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작동화

엄마가 되고 싶은 아이

[내가 엄마가 되면...]

by 겨울나무

“은아야, 문 좀 열어 봐! 아, 어서 냉큼 열지 못하겠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활짝 열려 있던 은아의 방문이 어느 틈에 안에서 잠겨진 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할머니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계속 흔들면서 조금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칩니다.

"얘, 은아야, 어서 문 좀 열라니까. 너 이 녀석 또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구나?”


할머니는 보나마나 미리부터 짐작이 가는 데가 있습니다. 방문이 슬그머니 안에서 잠겨 있는 걸 보면 지금 할머니 몰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엄마나 아빠, 그리고 할머니한테 야단을 맞을 것 같은 일을 벌일 때마나 영락없이 으례 방문을 안에서 꼭 잠근 채, 말썽을 부리곤 했던 은아였으니까요.


“할머니, 그럼 문 열어 줄께 나 야단치지 않는다고 약속해, 알았지?”


한참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은아의 조금 겁에 질린 맹랑한 목소리가 방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래, 그래, 알았어요. 걱정 말고 어서 문부터 열어 달라니까.”


할머니의 조금 누그러진 듯한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은아는 겨우 안심이 된 듯 방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방으로 들어선 할머니는 방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진 화장품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금방 두 눈이 둥그래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너 지난번에도 엄마한테 그렇게 혼이 나고 그래도 모자라서 또 이 모양이니?”

할머니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방바닥에는 엄마가 쓰던 콤팩트, 브러시, 로션, 립스틱 등 화장품들이 제멋대로 뒤범벅이 된 채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할머니가 더욱 어처구니가 없게 된 것은 화장품을 제멋대로 발라 뒤범벅이 된 은아의 도깨비 같은 얼굴 때문이었습니다.


좀 더 예뻐지려고 화장품을 바른 은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눈썹을 그리고 눈두덩에는 눈화장을 시퍼렇게 하였습니다. 영양 크림과 로션을 듬뿍 바른 얼굴은 번질번질하게 윤이 나고 입술에는 제법 연분홍색 립스틱까지 벌겋게 칠해 놓았습니다.


아니다 다를까. 할머니의 짐작이 꼭 맞았습니다. 은아는 방문을 꼭 걸어 닫고 할머니 몰래 지금까지 화장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 나 이쁘지? 근데 엄마한테 말하면 안 돼, 응?”


한동안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던 은아는 조금 겁이 났는지 싱그레 웃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니, 너 어쩌자구 이 모양이니? 이 비싼 화장품들을 모두 이 모양으로 해 놓았으니 엄마가 알면 정말 야단나겠다.”


화장품으로 온통 뒤범벅을 하여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된 은아의 모습은 정말 그런 꼴불견이 따로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입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흩어져 있는 화장품들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한테 얘기하지 않을테니 넌 어서 나가서 얼굴이나 닦고 오렴. 엄마, 아빠가 들에서 오기 전에 빨래를 끝낸 다음에 얼른 점심밥을 지어 놓으려고 했는데 은아 때문에 다 글렀나 보다. 에이구, 은아 때문에 정말 속상해 못살겠다니까.”


은아는 화장품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방바닥에 걸레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서 나가서 말끔하게 씻고 오라니까 왜 그렇게 장승처럼 서서 바라보고만 있는 게야? 얼굴을 닦지 않으면 엄마한테 들킨다니까.”

그러나 은아는 할머니의 말은 들은 채도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딴청을 부립니다.


“할머니, 나 소꿉놀이하고 와서 얼굴 닦으면 안 돼? 친구들 하고 소꿉놀이하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소꿉놀이를 하더라도 어서 그 보기 싫은 얼굴이나 닦고 가서 놀아도 되지 않니, 이 맹꽁이 아가씨야.”


“그건 안 돼! 내가 이번에는 소꿉장난에서 엄마를 하기로 했단 말이야.”

