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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Jun 28. 2020

지나가버린 방황의 나날들(5)

추억의 스타 다방과 태극 다방     


그 무렵 충무로 3가 골목에는 스타 다방과 태극 다방이 골목 양쪽에 서로 마주 보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골목에 늘어선 상가들은 무슨 경쟁이라도 하듯 상가 앞마다 성능 좋은 커다란 스피커를 세워 놓고 항상 대중가요들이 쩌렁쩌렁하고 요란스럽게 흘러나오곤 했다.   

   

스피커마다에서는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현미의 노래 ’검은 상처의 부르스‘가 여기저기서 한창 흘러나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이따금 그 노랫소리가 내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 두 다방은 늘 단골손님들로 인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일찌감치 자리 하나를 맡아 떡 버티고 앉아 거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매일 그러고 있는 걸 보면 거기가 직장이고 일터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쩌다 운이 좋아 다방에 들어갔다 해도 늘 만원이어서 비좁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다방에서 꼭 볼 일이 있는 사람들은 밖에 서서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자리가 나면 들어가곤 하였다.      


이 다방에 드나드는 손님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계있는 스탭진들이거나 배우, 그리고 가수 등 주로 연예인들이 섭외를 하기 위해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다방 안에 들어가 보면 사람들은 물론이고, 담배 연기로 인해 늘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자욱한 연기로 가득했다.  

     

크랭크 인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여싿. 그래서 가끔 별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날 일이 있을 때마다 불편하긴 했지만 그 다방을 자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혹시 내가 다방에서 볼 일을 마치고 나오게 되면 그때마다 으레 밖에서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 남녀들이 내게로 우르르 모여들곤 했다. 그리고는 바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 영화사 조감독님이시죠?”      


내가 어리둥절해진 표정으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으레 그들은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시간은 좀 내줄 수 없느냐며 매달리곤 하였다. 


그들의 용건은 간단했다. 이번 영화에 단역이나 엑스트라도 좋으니 딱 한 번만이라도 출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부탁 정도가 아니라 끝까지 끈질기게 매달리며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처음에는 그들이 어디까지 따라다니며 매달리는 바람에 제법 어깨가 으쓱해지고 저절로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내가 거리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벌떼처럼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나한테 그렇게 매달린다고 그냥 쉽게 될 일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럴만한 권한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대부분 내 권한 밖의 일이었으며 그 권한은 모두 감독이 쥐고 있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어떤 배역에 꼭 어울리겠다고 하더라고 그때마다 그 사람을 감독에게 데리고 가서 일일이 승낙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또 배역은 어디까지나 대본에 나온 대로 출연할 인원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어떤 사람이 마음에 쏙 든다고 해도 무작정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들을 피해 다니는 것도 여간 신경이 쓰이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마침 누군가를 만날 일이 있어서 난 태극 다방에 미리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전혀 낯모르는 아가씨 하나가 다가오더니 공손히 인사를 하며 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내 앞자리에 잠깐 앉아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른 그러라고 승낙을 했다. 그러자 아가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소개부터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현재 모 여자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지난 3개월간 다섯 개 영화에 이미 출연을 해본 경험이 있다고 하였다. 그 모두가 잠깐씩 출연하는 엑스트라에 가까운 단역들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모 감독이 주연을 시켜주겠다며 그 대신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될 그 무엇인가를 감독이 요구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마디로 거절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마침 내가 소속한 영화사에서 새로 작품을 입봉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달려오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배역을 줘도 연기에 자신이 있으니 어떤 배역도 좋으니 자리를 하나 내줄 수 없느냐는 부탁이었다.   

   

이미 우리 회사에도 배역이 모두 정해진 터여서 난 몹시 난감했다. 하지만 난 회사의 모든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 지금 사정이 이러니 기회가 닿으면 다음 작품에서나 한번 다시 뵙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다.

