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피란민 소녀의 슬픈 이야기]
6.25 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마을에는 북쪽에서 많은 피란민들이 내려와서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대부분 황해도에서, 평안도에서 그리고 함경도에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다. 가깝게는 경기도 장단 등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피란민들은 마을에서 따로 집을 짓고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아무 집에나 가서 방을 좀 같이 쓸 수 없느냐고 양해를 구하고 집주인과 같은 집에서 살곤 하였다.
집주인에게 특별히 방세를 지불하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집주인이 피란민 가족들의 인상을 보고 같이 살아도 별 탈이 없이 무난하겠다 싶으면 같이 살기로 하고 건넌방이나 사랑방 한 칸을 선뜻 내주곤 하였다. 그러면 그날부터 그 집에서 1년이고 2년이고 마냥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때는 주인은 물론이고 피란민들도 방세라는 말조차 아예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피란민들은 방세 걱정 없이 언제까지나 그냥 공짜로 살아갈 수 있는 인심이 넉넉한 좋은 시절이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은 마을 앞에 논을 두고 양쪽으로 약 5, 60채의 초가집들이 이마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그런 마을이 전쟁이 일어난 뒤부터는 피란민들에게 방을 내주다 보니 아마 한 지붕 두 가구나 세 가구가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200가구 이상이 함께 북새통을 이루며 더불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방을 쉽게 얻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오래 같이 살아갈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건 주인이 나가라고 해서가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적군이 쳐들어오게 되면 다시 피란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 같이 피란 생활을 하다가 국군이 진격해 오게 되면 다시 고향이라고 돌아와서 다시 같이 살아가곤 하였다. 물론 피란을 갔다가 그곳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정착한 피란민들도 더러 있긴 하였지만…….
그렇게 3년 여의 긴 피란 생활이 이어지다가 정확히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인해 일단 전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우리 마을로 내려왔던 피란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우리 마을에 눌러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전선이 가로막혔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휴전이 된 이후에도 우리 마을에 그냥 눌러사는 사람들 중에는 황해도에서 내려온 젊은 부부도 있었다. 그들 부부에게는 두 딸과 피란 중에 낳은 아들까지 모두 3남매를 기르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딸이었다. 그리고 젖먹이인 막내가 피란 중에 낳은 귀한 아들이었다.
전쟁이 일단 끝나고 휴전이 되자 학교도 온통 폭격을 맞고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개학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젊은 부부의 큰딸도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마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교라고 가봐야 교실은 모두 불타버리고 운동장도 폭격을 맞아 커다란 웅덩이가 듬성듬성 파인 폐허나 다름없었다. 그런 중에도 선생님들은 운동장 한쪽 구석에 학생들을 앉혀놓고 공부랍시고 가르치게 되었다.
땅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앉았으며 책상이나 칠판도 없었다. 교과서도 없고 필기도구도 마땅치 않아 대부분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만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처럼 열악한 환경이다 보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한창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비라도 쏟아져 내리게 되면 아예 집으로 돌아가거나 학교 부근에 있는 어느 집으로 달려가서 비를 긋곤 하였다. 그건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기에 공부시간이 따로 없었다. 첫째 시간도 없고 둘째 시간도 없었다. 선생님이 조금 가르치다 그만두면 그때가 공부가 끝나는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학교가 아니라 엿장수 맘대로요, 개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학년도 반도 따로 없었다. 그저 3학년이건 5학년이건, 모이는 대로 한 자리에 앉아 선생님이 가르치는 대로 아무 과목이나 들으며 배우고 있었으니 그 공부가 오죽했으랴.
황해도에서 피란을 내려온 그 젊은 부부가 처음에는 우리 집 바로 옆집 사랑방 하나를 얻어 살게 되었다. 그렇게 몇 해를 살다가 뭐가 불편했는지 주인과 뜻이 맞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그들 부부가 우리 동네 건넌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어느 집 건넌방이나 사랑방이 아니었다. 동네 길가에 아주 허름하게 집을 하나 짓더니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아주 작은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이 전부인 아주 보잘것없고 허름한 집이었다.
그 집은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어쩌다 방문을 열고 있을 때는 방 안에 있는 세간살이들이 등 그 모습들이 손에 잡힐 듯이 훤히 보이곤 하였다.
피란민들 모두가 그렇듯 그 집 부부 역시 기회만 있으면 남의 집 품팔이를 부지런히 다녔다. 부부가 모두 일을 하러 나가게 되면 그동안 막내아들인 갓난아기는 자연히 어린 누나들이 보살펴 주게 되었다.