“에이구, 난 뭐가무슨 소린지 당최 알아듣지를 못하겠으니 엄마를 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하렴.”


할머니는 이렇게 대꾸하고는 바쁘다는 듯 방구석에 쌓여있던 빨랫감을 들고는 급히 밖으로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은아는 금방 신바람이 나서 덩달아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친구들을 만나 다시 재미있는 소꿉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장품.jpg

이웃에는 은아와 같은 또래의 친구 두 명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남이, 그리고 또 하나는 소영이입니다. 세 명 모두가 내년에나 학교에 갈 나이입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모이고 밥만 먹으면 서로 만나 사이좋게 지내는 다정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은아의 또래들이 요즈음에 와서 부쩍 재미를 붙이고 노는 놀이는 소꿉놀이입니다.


셋이 모이기만 하면 영남이는 아빠가 되고, 은아나 소영이는 엄마 아니면 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꿉놀이를 할 때마다 서로 제가 엄마가 되겠다고 우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딸이 되는 것은 서로 싫다고 버티기가 일쑤입니다. 같은 나이에 하나는 엄마가 되고 또 하나는 딸이 돼야 하니 서로 우기고 버티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아가 문득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얘, 다음부터는 싸움을 하지 말고 화장을 예쁘게 한 사람이 엄마가 되는 게 어떻겠니?”

“그래그래, 그게 정말 좋겠다!”


그러자 영남이도 소영이도 손뼉을 치며 대뜸에 찬성을 하였습니다. 소영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날부터 은아와 소영이는 집에 와서 틈만 나면 엄마 몰래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화장을 예쁘게 잘 해야 소꿉놀이에서 엄마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저녁때였습니다.


하루종일 소꿉놀이 재미에 팔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은아는 우선 부엌으로 들어가서 엄마의 눈치부터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나 오늘도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왔어."

“오! 그랬구나. 그런 점심은 어떻게 하고?”


어쩌면 야단을 맞을 줄 알고 잔뜩 겁을 먹고 있던 은아는 뜻밖에도 엄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우선 마음이 놓였습니다.


“점심은 대충 먹었구, 엄마, 근데 나 오늘 소꿉장난에서 엄마를 했어.”

“우리 은아가 엄마를 했다구? 그래, 엄마가 되는게 그렇게도 좋았니?”

"그러엄, 좋구말구. 엄마는 내가 얼른 자라서 엄마 되는게 싫어?”

은아는 신바람이 나서 목소리도 점점 더 커집니다. 전히 신이 나서 물어봅니다. 그런데 엄마는 이상합니다.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은아가 얼른 크게 자라는 건 좋지만, 네가 자라서 엄마가 되면 엄마는 그땐 꼬부랑 할머니가 되거나 죽어 없어지고 말게 된단다.”


엄마의 설명을 들은 은아의 표정이 금방 어둡게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면 엄마가 그땐 할머니가 되거나 죽는단 말이지?”

“아암, 그렇고말고.”


“엄마, 그럼 난 앞으로는 화장도 안 하고 소꿉놀이에서 엄마도 안 할 거야. 그리고 엄마 죽으면 나도 술이나 실컷 마실 거야.”

"아니, 술을 실컷 마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엄마가 저번에 아빠한테 그랬잖아, 술을 많이 먹으면 빨리 죽는다고. 엄마가 죽게 되면 나도 술 많이 먹고 엄마하고 같은 죽을 거란 말이야.“


은아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욱 시무룩해지면서 어둡게 굳어지고 있었습니다.


“오호, 그래그래. 엄마가 은아한테 못할 말을 하고 말았구나. 엄마는 죽지 않고 우리 은아하고 아주 오래오래 살 거란다.”


엄마는 물에 젖은 손을 얼른 앞치마에 닦고는 귀엽고 사랑스러워 못 배기겠다는 듯 은아를 꼬옥 껴안아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은아는 그런 엄마의 품이 그렇게 아늑하고 포근한 수가 없었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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