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가 약한 분은 절대 구독 엄금]
언제부터인가 ‘부대찌개’란 음식이 크게 유행하고 우후죽순처럼 불어나면서 이 부대찌개가 많은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갖은 양념과 솜씨를 다해 요리가 잘된 부대찌개는 얼큰하면서도 특히 쌀쌀해진 날씨에 술안주로는 그만이다. 그리고 부대찌개는 대부분 ‘의정부 부대찌개’란 간판을 내걸고 서로 자기네 음식점이 원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의정부 부대찌개란 명칭을 영업주들이 선호하게 된 것은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당시 의정부와 동두천에 미군 부대가 많았기 때문이었나 짐작해 보게 된다.
난 오래 전에 부대찌개란 과연 어떤 음식일까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가서 한번 먹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정작 부대찌개를 보자마자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소시지 등을 넣어 먹음직스럽게 솜씨를 다해 정성껏 요리한 그 부대찌개가 바로 한국 전쟁 직후에 짬밥 통에서 퍼다가 집에서 끓여 먹던 바로 그 꿀꿀이죽과 요리 방법이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난 그 뒤부터 그런 선입견 때문에 되도록 부대찌개를 일부러 먹으러 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미군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먹은 것이고, 지금의 부대찌개는 엄연히 깨끗한 재료를 써서 위생적으로 요리한 것이니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비위가 좀 약한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꿀꿀이 죽을 먹을 수가 있겠느냐며 너무 더럽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며 구역질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배고픔과 굶주림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딱 한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 첫 번째가 배고픈 서러움이라고 하였다. 그건 실제로 양식이 바닥이 나서 며칠씩 굶다가 너무나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울어본 적이 있는 뼈저린 굶주림의 경험을 체험해 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에 찌들었던 우리 마을 사람들, 설상가상으로 한국 전쟁 직후,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온통 파괴되고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먹을 것 또한 깡그리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누구나 눈만 뜨면 오직 먹을 것만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곤 하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란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대부분의 굶기를 밥먹듯 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며 목숨만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는 가엾고 슬픈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배가 너무 고프다 보니 눈에 띄는 웬만한 것은 다 먹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산에서 캐낸 칡뿌리는 고급 먹을거리였다. 철에 따라 나오는 산나물이나 들나물 역시 고급 먹을거리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밖에도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쏘다니며 나무나 풀의 열매, 그리고 연한 풀이나 나뭇잎 등, 닥치는 대로 날로 먹어치우며 허기를 달래곤 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하도 냄새가 고약하게 나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먹기가 어려우면 도로 뱉아버리기가 일쑤였다.
봄이면 이제 막 새로 물이 오른 소나무 껍질을 벗겨 씹어먹을 수 있는 이른바 송기는 가장 인기 있는 좋은 먹거리가 되었다. 송화나 솔방울의 씨도 좋은 간식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잠자리나 매미, 그리고 여치 잡아 구워 먹기, 개구리 잡아 구워 먹기, 심지어는 쥐를 잡아 구워 먹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못 먹는 것이 란 없었다.
여름과 가을에는 수수깜부기, 보리깜부기, 목화송이 따먹기, 삘기, 찔레 등 먹거리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떤 사람은 집 벽에 바른 고운 흙을 긁어서 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기도 하였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문득 혐오스러운 추억 한가지가 떠올라 그 이야기도 해보고 넘어갈까 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꿀꿀이죽을 먹는 것보다 더 지저분하고 혐오스러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배가 너무 고프면 체면이고 뭐고 없게 마련인 것 같다. 배고픔을 견디기가 그만큼 더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시골의 우리 고향 마을은 약 5~60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끼니 때마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나무를 해다가 반드시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으며 그때마다 굴뚝에서는 어김없이 연기가 펑펑 피어오르곤 하였다.
“아, 저 집은 오늘도 저녁밥을 짓는 모양이구먼.”