그렇게 늘 하루하루 고생을 하면서 말 그대로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면서 그날그날을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겨울철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봄과 늦가을까지는 그런대로 남의 집 일이라도 해가며 겨우겨우 살아갈 수 있었지만, 겨울철에는 그나마도 일거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겨울철에는 일감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놀고 앉아서 양식만 축낼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양식이 떨어지면 할 수 없이 끼니를 거르는 것은 물론,하루나 이틀씩 굶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나 이틀씩 굶다 보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직 먹을 것 즉, 밥 외에는 그 아무것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가끔은 염치불구하고 그나마 양식이 좀 있는 집에 가서 봄이 되면 일을 해주기로 하고 약간의 곡식을 얻어다 먹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소문을 듣고 보니 그 집 큰딸인 분옥(가명)이가 보통 아이들과는 매우 달랐다. 아주 대단한 아이었다.
분옥이는 까마잡잡한 피부에 키가 작고 야무진 체구였다. 평소에 말을 잘 하지도 않았다. 누가 먼저 말을 시키거나 물어봐야 겨우 대답만 할 정도였다.
분옥이가 대화를 잘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집 식구들과도 마찬가지였다. 동네 친구들과도 여간해서는 잘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 시절에 아이들이 모이기만 하면 어울려 즐겨 놀던 고무줄놀이나 공기놀이, 그리고 사방치기 등도 전혀 하지 않고 언제나 외톨이로 혼자 조용히 지내곤 하였다.
분옥이가 대단한 아이라는 것은 말을 잘 하지 않거나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사시사철 갈퀴와 낫, 그리고 새끼줄을 들고 나무를 하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늘 혼자 산으로 올라가곤 하였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었다. 정말 보통 아이들과 다른 특이하고도 다부진 아이였다.
추운 겨울이나 여름, 그리고 사철을 가리지 않았다. 부모가 시킨 일도 아님에도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저 혼자 스스로 그냥 묵묵히 나무를 하러 다녔던 것이다.
분옥이가 나무를 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갈 때는 항상 낫과 갈퀴, 그리고 새끼줄을 가지고 올라가곤 하였다. 그리고 산에 오르면 나뭇잎을 갈퀴로 긁거나 삭정이가 된 나뭇가지를 꺾어 모아가면서 부지런히 나무를 했다.
그리고 머리에 이고 올 만큼 나무가 모이면 새끼줄이나 전화선으로 묶어 머리에 한짐 잔뜩 이고 집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그렇게 해온 나무들은 그 오막살이 집 옆에 어김없이 쌓아놓곤 하였다. 그 바람에 겨울철이면 동상이 걸린 분옥이의 두 손은 퉁퉁 붓고 이리저리 갈라지고 말이 아니었다.
오전에 나무를 한 짐을 해 가지고 집에 와서 점심이라고 요기를 하고 나면, 오후에도 다시 나무를 하기 위해 어김없이 다시 산에 오르곤 하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인지 생각해 볼수록 참으로 다부지고 무서운 아이였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자 그 집 옆에는 그동안 분옥이가 해온 나뭇단들이 제법 높게 쌓이게 되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굶주리며 힘든 시절, 그런 힘겨운 시절이었지만, 그나마도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겨울철만 돌아오면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 앉아 노름판을 벌이곤 하는 것이 한때 유행이기도 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으레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에 모여 앉아 밤을 꼬박 새워가면서 매일 노름판이 어김없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 노름이 때로는 그 이튿날 하루 종일 지속되기도 하였으며, 결국은 그런 가난 속에서도 노름에 미쳐 결국은 돈을 너무 잃고 어쩔 수 없이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논이나 밭뙈기를 팔아버리게 되어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때 겨울철만 되면 분옥이 아버지도 노름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노름 밑천은 어떻게 구해서 그렇게 노름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소문을 들어보니 분옥이 아버지는 특별히 노름솜씨가 뛰어나서 그런지, 아니면 운이 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화투에 손을 댈 때마다 남달리 기분 좋게 돈을 따곤 하였다. 그래서 분옥이 아버지는 그때부터 틈만 나면 화투를 하는 노름꾼이 되고 말았다.
