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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ul 04. 2020

스파르타와 페스탈로치

♣  스파르타식 교육       


스파르타는 기원전 9세기와 8세기경에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부에 위치한 유로스타스 강 서쪽 연안에 있는 도리아인이 세운 그리스의 고대 도시 국가이다     


그들은 소수의 도리스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였으며 노예계급인 헤틸로타이가 지배계급의 20배가 넘었다이에 그 많은 노예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체제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무식하다 할 정도로 끔찍하고도 무서운 교육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럼 과연 얼마나 끔찍하고도 무서운 교육을 펴나갔을까?     


첫째     


일단 아기가 출생하면 바로 국가가 인정하는 검사관 5명이 아이를 검사하도록 되어 있었다이때 검사 결과 아기에게 장애가 있거나 몸집이 너무 작으면 전투에서 싸움을 할 수 없는 즉군대로써 전혀 가치 없는 생명이라는 판단하에 바로 절벽으로 데리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 얼마나 무식하고 끔찍한 만행이란 말인가아무리 어릴 때 체구가 작다 해도 커서는 싸울 수 있는 건강한 체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가차 없이 태어나자마자 죽였다니 얼마나 무식한 정책이었는가


그리고 일단 아기가 검사에서 합격하여 부모가 당분간 집에서 기른다 해도 아기의 생명이 두렵고 안심을 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부모가 자기 아기를 때에도 위험하기는 마찬기지이다아기가 어느 정도 땅바닥을 기어다닐 정도가 되면 부모는 그 아기를 앞마당에 갖다 내려놓게 된다그리고 방에 가만히 앉아서 아기가 언제까지라도 방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게 된다     


그때마당에 혼자 남겨진 아기가 울며불며 결국 방에까지 기어들어오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방에까지 기어서 들어오게 되면 과연 이건 내 자식이라고 칭찬을 하고 기뻐하며 계속 기르게 되고아기가 마냥 울기만 하고 방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이건 아무래도 내 자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인정한 나머지 역시 낭떠러지로 데리고 가서 내던져 죽였다는 무식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여자아기는 몸의 건강이나 체구와 상관없이 생식기관만 이상이 없다면 대부분 살려두었다그러나 여자가 16세가 지나도 멘스를 하지 않게 되면앞으로 전쟁에서 싸울만한 튼튼한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이 역시 아무 쓸모 없는 여자라 여기고 멀쩡한 여자아이를 역시 절벽으로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둘째     


검사에서 합격하여 일단 무사히 살아난 아이들이 7살이 되면 의무적으로 전원 아고게‘ 라는 교육기관에 입소하여 그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아고게'에 입소했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고게는 학년제와 학급제를 기본으로 편성하여 운영하였으며 애국심과 강한 체력을 갖추고 오직 국가에 봉사하는 인재를 키우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이것이 바로 이른바 스파르타 교육인 것이다     


아고게에 입소하게 되면 바로 입소하자마자 옷을 모두 벗기고 온몸에 피가 날 정도로 채찍질한다그리고 그다음에는 가시를 섞어 만든 풀 침대에서 1주일 동안 잠을 자야 하는데 그것도 잠이 드는 즉시 가시에 찔려 잠을 잘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무식한 교육은 그 당시 적절한 위생이나 소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건강하고 멀쩡한 아이를 오히려 각종 감염으로 죽일 수도 있는 무식하고 미련한 짓이었음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셋째      


용케 살아남아 일주일의 합숙이 끝나면 16세까지 매일 10시간의 군사훈련과 6시간의 공부를 시켰다싸움을 할 때 생각이 많게 되면 싸움에서는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 수준 높은 학문은 가르치지 않았다따라서 스파르타의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지식이 별로 없는 돌대가리들 뿐이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에는 일본군 역시 이와 비슷한 이유로 대학생은 징집하지 않고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들만 징집했는데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넷째      


그런 험한 교육과정을 시키는 중에도 16세가 되기 전까지는 매년 1번씩 끔찍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피부를 단련시켜야 더욱 건강하고 튼튼한 사나이로 성장한다는 목적하에 고문에 가까운 심한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일단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패는 일이었다그다음으로는 벌거벗은 몸에 끓는 물을 퍼붓는 일이었다그리고 자갈밭을 구르게 하여 피부를 터뜨리기도 하였다그리고 그렇게 해서 달구어진 몸을 찬물에 들어가 식히도록 하였다이 참혹한 교육으로 인해 멀쩡했던 아이들이 파상풍과 충격을 받아 수없이 죽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교육과정을 다행히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16세가 되면 마침내 그제야 전사의 상징인 붉은 망토를 받게 된다.       