가끔 마을 사람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집을 보면서 부러워하곤 하였다. 끼니때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만 보고도 어느 집은 양식이 떨어져서 굶고 있고, 어느 집은 양식이 아직 남아서 밥을 짓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며 연기가 나오는 것만 보고도 몹시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양식은 이미 바닥이 나서 비록 밥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체면이 서지 않았던지 끼니때마다 아궁이에 애꿎은 군불이라도 지펴서 굴뚝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집들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며칠을 굶고도 먹은 척 체면을 세우기 위해 잇몸을 쑤시고 다녔다는 옛날 양반들의 모습을 따라서 흉내를 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곧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마을 공동 우물가에는 아낙네들 몇 명이 나와 빨래도 하고 요강을 깨끗이 부시는 일도 하고, 그나마 부럽게도 양식이 좀 있는 사람들은 보리쌀이랑 호밀도 씻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웬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우물가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길가에 있는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개는 그나마 조금 먹거리의 여유가 있는 집의 개였다.
풀을 계속해서 뜯어 먹고 있던 개가 조금 뒤, 갑자기 먹은 것을 심하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낙네 한 사람이 무얼 저렇게 토해내고 있는가 궁금한 마음에 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게 되었다.
아아, 그런데 이런 횡재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개가 풀을 뜯어먹고 있다가 풀숲에 토해낸 것은 금방 뜯어먹은 풀잎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통 보리쌀이었던 것이다.
아낙네는 반가운 마음에 눈이 번쩍 띄었다. 그리고는 곧 풀숲에 개가 토해버린 보리쌀을 그릇에 정성껏, 그리고 알뜰하게 손으로 일일이 주워 담기 시작했다.
개가 토한 그 보리쌀을 알뜰히 주운 뒤 집으로 가지고 달려간 아낙네는 그 보리쌀을 물로 정성껏 깨끗이 잘 씻어낸 다음 물을 넉넉히 퍼넣은 솥에 금방 주워온 보리쌀을 넣고 멀겋게 보리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뒤에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아낙네네 집에는 마침 며칠이나 굶은 가족들이 기운이 없어서 방에 축 늘어져 있었던 상태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낙네가 그날 멀겋게 쑨 보리죽을 한 그릇씩 퍼서 가족들에게 먹였더니 가족들이 그나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요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만큼 배가 고팠던 시절에 있었던 일 그대로를 글로 옮긴 실화였다.
한국동란이 끝난 휴전 직후, 우리 고향 마을 사람들은 틈이 나는 대로 수시로 달려가곤 하는 곳이 있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 모두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양동이나 그 밖의 찌그러든 들통을 한 개, 또는 두 개씩 들고 여럿이 그곳을 가기 위해 자주 길을 나서곤 하였다. 그들 모두가 꿀꿀이죽을 구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꿀꿀이죽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을에서 약 4키로 이상을 걸어가야 하는데 작은 산을 몇 개 넘어야 갈 수 있었다. 그곳에 가면 제법 큰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 부대는 제법 높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미군 부대 철조망 밖에는 시멘트로 둥글게 원통 모양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쓰레기통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것은 미군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 즉, 짬밥을 버리기 위한 통이었던 것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갈 때마다 욕심껏 그 짬밥을 양동이 가득 퍼담은 후, 4키로나 넘는 먼 길을 무거운 줄도 모르고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되돌아오곤 하였다.
먹을 것이 몹시 궁했던 시절, 그 짬밥 통은 정말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생명줄처럼, 그리고 구세주처럼 잠시라도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일에 큰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게 사실이다.
정말 그랬었다. 사람들은 그때 미군 부대 짬밥 통에서 퍼온 미군인들이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들을 일명 ‘꿀꿀이죽’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돼지에게 먹일 죽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말만 돼지에게 먹이기 위해 꿀꿀이 죽을 가지고 온다고는 하고 있지만, 일단은 사람들이 먹을만한 것은 다 골라 먹고 그 나머지만 돼지의 몫이 되곤 하였다.
