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된 사냥꾼

[신비로운 옛날 이야기]

by 겨울나무

주 옛날 옛적의 이야기이다.

높고 험준한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인 강원도의 어느 산골짜기에 사냥을 아주 잘하기로 소문이 난 젊은 사냥꾼 한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사냥꾼답게 생김새조차 우락부락할 뿐만 아니라 남달리 건강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도 엄연히 이름은 있었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워낙에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고 사냥을 잘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의 이름 대신 강원도에 사는 '유명궁' 이라고 해야 얼른 알아들을 정도로 유명했다.


유명궁이 사냥을 할 때는 엽총 대신 언제나 활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활을 다루는 숨씨는 어찌나 재빠르고 능란한지 누구나 탄복을 하곤 하였다. 언제 누구에게 배운 솜씨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까지 일단 목표물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하면 단 한 번의 실수도 허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야말로 하늘 위로 까마득하게 높이 날아가는 새도 마음먹기에 따라 당장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그런 비상한 솜씨를 소유한 사람이 바로 유명궁이었던 것이다.


사냥꾼으로서의 그의 명성이 그토록 드높아지게 되자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유명궁을 가리켜 팔자 좋은 사람이라며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건 유명궁 자신이 생각해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허구한 날 산책 겸 운동 삼아 이 산 저 산을 쏘다니며 사냥해온 짐승들만 팔아도 전혀 먹고 살아갈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남은 돈도 제법 많아서 부자라는 소문도 듣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힘들여 사냥을 하지 않아도 활을 쏘는 재주를 배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이른바 제자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오는 사람들도 끊임이 없어서 생활 걱정은 조금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유명궁에게도 늘 마음 한 구석에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는 벌써 결혼까지 한 사람이었지만, 서른을 훨씬 넘은 나이였음에도 아직까지 대를 이을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는 삼대 독자였다. 그러기에 늘 자식을 갖고 싶은 욕망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의 아내는 더욱더 그런 마음이 간절하였다.


아내는 가끔 수심이 가득 찬 미안한 얼굴로 남편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보기도 하였다.


"여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저는 당신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아요.“

"그건 또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소리요?“


평소에 아내를 몹시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아내의 속마음을 벌써부터 잘 알고 있는 유명궁은 슬쩍 딴청을 부리면서 되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더욱 괴롭다는 표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를 생각해서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곤 하지만 어쨌든 저는 큰 죄인이잖아요.”

"당신이 죄인이라고? 그건 또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요?“


"예로부터 여자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일곱 가지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새 와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아내는 마침내 안타깝고도 괴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어깨까지 들먹이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유명궁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자 더욱 사랑스럽고 대견스러운 마음에 두 팔로 아내를 감싸 안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식을 낳고 못 낳고는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법, 어찌 그게 당신의 죄란 말이오? 난 그저 지금처럼 당신만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으니 쓸데없는 생각일랑 거두시오. 내 말 알아듣겠소?“


그러나 아내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지금은 혹시 그렇다 치시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는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은 삼대독자시니 꼭 대를 이을 자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린 아직 나이도 있으니 그 일은 좀 더 기다려 봐도 늦지는 않지 않소?"


"아닙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정말 후회하시게 됩니다.“

"혹시 일이 잘못되어도 난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니까요. 당신만 늘 내 곁에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니까요."

"그럼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자는거요 ? 별수가 없지 않소?"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방법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저와 헤어지시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흐흐흑…·…·.”


아내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아까보다 더욱 크게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자 유명궁은 더욱 힘을 주어 아내의 어깨를 껴안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게 되었다.

"또 그 소리…·…·. 도대체 몇 번이나 더 말을 해야 알아듣겠소? 난 당신만 내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소? 자,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고 어서 눈물을 거두어요.“


아무리 달래 보았지만 아내의 안타깝고 괴로운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이었다.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이었지만 유명궁은 이날도 일찍부터 사냥길에 나설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사냥을 허러 갈 때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내도 덩달아 일찍 일어나서 사냥을 나가는 유명궁을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따라나오며 정이 듬뿍 담긴 말로 정성껏 배웅을 하고 있었다.

"너무 혐한 산에는 올라가지 마셔야 되요."

"알았어요."

"특히 요즈음 같은 가을철에는 무서운 독뱀에 주의하시고요."

"물론이지."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일찍 좀 돌아오시고요.”

"글쎄 알았다니까요, 알았어. 꼭 어린 자식 배웅하듯 하는구려, 허허허…·…·.“

"당신이 사냥을 나갈 때마다 왠지 늘 걱정이 돼서 그래요."


"걱정은 무슨, 내가 사낭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렇지요."