화투를 하여 돈을 딸 때마다 그는 벼와 보리쌀을 사들이곤 하였다. 그리고 그런 곡식을 사는 대로 자랑스럽게 그 좁은 방 윗목에 높다랗게 쌓아놓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이었다. 분옥이 아버지는 노름돈을 많이 번 날이면 으레 읍내 장에 가서 큰맘 먹고 고기도 좀 사고, 아이들이 입을 옷가지도 식구 수대로 몇 벌 사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식구들은 너무 좋아서 입이 쩍 벌어지곤 하였다. 철없는 동생들은 아버지가 사다 준 장갑이며 옷을 입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분옥이만은 그게 아니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버지가 노름으로 돈을 벌어올 때마다 좋아하기는커녕 오히려 시무룩한 표정을 짓곤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다 준 옷은 절대로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고기도 먹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그 집 식구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화투를 해서 벌어온 돈은 떳떳하게 벌어온 돈이 아니어서 그게 싫었다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참으로 맹랑하고 대단한 아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동생들이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가 사다 준 옷을 입고 자랑하는 걸 보기가 무섭게 부끄러운 줄 알라고 오히려 야단을 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계혹 흘러감에 따라 그 집 방에는 아버지가 노름을 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사온 곡식들이 그득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그 쌓이는 곡식더미를 보기만 해도 가족들은 배가 부르고 흐뭇하였으리라.
한편, 그 집 바깥에는 분옥이가 매일 해오는 나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가며 성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1,2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곡식이 쌓이고 나뭇단이 성을 이루고 있었지만 분옥이는 그 정도로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돈을 더 벌기 위해 갑자기 서울로 식모살이를 가게 되었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지게 되었다. 누가 소개를 시켜줘서 가게 되었는지 분옥이 스스로 식모살이를 할 집을 찾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딸린 식구들이 많은 집은 워낙 양식이 부족해서 단 한 명이라도 밥을 먹는 식구를 덜기 위해 식모살이를 보내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였다. 아마 그때 분옥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쯤 된 어린 나이였다.
결국, 어린 나이에 서울로 식모살이를 가게 된 분옥이는, 한 달에 한 번씩 집으로 내려오곤 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내려올 때마다 그동안 식모살이를 해서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부모님 앞에 내놓고 가곤 하였다.
그렇게 딸은 식모살이로, 아버지는 화투로 돈을 벌다 보니, 그 어렵던 가정은 그런대로 형편은 차츰 전보다 여유롭게 되었다. 아마 그렇게 두어 해가 흘렀을 때였나 보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생긴다고 하지 않았던가.
화투를 손에 댔다 하면 늘 돈을 따기만 하던 아버지가 어떻게 된 일인지 그때부너는 돈을 잃기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리 따보려고 머리를 써가며 노름을 해보았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번번이 돈을 잃곤 하였다.
노름에 한번 손을 대면 그 습성이 그렇듯 누구든 돈을 잃고 나면 본전이라도 도로 찾고 싶은 생각에 좀처럼 화투를 손에서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욕심에 또 하다 보면 돈은 점점 더 잃게 마련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있던 분옥이가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우선 방에 쌓아두었던 그 많던 곡식 자루들이 푹 줄어든 것이 분옥이의 눈에 띄었다. 사연을 듣고 보니 그동안 아버지가 노름으로 돈을 잃어서 곡식을 모두 내다 팔았다는 것이었다.
분옥이는 아무 말 없이 한숨만 쉬고 있었다. 아버지가 새삼 한심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은 큰맘 먹고 아버지에게 제발 화투를 그만두라고 매달리며 애원을 해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린 네가 뭘 안다고 그러느냐며 그리고 넌 그런 걱정 말라며 그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서울로 올라갔던 분옥이가 다시 집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이번에는 그 많던 곡식 푸대가 모두 사라지고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 바깥에 분옥이가 몇 해 동안 고생을 해서 해서 쌓아두었던 나뭇단들도 모두 말끔히 사라진 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동안 분옥이가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서 내놓았던 돈도 모두 바닥이 나고 지금은 오히려 빚을 지고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화투로 그만 모두 말아먹고 빈털터리가 되고 만 것이었다.
분옥이는 분하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혼자 가만히 앉아 소리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저기 뒷산에 사람이 죽었어요! 사람이……!”
갑자기 밖에서 동네 사람들이 술렁이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놀란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우르르 뒷산을 향해 올라가게 되었다.
아아! 세상에 이런 끔찍한 비극이!
분옥이네 집 바로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산 위에는 족히 몇백 년은 묵었음직한 커다란 전나무가 한 그루가 마을을 내려다 보며 서있었다. 그 전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린 아이,
아아! 그것은 바로 분옥이었던 것이다.
정말 생각해보면 생각할수록 지금도 가슴 아픈 추억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분옥이 나이 겨우 열다섯 살이나 겨우 넘었을까 말까 한 어린 나이였다.
이 땅에 전쟁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리고 가난만 아니었어도 그런 끔찍한 비극은 없었을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