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동화로 엮은 진로지도 예화자료]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는 연말이 다가왔습니다.
대한 호텔의 널따란 휴게실이었습니다. 지금 호텔 로비에는 한국 연극계의 거성으로 명망이 높아진 장진수 배우가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채 소파에 앉아 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신문사와 잡지사, 그리고 각 방송국에서 모여든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겹겹이 성을 쌓고 있어서 발을 디딜 틈조차도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바로 조금 전, 이 호텔 대강당에서는 해마다 한 번씩 연극인들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광의 연극인 대상 시상식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장 배우는 오늘 그 자리에서 영예의 연기자 대상을 받은 것입니다. 장 배우는 수많은 관객과 축하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감격의 눈물을 홀렸는지 모릅니다.
장 배우가 시상식에서 남달리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은 남다른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대사가 없이 손과 발, 그리고 표정만을 가지고 연극의 모든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이른바 팬토마임 연기의 1인자로 크게 인정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쁨과 감격에 넘친 표정이 가득한 장 배우에게 어느 기자 한 사람이 다가서며 수화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장 배우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자리에 내려놓더니 수화로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광경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몹시 궁금하고 답답하다는 듯 기자들을 향해 물었습니다.
“지금 장 배우에게 물었고, 뭐라고 대답하고 있는 겁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도 몹시 답답한 듯 덩달아 한 마디씩 거들고 있었습니다.
“맞아요. 당신네들끼리만 얘기를 주고 받고 있으니 이거 어디 답답해서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니까? 통역을 좀 해 주세요, 통역을…….”
사람들이 하도 보채는 바람에 기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사람들을 향해 약간 낯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습니다.
“어이구, 제발 조용히 하시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얘기가 끝나야 통역이고 뭐고 할 게 아닙니까? 지금 저는 장 배우가 무언극을 하게 된 동기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고 있는 겁니다.”
“……?”
기자는 이렇게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고는 다시 장 배우를 향해 수화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는 여전히 카메라의 후레쉬가 터지고 TV 생중계 카메라도 계속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수화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장 배우의 얼굴에는 남들이 눈치챌 수 없는 어둠의 그림자가 엷게 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수화로 연신 열심히 답변은 하면서도 괴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세월, 그리고 오늘의 대상을 받기까지 남들이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험난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장 배우의 눈에는 어느 틈에 이슬이 맺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괴롭고 힘들었던 지난날의 추억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는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지우고 싶은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자꾸만 새록새록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장 배우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흉내 내기를 좋아하는 그는 초등학교에 다니 때부터는 탤런트나 라디오에 나오는 성우, 그리고 가수들의 흉내를 곧잘 내곤 하였습니다. 어찌나 영락없는지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아까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수의 방을 슬며시 들여다본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아빠를 바라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저 애가 허구한 날 하라는 공부는 젖혀 놓고 또 그놈의 배우들의 흉내만 내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쩌면 좋죠?"
”…….“
아빠도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듯 대답 대신 엄마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엄마가 더욱 무서운 표정이 되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는 걸 난들 어떻게 하겠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난 모르겠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구려.”
아빠는 아예 체념한 듯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귀청을 울렸습니다.
“그냥 두다니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부를 하도록 해야지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떡하실 작정인데요? 나 원 속이 터져서…….”
"당신이 그렇게 성화를 부린다고 그 녀석이 마음에 없는 공부를 하겠소? 그냥 내버려 두라니까 그러네, 요즈음에는 연예인들도 한 번 인기가 올랐다 하면 돈방석에 올라앉기도 한답디다. 혹시 누가 알겠소? 저러다가 유명한 배우나 가수가 될는지…….“
”아니 뭐가 어째요?“
아빠의 대꾸에 엄마는 더욱 성질이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넌방에서는 여전히 연기자들의 흉내를 내고 있는 진수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빠 역시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에이, 망할 녀석 같으니라구. 저놈이 누굴 닮아 저 모양이지? 열심히 공부시킨 다음에 내가 하는 사업이라도 물려 줄까 했더니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를 겨우 졸업한 아빠는 졸업하기가 무섭게 일찍이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지 일이 잘 풀리면서 사업이 날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르자 이제는 제법 작은 회사의 어엿한 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업을 더욱 열심히 하여 큰 회사를 이룬 다음 장차 진수에게 넘겨주고 싶은 것이 아빠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 일이었습니다. 아빠와 엄마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달리 진수가 엉뚱한 일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연예인들의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좋은 말로 달래도 보고 타일러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때 저러다가 그만두겠지 하고 예사로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수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말리면 말릴수록 진수의 고집은 좀처럼 꺾이지를 않았습니다. 야단을 쳐보았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었습니다.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날이 갈수록 더욱 연기 연습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수가 어느덧 5학년에 재학중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온 진수는 엄마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이번에 학교에서 학예회를 하기로 하였거든.“
”그래서?“
”그런데 학예회에서 ‘흥부와 놀부’ 연극을 하기로 하였는데 내가 흥부로 뽑혔단 말이야.“
”그런데?“
연극이란 말에 엄마는 벌써부터 못마땅하다는 듯 표정이 금방 굳어지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예회 날 엄마와 아빠도 같이 학교에 모시고 오시라고 하는데 엄마도 구경 갈 거지?“
”몰라! 아빠한테 말해 보고 나서 엄만 아빠가 하자는 대로 할 거야.“
엄마는 크게 실망한 표정이 되어 금방 바람 빠진 풍선 소리를 내며 대꾸하고 있었습니다.