      

지금 배역이 이미 모두 정해졌다 해도 그들 대신 자신을 써줄 수는 없느냐고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무슨 연기라도 자신이 있다며 갑자기 내게 큐(cue)를 한번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몹시 놀랐을 때의 표정을 한번 연기해 보여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큐 신호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한 손을 입가에 대더니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입도 크게 벌린 채 “어머!” 하는 소리와 함께 놀라는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다방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그때 난 몹시 민망했지만 그는 조금도 그런 기색이나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워낙 배짱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연기에 미쳐서 그런 것인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끝내 그 아가씨는 회사 사정상 그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처럼 출연하기를 갈망했었는데……. 나도 공연히 미안하기도 하고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드디어 영화가 개봉되다     


그 뒤로 일사천리로 촬영이 진행되며 분주히 뛴 결과 마침내 영화 한 편이 개봉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숱한 우여곡절 끝에 약 1년여의 시일이 걸렸다.    

  

영화가 개봉되자 감독은 오직 관객 수를 파악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주연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가 성공을 거둘지 그렇지 않게 될지는 오직 관객 수에 달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그들에게는 흥망이 엇갈리는 피를 말리는 순간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화 상영은 10일을 채 넘기지 못한 채 더 이상 상영을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감독도 더 이상 그다음 작품을 다시 시작할 용기와 저력을 잃게 되었으며 주연을 했던 신인 배우도 크게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분간은 주연 배우로서의 빛을 송두리째 잃은 채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어서 재기할 힘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화사는 하루아침에 망한 것이다. 어머어마한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가 망하고 말았으니 그 손실 역시 어마어마하게 컸던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은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그제야 난 영화 배우를 모집하고, 엄청나게 많은 카메라 테스트를 하고, 시로 주연 배우를 뽑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물론 영화사마다 모두 그런 편법을 쓴 것은 아니니 크게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이른바 제작비를 마련할 수가 없는, 다시 말해서 가진 게 없는 감독들이 가끔 그런 편법을 이용했던 것으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감독이나 영화사를 하나 차려놓고 일단 영화배우를 모집하는 광고를 내보내기만 하면 전국에서 수많은 응시생들이 모여들곤 하였다. 그때 받은 응시원서 값만 해도 대단한 액수였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카메라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수없이 찍어대는 사진들도 한몫을 단단히 하였다. 그 사진들 모두가 응시생들이 부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영화를 촬영할 때 혹시 부족분은 신인 배우가 모두 지원하기로 미리 약속하고 출연시켰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큰 부담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영화 필름의 편집 작업        

  

그 후 난 다시 다른 감독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독과 처음으로 같이 하게 된 일이 난생처음으로 경험하는 영화 편집이었다.      

편집해야 할 영화는 혹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타이틀의 영화였다.      


감독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서울 시청 앞의 어느 건물 1층이었다. 이 영화의 편집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다급해진 것은 이미 이 영화가 나흘 뒤에 전남 광주에서 개봉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서라도 사흘 안에 끝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시청 앞 어느 건물의 1층 사무실, 그곳 좁은 빈방에 갇힌 채 단둘이 앉아 편집 일을 서둘러 시작하였다. 일단 극영화로 촬영을 모두 마친 필름을 가지고 편집을 하는 일이었다.      


나는 주로 감독이 시키는 대로 심부름만 하는 일이었지만,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이 영화의 편집 방법은 시나리오 대본 순서에 따라 필름을 자르고 다시 서로 이어 붙여가면서 하는 작업이었다. 필름은 네가 필름이었으며 그것을 일일이 형광등에 비춰보면서 가위로 자르고 다시 아세톤이라는 접착제로 붙이는 일이 계속 되풀이되는 작업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왜 이런 작업을 따로 해야 하는가를 모르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알고 보니 가령 영화 촬영을 할 때 그 장소가 서울역이면 서울역, 그리고 시청이면 시청이 극 중에 두 번 또는 세 번 나오는 경우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실제로 촬영을 할 때는 스토리 순서에 맞지는 않지만, 서울역이면 서울역, 시청이면 시청을 경비 절약상 한꺼번에 모두 찍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다시 시나리오 줄거리에 맞게 다시 자르고 붙이는 작업이 바로 편집인 것이다.