4키로가 넘는 먼 길을 무겁게 들고 온 짬밥은 우선 큰 그릇에 쏟아놓고 종류별로 분류하게 된다. 그 속에는 먹다 남은 갖가지 건더기 즉, 소시지, 빈 깡통, 잼, 껌, 과자, 식빵, 햄……등 이름도 모를 별의별 바다를 건너온 외국 음식 찌꺼기들이 모두 다 그 속에 섞여 있었다.
심지어는 빈 캔, 담배 꽁초, 씹다 버린 껌 등,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한데 섞여 있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럽거나 지저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배가 그토록 고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건더기가 많은 것만 해도 고맙고 황송하게 생각하며 벌써부터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저절로 입에 군침이 도는 바람에 미리부터 입맛을 쩍쩍 다셔보기도 하였다.
정성껏 골라낸 소시지 햄 등의 건더기들은 바로 물에 헹구어 씻어낸 다음 바로 냄비에 넣고 약간의 양념을 넣어 끓여서 식구들이 다 같이 나누어 먹곤 하였는데 그 맛이 그렇게 일품일 수가 없었는데 그때의 그 기가 막혔던 기억을 지금까지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가 ‘부대찌개’란 음식이 크게 유행하더니 부대찌개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우후죽순처럼 불어나면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솜씨를 다해 요리가 잘된 부대찌개는 얼큰하면서도 특히 쌀쌀해진 날씨에 술안주로는 그만이다. 그리고 부대찌개는 대부분 ‘의정부 부대찌개’란 간판을 내걸고 서로 자기 가게가 원조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의정부 부대찌개란 명칭을 영업주들이 선호하게 된 것은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당시 의정부와 동두천에 미군 부대가 많았기 때문이었나 짐작해 보게 된다.
난 오래 전에 부대찌개란 과연 어떤 음식일까 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가서 정작 부대찌개를 보자마자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소시지 등을 넣어 먹음직스럽게 솜씨를 다해 정성껏 요리한 그 부대찌개가 바로 한국 전쟁 직후에 짬밥 통에서 퍼다가 집에서 끓여 먹던 바로 그 꿀꿀이죽과 요리 방법이 거의 흡사하다는 것을…….
난 그 뒤부터 그런 선입견 때문에 되도록 부대찌개를 일부러 먹으러 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때는 먹다 버린 음식 찌꺼기를 먹은 것이고, 지금의 부대찌개는 엄연히 깨끗한 재료를 써서 위생적으로 요리한 것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비위가 좀 약한 혹자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더러운 꿀꿀이 죽을 먹을 수가 있겠느냐며 너무 더럽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리며 구역질을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배고픔과 굶주림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의 느낌과 생각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누구나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딱 한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그 첫 번째가 배고픈 서러움일 것이다. 그건 실제로 양식이 바닥이 나서 며칠씩 굶다가 너무나 배고픔에 울어본 적이 있는 뼈저린 굶주림의 경험을 체험해 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에 찌들었던 우리 마을 사람들, 게다가 한국 전쟁 직후,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온통 파괴되고 잿더미가 되고 말았으니 먹을 것 또한 깡그리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누구나 오직 먹을 것만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곤 하였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란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대부분의 굶기를 밥먹듯 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며 목숨만 겨우 연명해 나가고 있는 가엾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배가 너무 고프다 보니 눈에 띄는 웬만한 것은 다 먹어치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산에서 캐낸 칡뿌리는 고급 먹을거리였다. 철에 따라 나오는 산나물이나 들나물 역시 고급 먹을거리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밖에도 먹을거리를 찾기 위해 쏘다니며 나무나 풀의 열매, 그리고 연한 풀이나 나뭇잎 등, 닥치는 대로 날로 먹어치우며 허기를 댈랬다. 그러다가 그것이 하도 냄새가 고약하게 나고 구역질이 날 정도로 먹기가 어려우면 도로 뱉아버리기가 일쑤였다.