진수는 그런 엄마를 보자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덩달아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이만저만 실망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연극에서 주인공 역을 맡기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흥부 역을 맡게 되어 이번만큼은 엄마가 펄쩍 뛰며 좋아할 줄 알았던 진수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학예회가 날이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도무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진수가 주연을 하게 되었다니 구경을 안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모처럼 회사까지 하루 빠져가면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합창과 독창 그리고 무용이 끝난 다음 드디어 '흥부와 놀부‘ 연극이 막이 올라갔습니다.
의외로 진수는 흥부 역을 어찌나 익살스럽고 실감나게 연기를 잘 하는지 청중들은 입을 헤 벌린 채 우레와 같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연신 배꼽을 잡으며 웃음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만큼 진수의 연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흥미롭고 실감이 났기 때문입니다.
“흥부 역을 맡은 저 애가 도대체 누구네 아이인데 저렇게 익살스럽게 잘하지?”
"그러게 말이야. 정말 배우 뺨을 치고도 남겠는걸!”
“아마 저 아이가 계속 저 길로 나가면 틀림없이 크게 출세할 거야!”
청중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한동안 엄마의 눈치를 살펴보던 아빠가 엄마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여보, 이제 더 이상 속 썩일 필요없이 그 녀석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어떻겠소?”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엄마가 한숨을 쉬더니 바람빠진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이제 어쩌겠어요. 이 세상 모든 일이 억지로는 안 되는 것 같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구려.“
"그나저나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하고 싶은 짓을 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만…….”
아빠 역시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누굴 닮아 저런 녀석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워언…….”
그렇게 말하고 있는 엄마와 아빠의 입에서는 한꺼번에 맥이 쭉 빠진다는 듯 가느다란 한숨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해가 흐르는 동안 진수는 어느덧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진수는 이미 연극에 미쳐 대본이란 대본은 모두 구해다가 혼자 집에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연극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았습니다.
유명한 연극 배우나 영화 배우들, 그리고 탤런트의 사진들을 있는 대로 벽에 붙여 놓고 밤이나 낮이나 그들의 연기 흉내를 내는 일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드라마 대사를 외우고 연기 연습에 열중하느라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였습니다. 커다란 몸 거울을 벽에 걸어 놓고 표정이나 동작을 눈여겨 바라보며 밤낮드로 연습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는 늘 뒷전이고 연극 연습에 몰두하면서 겨우 고등학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더욱 연습을 열심히 하여 난 장차 이 나라 아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배우가 되고 말 거야!“
진수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마치 신에 들린 것처럼 연기 연습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길을 걷다가도 길바닥에서조차 갑자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남들이 흉을 보든 말든, 부끄러운 줄 모르고 혼자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연기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가을닐이었습니다.
“뭐라고? 진수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알았소. 곧 병원으로 가리다.”
엄마한테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은 아빠는 수화기를 놓기가 무섭게 진수가 입원했다는 병원을 향해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렇지 않다도 몸이 너무 쇠약해진 데다 오늘 마침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너무 오랫동안 맞아 감기 몸살 증상이 좀 심해진 것 같습니다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의사의 설명에 아빠는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된 표정으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병이기에 이렇게 깨어나질 못하고 있는 거죠?”
