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웃기는 이야기

[옛날 뒷간에 관한 이야기]

by 겨울나무


어쩌면 매우 혐오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몹시 웃기는 그 옛날의 이야기 한 가지를 글로 옮겨볼까 한다.


아마 이 이야기를 요즘 사람들이 읽게 된다면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고 바로 반문을 하며 강한 거부감을 가질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이 직접 겪어본 경험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글이다.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에 어쩌다 대소변을 보고 싶을 때는 이웃집이나 그 밖에 아무 곳에 가서 함부로 보지도 못했다. 그런 사실을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아버지에게 크게 야단을 맞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웃집 마당에서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놀 때에도 갑자기 소변이나 대변을 볼 일이 생기게 되면 얼른 우리 집 뒷간(지금은 모두 화 장실로 통하고 있지만, 그때는 뒷간, 또는 변소라고 불렀음)으로 달려와서 볼일을 보곤 했다. 그만큼 대소변이 농사를 지을 때 매우 중요하고도 값진 밑거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 ‘뒷간’은 다른 말로 ‘회치장’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뒷간은 조금 세련된 명칭으로 변소로,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오늘날의 화장실로 발전하게 되었다.


연탄도 아직 나오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어느 가정이나 나무를 해다가 아궁이에 불을 때며 살 수밖에 없었다. 볏짚이나 보릿짚, 그리고 수수깡 대, 콩을 떨고 난 뒤의 콩짚도 여간 요긴하고 훌륭한 땔감이 되곤 하였다.


불을 때고 나면 으레 아궁이에 쌓인 재를 작은 고무래(곡식이나 흙, 재 따위를 그러모으거나 펴는 일을 하던 농기구)를 이용하여 삼태기에 긁어 담은 다음 그때마다 뒷간으로 갖다가 산더미처럼 쌓아놓곤 하였다. 그리고 그 잿더미가 높이 쌓여가는 것을 볼 때마다 흐뭇해 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용변을 본 뒤에는 고무래로 방금 본 용변 위에 재를 덮어서 뒷간의 뒤쪽으로 밀어 놓곤 하였다. 그래서 어느 집이나 뒷간 뒤쪽에는 용변을 본 대소변과 재가 함께 섞여 항상 산더미처럼 쌓이곤 하였다.


밤새 방에서 요강에 본 소변 한 방울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오줌 역시 거름이 되기 때문에 어김없이 그 이튿날 아침에는 뒷간으로 들고 가서 잿더미 위에 쏟아붓곤 하였다.


그렇게 해서 뒷간에 산더미처럼 쌓인 잿더미는 농사를 지을 때 거름으로 여러 곳에 요긴하게 쓰이곤 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 재로 된 거름이 주로 많이 쓰이는 곳은 가을철에 추경을 할 때였다. 추경이란 다음 해에 농사를 위해 가을에 미리 논이나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일을 말하는데 밭을 갈아엎은 골마다 뒷간에 쌓였던 그 재를 운반해다가 뿌리며 흙과 섞게 된다.


추경을 하는 날에는 미리 부탁해 놓은 일꾼들 서너 명이 새벽같이 밥도 안 먹고 추경할 집으로 모이게 된다. 일꾼들은 일단 추경하는 집에서 밥을 먹고 나면 뒷간으로 가서 오줌과 대변이 함께 뭉쳐 흥건하게 젖은 재를 삽으로 떠서 가마니에 담게 된다.


그리고는 그 가마니를 꽁꽁 묶어서 지게에 올려놓은 다음, 지게를 등에 지고 밭으로 운반하게 된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뒷간에 있는 재가 바닥이 날 때까지 모두 다 지게로 실어 날라야 했다.


우리 집에서 밭까지 가려면 재를 담은 가마니를 지고 낮은 산을 하나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소변과 대변이 섞여 흠뻑 젖은 재가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그리고 한참 걸어가다 보면 차츰 등이 젖어오기 시작한다. 재에 섞여 있던 대소변이 가마니 틈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밭에 가서 삼태기에 재를 퍼담고 그 재가 담긴 삼태기를 어깨에 메고 다니며 일일이 밭이랑마다 맨손으로 뿌려주어야 한다. 그럴 때면 으레 손가락 사이로 질퍽거리는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재에 섞여 있던 그 혐오스럽고 더럽기 짝이 없는 대소변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결국, 그런 거름을 보리와 밀 등이 먹으면서 그 이듬해에 풍성하고 튼튼하게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거름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지내오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나는 읍내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외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읍내에 도착하자 그때 마침 갑자기 그놈의 급한 볼일이 보고 싶어졌다.


난 급한 마음에 부지런히 변소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다행히 변소는 찾았지만, 변소 출입문에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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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별 도리없이 다시 다른 변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변소를 다시 발견했을 때 그 변소 역시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가만히 속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하! 이 동네 사람들은 누가 대소변을 몰래 훔쳐갈까 봐 이렇게 변소 문을 자물쇠로 굳게 채워놓고 지내는 모양이구나!”


어려서부터 대소변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지내온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얼마나 웃기면서도 무지한 생각이었는지 지금도 그때의 생각이 날 때마다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오곤 한다.


나중에야 알고 보니 그것은 대소변을 누군가가 몰래 훔쳐갈까 봐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소변을 보태어 줄 것이 두려워 잠가놓았던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 마을과 거리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읍내였지만, 그리고 농사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곳이어서 살아가는 방법은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을 그제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어느덧 성인이 되어 서울에서 도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어린 시절에 읍내에 나갔을 때 겪었던 것처럼 서울에도 밖에 있는 웬만한 화장실 문이란 문은 모두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그리고 큰 상가나 지하상가마다 공중 화장실이 있긴 하지만 요금을 지불해야만 볼 일을 볼 수 있었다.


난 가끔 서울역 화장실을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서울역 화장실 앞에는 으레 책상 하나를 앞에 놓고 계산원이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화장실 사용 요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60년도 초인 그때 소변을 보려면 5원, 대변은 10원 정도가 주머니에 있어야만 그나마 급한 소변과 대변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은 5원이나 10원이라고 하면 얼핏 생각하기에는 별로 비싼 값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때 시내버스 요금은 3원, 전차는 2원 50전, 파랑새 담배 한 갑은 3원, 진달래 담배 한 갑은 10원, 광화문의 음식점에서 음식 한 그릇값은 99원이었으니까 5원이나 10원은 제법 큰 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일하고 있던 직장은 충무로였는데 점심시간이면 명동에 있는 돈가스집을 자주 이용했다.


그 돈가스집은 다른 집과 달리 음식점이 깨끗하였으며 그때 돈가스 한 그릇에 2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꽤 오래전부터 화장실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일은 이제 모두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도 웬만한 빌딩의 화장실마다 자물쇠가 굳게 잠겨 있어서 주인의 허락없이는 볼 일을 볼 수 없으니 지금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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