봄이면 이제 막 새로 물이 오른 소나무 껍질을 벗겨 씹어먹을 수 있는 이른바 송기는 가장 인기 있는 좋은 먹거리가 되었다. 송화나 소나무의 씨도 좋은 간식거리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잠자리나 매미, 그리고 여치 잡아 구워 먹기, 개구리 잡아 구워 먹기, 심지어는 쥐를 잡아 구워 먹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못 먹는 것이란 없었다.
여름과 가을에는 수수깜부기, 보리깜부기, 목화송이 따먹기, 삘기 찔레 등 먹거리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어떤 사람은 집 벽에 바른 고운 흙을 긁어서 먹으며 허기진 배를 달래기도 하였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문득 혐오스러운 추억 한가지가 떠올라 그 이야기도 해보고 넘어갈까 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꿀꿀이죽을 먹는 것보다 더 지저분하고 혐오스러운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배가 너무 고프면 체면이고 뭐고 없게 마련인 것 같다. 배고픔을 견디기가 그만큼 더 어렵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시골의 우리 고향은 약 5~60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끼니 때마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나무를 해다가 반드시 아궁이에 불을 때야 했으며 그때마다 굴뚝에서는 어김없이 연기가 펑펑 피어오르곤 하였다.
“아, 저 집은 오늘도 저녁밥을 짓는 모양이구먼.”
가끔 마을 사람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집을 보면서 부러워하곤 하였다. 끼니때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만 보고도 어느 집은 양식이 떨어져서 굶고 있고, 어느 집은 양식이 아직 남아서 밥을 짓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며 연기가 나오는 것만 보고도 몹시 부러워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양식은 이미 바닥이 나서 비록 밥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부끄럽기도 하고 체면이 서지 않았던지 끼니때마다 아궁이에 애꿎은 군불이라도 지펴서 굴뚝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집들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며칠을 굶고도 먹은 척 체면을 세우기 위해 잇몸을 쑤시고 다녔다는 옛날 양반들의 모습을 따라서 흉내를 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런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곧 비가 올 것만 같은 날씨였다. 마을 공동 우물가에는 아낙네들 몇 명이 나와 빨래도 하고 요강을 깨끗이 부시는 일도 하고, 그나마 부럽게도 양식이 좀 있는 사람들은 보리쌀이랑 호밀도 씻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웬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우물가로 어슬렁어슬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는 길가에 있는 풀을 뜯어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개는 그나마 조금 먹거리의 여유가 있는 집의 개였다.
풀을 계속해서 뜯어 먹고 있던 개가 조금 뒤, 갑자기 먹은 것을 심하게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낙네 한 사람이 무얼 저렇게 토해내고 있는가 궁금한 마음에 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가게 되었다.
아아, 그런데 이런 횡재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개가 풀을 뜯어먹고 있다가 풀숲에 토해낸 것은 금방 뜯어먹은 풀잎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통 보리쌀이었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아낙네는 눈이 번쩍 띄었다. 그리고는 곧 풀숲에 개가 토해버린 보리쌀을 그릇에 정성껏, 그리고 알뜰하게 손으로 일일이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집으로 달려가서 깨끗이 잘 씻어낸 다음 물을 넉넉히 넣은 솥에 금방 주워온 보리쌀을 넣고 멀겋게 보리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뒤에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아낙네네 집에는 마침 며칠이나 굶은 가족들이 기운이 없어서 방에 축 늘어져 있었던 상태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낙네가 그날 멀겋게 쑨 보리죽을 한 그릇씩 퍼서 가족들에게 먹였더니 가족들이 그나마 기운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단다.
이 이야기는 요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만큼 배가 고팠던 시절에 있었던 일 그대로를 글로 옮긴 실화임을 밝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