그리고 16세부터는 매일 아침과 점심을 훔쳐서 먹게 하고 저녁만 해결해 주었다이때 아침과 점심밥을 훔치다 들키게 되면 죽도록 두드려 맞았는데훔친 게 죄여서 맞는 게 아니라 들킨 것이 큰 죄로 여기고 두드려 팬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이때 노예의 음식을 훔쳐먹다가 들키게 되면 그 노예를 죽여도 죄로 인정하지 않았다오히려 반란 위협을 걱정하여 힘이 강한 노예라고 인정될 경우 그 노예를 죽이도록 부추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 피눈물 나는 생사의 과정을 거쳐 다행히 20살까지 살아남게 되면 10년간 군대에 복무하고, 30살 후에도 매일 저녁은 부대에서 먹으며 의무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예비역으로 지내고, 50살이 돼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끔찍하고 무서운 교육을 견디어내면서 50살까지 살아남기란 매우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래서 그런 교육을 인내하고 참아가면서 50살까지 살아남은 남자들은 지혜와 경험을 거친 자로 인정을 받아 그 사회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그들도 지금까지 펼쳐온 과정들이 무식한 짓이었다는 것을 인식했는지 왕의 후계자들은 아고게 교육을 견디다 못해 죽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 아래 아고게 교육에서 제외시키기에 이르렀다.       


결국스파르타식 교육이란 알고 보면 끔찍할 정도로 힘들고 무식한 과정이라는 결론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부끄러운 역사라 하겠다             


  

♣ 페스탈로치(1746~1827)교육     


 

스위스의 교육학자이며 빈민교육을 주창였으며학생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도록 고안된 교수법을 강조했다.     


페스탈로치의 방법론은 널리 인정받았으며대부분의 그의 교육 원리는 현대 초등교육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페스탈로치의 교육 신조는 어디까지나 그 모두가 사랑의 교육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수업은 어디까지나 학생들이 익숙한 곳그리고 익숙한 것에서 새롭게 진행되어야 하고구체적인 예술 행위와 실제적인 정서적 반응의 경험 등을 결합해야 하며점진적으로 나타나는 아동의 발달단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교육 사상은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마리아 몬테소리존 듀이그리고 최근의 장 피아제와 언어 경험 접근의 주창자인 R.V. 알렌과 같은 조류이다(교육학). 페스탈로치의 교육과정은 에밀 Émile에 나타난 장 자크 루소의 구상을 어느 정도 본뜬 것이기는 하지만개인적인 암송학습보다는 집단학습을 강조했고그림 그리기글쓰기노래하기체육,모형 만들기수집지도 만들기현장학습 등 갖가지 참여활동에 초점을 두었다.     


그 당시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그의 사상은 개인차를 인정하고 나이보다는 능력에 따라 학생들을 분류하며 과학적인 접근으로서 공식적인 교사양성을 장려할 것 등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페스탈로치는 스위스의 정치적 상황과 루소의 교육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젊은 시절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기위해 신학 공부를 포기하고 1769년 아아레 강 근처에 버려진 땅(노이호프)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1774년 농사 일에 실패하자 빈민 아동들을 집으로 데려와 방적과 베짜기 등의 노작과 함께 동시에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교육에 힘썼다.     


결국그 일도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귀중한 경험을 얻기도 하였다     


그 후스위스 정치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으나 여기서도 그의 꿈이 좌절되자 그는 저작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그의 저서 내용을 살펴 보면 교육은 어디까지나 자연에 따라야한다는 것가정의 안정은 인간 행복의 기초라는 그의 기본이론의 윤곽을 제시했다그리고 소설 라인하르트와 게르트루트>에서는 '민중'을 위해 쓴 것으로서독일 전원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이 책은 한 이상적인 여성이 부패한 관행들을 폭로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그녀의 올바른 가정생활을 통해 마을의 학교와 지역사회에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초기교육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그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후페스탈로치는 노이호프 지역에서 30년 동안 고립되어 살아가면서빈민들의 생활 개선책을 제시하고 교육·정치·경제에 관한 많은 저작들을 냈다그러나 그의 제안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기 때문에 점차 힘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육이란 어디까지나 사람들에게 스스로 사고력을 개발시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후페스탈로치는 프랑스가 스위스에 세운 헬베티아 공화국에서 그를 초청하여 고등교육을 조직하도록 제의함에 따라 프랑스 혁명 이후 50세의 나이에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초등교육부터 시작했으며그 일은 버림받은 전쟁 고아들을 모아서 혼자 힘으로 돌보고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그들의 도덕성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에 힘썼다.     


