기의 내용이 사실과 조금이라도 왜곡된 부분이 있다면, 그리고 그런 점을 알고 계신 분은 많은 지적을 해 주신다면 거기서 더 이상 감사할 수 없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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