“글쎄요. 앞으로 검사를 좀 더 해봐야 확실한 원인을 알 수 있겠죠. 그러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아마 십중팔구는 심한 감기몸살로 일어난 후유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아빠는 다소 안심이 된 듯 두 눈을 꼭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진수의 이마를 짚어 보며 엄마를 향해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된 거요?“
엄마는 아직도 놀란 표정이 가시지 않은 채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글쎄, 나도 잘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오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산에 올라가서 혼자 발성 연습을 하다가 그만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만난 모양이에요. 마침 등산을 하던 행인이 풀숲에 쓰러진 채 비를 맞고 있는 걸 발견하고 바로 119에 신고를 했기에망정이지 워언…….”
“…….”
설명을 듣고 난 아빠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걱정스러움에 더욱 일그러진 표정만 짓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진수의 병은 며칠이 지나도록 별로 차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식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전혀 아무것도 먹지를 못한 채 영양제 주사에만 의존하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밥을 못먹고 영양제만 맞고 있는 진수의 얼굴색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색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습니다. 거기다 입을 벌리기만 하면 심하게 구토를 하는 바람에 애궂은 엄마와 아빠의 애간장만 바작바작 타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아빠가 다시 의사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병입니까?”
"글쎄요. 아시다시피 그동안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병명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감기몸살이 너무 악화되어 급성 폐렴으로 전이된 게 아닌가 하고 우선 그쪽으로 최선의 치료를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석 달이란 오랜 기간이 지난 뒤에야 진수는 겨우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설상가상이라더니 전혀 생각지 않았던 뜻밖의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석 달 전, 한 번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부터 굳게 다문 진수의 입은 좀처럼 벌어질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동안 심한 병을 앓게 되면서 귀가 먹게 되었으며, 게다가 하루 아침에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엄마와 아빠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곧 무너질 것만 같았습니다. 서둘러 나라에서 이름있는 의사를 모두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효과가 뛰어나다는 약도 써 보았지만 그 모두가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오직 명배우가 되겠다고 큰 꿈을 키우던 진수의 실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 뒤부터 진수는 농아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간의 농아학교 과정을 마친 진수는 그나마 다행히 어느 정도 수화로 으시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배우로서의 꿈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진수는 세상을 살아갈 아무런 의욕이 없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언젠가는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씨가 착하기만 하던 진수의 행동은 나날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혼자뿐이란 생각에 외롭고 쓸쓸하고 서러운 마음을 이겨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수는 마침내 몰래 집을 뛰쳐나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의 걱정거리를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죽어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판단에 무작정 집을 나가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집을 나온 진수는 스스로 여러 차례 죽음을 선택해 보았지만, 그 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난 이대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난 누가 뭐라고 해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배우가 되고 말거야!”
진수가 이렇게 다시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은 죽음 직전에 어느 분의 도움으로 깨어났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해서 그랬을까요? 마지막 죽음 직전에서 진수를 구해준 사람은 공교롭게도 바로 이 나라의 연극계에서 연출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진수는 전에 없던 힘이 다시 불끈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진수는 그날부터 그분 밑에서 입으로 하는 말 대신 표정이나 몸짓만으로 극을 할 수 있는 무언극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난 뒤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오늘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한 호텔에서 기자들과의 회견이 있은 바로 그날 오후, 각 석간신문에는 장진수 배우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방송국마다 진수의 성공담을 방송하기에 바빴습니다.
‘불굴의 의지를 꽃피운 농아 장진수 배우'
‘팬토마임의 1인자 장진수 배우’
‘불행을 딛고 일어선 장진수 배우의 의지’ 등,
신문기사를 읽고난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는 기자와의 회견 내용도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앞으로는 더욱 열심히 팬토마임에 대해 공부할 생각이며 아마 이 일은 제가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혹시 더욱 크게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버신다면 그 돈은 어디에 쓰시렵니까?”
장진수 배우는 민망한 듯 미소 띤 표정으로 다시 수화로 대답하였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그런 행운이 온다면 저와 같은 불구에 형편에 놓여있는 소년 소녀들의 앞날을 위해 모두 바칠 생각입니다.”
“그럼 장 배우와 같은 처지에서 좌절하고 있는 많은 후배들을 위해 한 마디 부탁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사실 아시다시피 저도 여러 차례 죽으려고 하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라 해도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일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우선 노력을 기울여줄 것과 그다음에는 그 일을 위해 그저 열심히 그리고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히 밀고 나갈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온갖 역경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어렸을 때부터의 꿈을 버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꿋꿋이 일어선 강진수 배우,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매우 흐뭇하고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