이 일로 안해 슈탄스(1799)에서 몇 개월간 힘든 생활을 해야 했지만그는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회고했다.     


페스탈로치는 1800~04년 부르크도르프에서 한 교육기관을 맡아보았고, 1805년부터 1825년까지는 뇌샤텔 근처 이베르동에서 기숙학교를 감독했다.


두 학교 모두 몇몇 가난한 학생들도 다녔지만 대부분 학생들이 내는 수업료에 의존하고 있었는데그는 이 기관을 통해서 3영역으로 나누어지는 자신의 교육방법인 지적·도덕적·신체적 영역특히 직업교육과 시민교육을 실험할 수 있었다.     


이들 학교는 그의 ''이었던 산업학교(빈민학교)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이베르동의 학교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어 여러 외국 방문객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학생들이 몰려들기도 하였다그리고 프리드리히 프뢰벨, J. F. 헤르바르트카를 리터 같은 교육자들이  많은 감명을 받아 계속 머무르면서 페스탈로치의 교육방법을 연구했고 나중에는 자신들의 교수법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보조자들이 수업을 맡아주었고 페스탈로치는 학교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계속 자신의 교육방법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이베르동에 감돌던 가족정신도 교사들 사이에서 점차 격렬해지는 논쟁 때문에 몇 년 후에는 사라져버렸다이 논쟁은 페스탈로치 측에서 먼저 제기한 것이었다페스탈로치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빈민학교는 자신의 저작을 발간한 수입으로 설립되었으나 결국 2년밖에 지탱할 수 없었고이베르동 학교가 그 명성과 학생들을 동시에 잃게 되자 페스탈로치는 몹시 실망했다.     


페스탈로치는 결국 어떻게 해서라도 이 학교만은 회복시켜보라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그  노력도 결국 헛되이 끝나고 말았다     


1825페스탈로치는 결국 안타가운 마음을 간직한 채 소수의 학생만을 데리고 노이호프로 돌아갔으나 결국에는 자신의 교육사상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페스탈로치그의 교육은 결론적으로 깊은 감화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동료들까지 그를 몹시  존경하게 되었다그의 교육 사상은 정치경제철학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교육방법론'은 전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페스탈로치의 일화     


스위스의 번화한 거리에서 웬 노인 한 사람이 땅바닥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그리고는 가끔 무언가를 주워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곤 하였다아까부터 그 광경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관이 가까이 다가가서 묻게 되었다.       


영감지금 무얼 그렇게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있는 거요?”

이거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노인은 어물쩡거리며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요무슨 물건을 주웠다면 당연히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더욱 의심을 하게 된 경찰관이 주머니에 있는 것을 모두 꺼내보라고 명령하게 되었다   

  

노인은 할 수 없이 주머니에 있는 물건들을 털어놓게 되었다그건 대부분 깨진 유리 조각이거나 날카롭고 작은 쇠붙이들이었다이에 으아하게 여긴 경찰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아니이건 모두 유리 조각이나 쇠붙이들 아닙니까그런데 이런 걸 왜 줍고 다니시는 겁니까?”     


그러자 노인은 다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리 조각이나 쇠붙이가 맞습니다이런 걸 그냥 두게 되면 혹시 아이들이 다니다가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덕분에 거리도 좀 깨끗해지고요헛허허…….     


그 노인이 바로 페스탈로치였던 것이다페스탈로치는 평소에도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오늘날 페스탈로치 교육의 영향을 받은 전 세계인들은 오직 사랑의 교육에만 치중하고 매달리고 있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본다스카이캐슬도 좋다


그러나 무작정 자녀 사랑은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진부한 사실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무작정 사랑을 주기보다는 때로는 조금은 무식해 보일 정도로 스파르타식 교육 방법을 어느 정도 가미해서 좀더 강하게 키우는 방법도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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