아내는 남편과 차마 떨어지고 싶지를 않아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와 헤어진 유명공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누비고 다니며 산짐승을 찾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어떨헤 된 일인지 그날만은 산돼지와 곰, 그리고 노루 같은 큰 짐승은커녕, 토끼와 꿩 같은 작은 짐승조차 그림자 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거참, 희한한 일도 다 보겠군!“


여느 날 같으면 작은 짐승 같은 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던 유명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너무나 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먼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떠나 저녁때가 다 되도록 하루 종일 산속을 부지런히 헤맺지만 짐승이라고는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대로 허탕을 치고 그냥 내려간대서야 어디 명궁으로서의 위신이 서겠나!“

유명궁은 조금 수치스러운 생각에 갑자기 마음까지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작은 짐승이라도 한 마리 꼭 잡아가지고 돌아갈 생각으로 그의 동작은 아까보다 더욱 민첩하고 재빨라졌다.


마치 성난 사자처럼 험한 산속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헤매는 바람에 그의 몸에서는 온통 구슬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사방에는 이미 땅거미가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허탕을 치고 말겠는걸!“


유명궁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지기만 하였다. 그냥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소위 나라에서 제일 간다는 명궁의 체면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명궁은 마침내 지치고 지친 몸을 잠시 달래기 위해 커다란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달가닥! 달그닥~~~”

저 아래 멀리 산골짜기에서 바위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오은 것이 아닌가!


유명궁은 곧 피우던 담뱃불을 바위에 비벼 끈 다음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소리가 나고 있는 방향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살금살금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었다.


'달그락' 소리는 여전히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 그러면 그렇지. 사슴이었구나!‘

순간 유명궁의 얼굴빛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리고는 어느 새 재빨리 사슴을 향해 활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었다.


"피유웅---.“


화살은 이미 무서운 속도로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그가 쏜 화살은 여지없이 사슴의 목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그러나 갑자기 뜻밖의 참을 당한 사슴은 그 자리에 쓰리지지 않고 연신 애절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저 녀석이…·…·.”


유명궁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번째 화살을 도망치고 있는 사슴을 향해 당겼다.


그러자 두 번째 화살 역시 사슴의 옆구리를 보기 좋게 명중시키고 말았다.


그러자 사슴은 더 이상 도망을 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진 채 네 다리를 버둥거리다가 마침내 그만 가엾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유명궁은 갑자기 힘이 나서 사슴이 쓰러진 곳을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아니, 이게 이찌 된 일이지?“


죽은 채 쓰러져 누워있는 사슴을 본 유명궁은 그만 어리둥절해져서 두 눈이 화등잔만큼이나 커다랗게 되고 말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죽은 사슴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미 목이 잘려 나간 머리통 부분이 없는 사슴이었던 것이다.

"아까는 분명히 머리 부분이 있었는데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일이지?“


목과 옆구리에 두 개의 화살이 박힌 것으로 보아 분명히 조금 전에 자신이 발견하고 쏜 사슴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통이 달려 있었던 것도 자신의 두 눈으로 분명히 확인했던 일이다. 그런데 목이 잘려있다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유명궁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며 머리털이 쭈뼛하게 곤두서고 말았다. 결국 사슴 한 마리를 겨우 잡기는 했지만 이만저만 기분이 이상하고 찝찝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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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슴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사슴을 헛간에 동댕이치듯 던져 둔 채, 시장한 김에 아내가 미리 준비해 놓은 저녁밥을 부지런히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여느 날과 달리 오늘따라 더욱 정성껏 차린 저녁상이었지만 목이 잘려나간 사슴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바람에 입맛이 떨어져 밥이 제대로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왜 어디가 편찮으세요?“

아내가 중간에서 밥숟갈을 놓고 있는 유명궁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 아니오. 아마 오늘 너무 싸돌아다녔더니 피곤해서 그런 모양이오.“


아닌게 아니라 유명궁은 너무나 지치고 피곤한 나머지 곧 자리를 펴고 잠을 청하게 되었다. 그래야만 오늘 낮에 기분 나빴던 사슴의 생각도 잊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무나 피곤하고 고단했음인지 유명궁은 곧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유명궁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들다 보니 그 이상한 소리는 가슴이 찢어질 듯 원통하고 분해 견딜 수가 없어서 울부짖는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어쩌자고 그다지도 무정한 짓을 하셨나요? 어서 말이나 좀 해보세요. 네?“

유명궁은 그만 소스라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의 방에는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아내 대신 점잖게 생긴 중년 남자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슬피 울고 있었다. 전혀 본 적이 없는 잘생긴 남자였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 누구요?“


유명궁이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자 그 남자는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놀라게 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탈을 쓴 수사슴일 뿐입니다. 으흐흑…·…·.”


"뭐, 뭐야?“


사슴이라는 말에 유명궁의 금방 낯빛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전 분명히 사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제 저녁에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내 아내를 무정하게도 활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럼 당신이 바로 그 사슴의 남편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당신의 처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몸이었답니다.“

”나와 처지가 같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당신은 삼대 독자로서 그토럭 자식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삼대 독자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 자식 하나를 원하다가 마침내 그 뜻이 거의 다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만, 으흐흑…·…·.”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다시 서러움에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유명궁은 궁금함을 못이겨 다시 묻게 되었다.


“그 뜻이 거의 다 이루어지고 있었다니?”