        

그렇게 사흘 만에 결국 모든 편집은 끝이 났다. 사흘간 단 10분도 눈을 감아보지도 못한 채 3일간 꼬박 낮밤을 새워 완성하게 된 것이다. 밥도 시간이 아까워 일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그 사무실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렇게 사흘 밤을 꼬박 새워보기도 난생처음이었다. 머리가 아팠다. 정신이 다 나간 것처럼 멍청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낮과 밤으로 형광등을 밝혀 놓고 일을 끝내고 날짜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언제가 어제이고 언제가 그제인지 정신이 몽롱할 뿐이었다. 



영화계에서 손을 떼다     


영화 편집을 끝내자 편집 일을 같이 했던 감독이 바로 다음 작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감독이 직접 크랭크 인하게 된 것이다.      


영화 제목은 ’바람난 고양이들‘이었다. 사무실을 차린 곳은 역시 충무로 3가에 있는 어느 건물 2층이었다.

      

난 다시 영화 편집을 같이 했던 그 감독 밑에서 조감독이라는 이름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촬영 준비에 바빴다. 몹시 바쁘다고 해봐야 내가 하는 일은 늘 감독과 그 밑에 선배인 첫째와 둘째 조감독의 심부름을 하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다시 나에게 개인적으로 큰 문제가 생겼다. 몇 해 동안에 걸쳐 영화사를 다닌답시고 늘 분주하다고는 하고 있지만 그동안 전혀 수입이 없다 보니 부모님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냥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서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사나 지으라는 성화가 빗발쳤던 것이다.  

    

사실 조감독이란 직책은 허울만 좋았지 배가 고픈 직업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조감독의 보수는 감독 바로 아래인 퍼스트(first)가 돼야 2만원, 세컨드(second)가 7천 원, 나처럼 가장 낮은 셋째 서열인 나는 3천 원을 받게 는데 그것도 다달이 받는 게 아니었다. 한 편의 영화가 촬영이 모두 끝난 뒤에야 받게 되는 보수인 것이다.      


촬영 도중에 만일 중간에서 어떤 사정에 의해 촬영을 중단하게 되면 그나마 그 적은 금액도 받을 수 없었으며 어떤 때는 1년이 아니라 2년 이상 끌어야 겨우 촬영이 끝나는 영화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좀 부끄러운 이야기를 이실직고하자면 그동안 내가 쓸 용돈은 늘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펑크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배우 한 사람이 여러 영화에 2,3개씩 겹치기 출연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인기 배우가 더 그랬다. 


가령 촬영을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가 다 돼 있다 해도 만일 출연할 배우 한 사람이 어떤 사정이 있어서 다른 곳에서 얼른 오지 않거나 지각을 하게 되면 그날 촬영은 자동적으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 자리에 와 있던 다른 배우들 중에도 다른 회사의 출연이 약속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서 마냥 기다려줄 수만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걸 그 바닥에서는 펑크가 났다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그렇게 되면 나 역시 갑자기 갈 곳을 잃고 하루 종일 나대로의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야 한다. 늘 주머니 사정은 좋지 않고, 그래서 그때마다 난 일찍 집으로 가기도 어색하고 민망한 마음에 단골로 간 곳이 있다. 바로 남산이었다.


남산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서 하루 종일 팔각정 부근에 가서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나의 또 다른 하나의 일과가 되기도 하였다. 뱃속에서 저절로 흘런나오는 꼬르륵 소리를 자주 들어가면서…….     

                    

난 결국 그 바닥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몇 년간 수입도 전혀 없는 일을 고생만 빡세게 하다가 그 건달과 다름없는 생활을 모두 접어버린 채 미련만을 남긴 채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곰처럼 참 미련스럽게도 많이 방황했던 지나간 날들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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