"당신이 죽인 나의 아내는 홀몸이 아니었습니다. 빠르면 내년 늦은 봄에는 아기를 낳을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색이 명궁이란 분이 그토록 잔인하고 무정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겁니까? 난 이제 희망을 모두 잃은 사람입니다. 아내와 자식을 모두 잃은 내가 무슨 재미로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제 당신이 하실 일은 나까지 죽여 주는 일입니다.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오.“

남자는 아까보다 더욱 서럽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잊은 듯 여전히 울먹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 참, 어제 내 아내의 목이 없는 걸 보고 무척 이상하게 생각하셨죠?"

"그, 그랬죠."

"아마 당신은 내 아내를 죽이기 전에 '달그락, 달그락' 하는 소리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요. 생각이 나구받구, “

”그 달그락거리는 바로 제가 바위에 내 뿔을 부딪치고 있는 소리였습니다. 그 위험한 순간이 다가온 것을 미리 눈치챈 제가 아내에게 미리 신호를 보내기 위힌 짓이었는데, 당신은 그 소리를 듣고 내 아내를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내 아내는 내가 죽인 꼴이 되고 만 셈이지요.“


”그렇다면 목이 잘려나간 이유는?“

"난 단 하루도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죽게 되자, 아내의 얼굴까지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재빨리 아내의 목을 잘라 품에 안고 급히 도망을 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당신 아내의 머리는…·…·?"

“제 품에 고이 간직한 채, 아내의 생각이 날 때마다 꺼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나마 썩어 없어질 얼굴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유명궁은 그제서야 사슴의 목이 달아난 까닭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새끼까지 밴 어미사슴을 무참하게 죽인 죄에 대해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할지, 입이 굳게 다물어진 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얼마 후에는 삼대 독자의 대를 이어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한 집안을 삽시간에 망쳐 놓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 당장 죽어도 그 죗값을 치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명궁이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푹 숙인 채 크게 뉘우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기왕에 엎질러진 물이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 ?”


"내일 내 아내를 죽였던 바로 그 산골짜기에 있는 바위로 꼭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거기서 다시 저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


유명궁은 너무나 큰 죄를 진 마음에 뭐라고 대꾸할 염치조차 못하고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거기서 나를 만나시거든 인정사정 두지 말고 내 아내를 죽였듯이 저도 죽여 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제가 이제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유명궁은 마침내 슬픔에 복받쳐 더 이상 그 남자의 말을 계속해서 들을 수가 없어 미친 듯이 크게 소리내어 울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안 돼요! 안 돼! 차라리 당신이 나를 죽여 줘요! 날 죽여 달란 말이오!“

유명궁은 소리소리 지르다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고야 말았다. 그의 온몸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흠뻑 젖어 있었다.

"여보, 무슨 일이세요 ?“

유명궁이 크게 외치는 소리에 잠을 깬 아내가 벌떡 일어나면서 걱정스러운 낮으로 물었다.


"아, 아니오.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몹시 걱정스러위하는 아내를 일단 안심시켜 놓은 유명궁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어서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도 꿈이 꺼림칙하여 어제의 그 산골짜기를 다시 가보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멀리서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그는 부랴부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어제의 그 산골짜기를 향해 미친 듯이 허둥지둥 달려가고 있었다.

급히 산을 오르는 동안 차츰 어둠이 걷히면서 먼동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몇 개의 험한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마침내 바로 어제의 그 장소에 다다르게 되었다.

유명궁은 바위 뒤에 몸을 바짝 붙이고 숨을 죽인 채, 저 아래로 보이는 샘가의 동정을 유심히 살피기에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아, 정말 이럴 수가......?"


하마터면 유명공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샘가 바위 밑에는 정말 어제의 그 수사슴 한 마리가 마치 유명궁이 어서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땅바닥에 배를 깔고 조금도 움적이지를 않고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수사슴은 온갖 슬픔이 가득 찬 얼굴로 가뜩이나 커다란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리고 수사슴은 여전히 꼼짝도 않고 앞에 놓여 있는 그 무엇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아! 정말 이럴 수가!‘


유명궁은 다시 한 번 정신을 잃을 뻔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수사슴은 지금, 어제 유명궁이 죽인 사슴의 머리를 앞에 놓고 슬픔에 젖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유명궁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과 죄책감 때문에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난 천하에 둘도 없는 죄인이었어. 그토록 많은 생명을 무참히 죽이고 또한 저토록 불행을 안겨 주고도 그것을 지금까지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니, 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야. 죄인 으흐흑......”

유명궁은 수사슴을 차마 죽이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발걸음을 되돌리고 있었다. 더 이상 그 괴롭고 안타까운 장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명궁은 눈물이 앞을 가려 발걸음을 제대로 옮겨 놓을 수가 없었다.


터벅터벅 집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던 유명궁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엉뚱하게도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속죄를 해야 돼. 속죄를!“


결국 스님이 되기를 결심한 유명궁은 절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발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산 위로 높게 떠오른 아침 햇살이 유명궁의 가는 길을 환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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