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오빠 생각’ 그리고 ‘고향의 봄’과의 인연]
한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오래 전부터 즐겨부르는 아름다운 동요 ‘오빠생각’과 이미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고향의 봄’이란 동요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오빠생각‘은 놀랍게도 1925년에 12살짜리 어린 소녀인 최순애 씨가 쓴 동시가 소파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는 잡지에 입선이 되어 실렸던 글이다.
12살의 어린 소녀가 그런 훌륭한 동시를 지었다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가사가 너무 좋아 얼마 뒤에 작곡가 박태준 씨가 곡을 붙여 불후의 명작 동요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빠 생각‘이란 동시는 그저 상상의 시가 아닌 최순애 씨가 실제로 현재 겪고 있던 실화가 바탕이 되어 이를 동시로 옮겨 적은 글이었다고 한다.
수원이 고향인 최순애 씨 가정에는 6남매가 같이 자라고 있었는데 6남매 중 첫째만 오빠인 남자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딸이었다.
맏이인 오빠는 서울로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금방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던 오빠는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가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동생인 최순애 씨가 오빠를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을 참다 못해 쓴 글이다. 금방 돌아온다던 오빠는 가을이 지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논에서는 뜸북새, 그리고 하늘에서는 기러기가 우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게 되자 오빠를 애타게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그린 동시였던 것이다.
또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란 노랫말로 시작하는 ‘고향의 봄’이란 동시는 1926년에 역시 방정환 선생이 발행하는 잡지에 실렸던 이원수 선생의 동시를 작곡가 홍난파 씨가 곡을 붙여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최순애 씨는 잡지에 실린 ‘고향의 봄’을 읽고 그 동시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하게 되어 경남 마산이 고향인 이원수 선생에게 즉시 그 글을 읽고 깊이 감동했다는 감사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때 이원수 선생은 최순애 씨보다 3살 연상이었다.
두 사람간의 편지를 주고 받는 펜팔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결국 달콤한 사랑으로 무르익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어느 날 이원수 선생이 수원까지 와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만나기로 약속한 날. 최순애 씨가 한껏 설레는 가슴으로 이원수 선생이 오기를 기다려 보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원수 선생은 끝내 수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기다리다 못한 최순애 씨의 부모님들은 그런 무책임하고 예의가 없는 사람과는 다시는 만날 필요조차 없는 사람이라며 급기야는 다른 혼처를 물색하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그때 마침 이원수 선생이 수원에 올 수 없었던 것은 그럴만한 부득이한 이유가 있었다. 이원수 선생이 그 지방 청소년들에게 한글 교육을 몰래 시키고 있던 중 왜놈 순사들에게 발각되어 억울하게 1년간의 옥살이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유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 두 사람은 결국 8년 뒤에 그처럼 서로 갈망하던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된다. 결국, 글을 통해 두 사람은 마침내 아름다운 인연의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2년 9월, 나는 ‘가톨릭 소년’(김수환 추기경 발행인)이란 어린이 잡지에 동화로 2회 추천을 받아 정식 아동문학가란 이름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내가 ‘가톨릭 소년’에 동화 추천을 받게 된 것은 난 이미 다른 월간 잡지에 동화로 3회 추천을 받은 경력으로 인해 작가라는 이름은 얻게 되었지만, 그보다는 ‘가톨릭 소년’이란 권위 있는 잡지에 추천을 받아야 더욱 명실상부한 작가로 인정하게 된다는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 그 잡지에 또 다시 도전 끝에 추천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가톨릭 소년’에서는 동시와 동화, 그리고 아동극 등을 추천하고 있었는데 응모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몇 달, 또는 몇 년째 추천작을 내지 않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가 ‘가톨릭 소년’에 2회 추천을 완료하기까지는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더구나 5년 전부터 단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써서 끈질기게 응모를 했으니까 자그마치 단편 동화 52편이 우수수 미끄럼을 타고 53편째야 겨우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난 자칭 52전53기란 말을 남긴 적도 있었다.
‘가톨릭 소년’에 2회 추천을 완료했을 그때(1972년) 마침 이원수 선생이 회장을 맡고 있는 ‘한국아동문학가협회’라는 문학단체가 있었다.
난 아동문학계에 가까운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 그해에 바로 그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년째 문학단체에 가입하고 있는 동안 이른바 내노라 하는 많은 유명 아동문학가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와 가까이 지내던 분들은 이미 오래 전에 안타깝게도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지만, 이원수 회장을 비롯하여 동요 ‘초록바다’의 노랫말을 쓴 박경종 선생, ‘나뭇잎배’와 ‘모래성’등을 쓴 박홍근 선생 등과는 자주 만나기도 하고 해마다 새해가 돌아올 때마다 서로 연하장도 주고 받으면서 각별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새로 책을 낼 때마다 서로 주고 받기도 하였고…….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은 그냥 혼자 스스로 탄생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얼른 생각해 보기에도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위인인 이율곡 선생과 한석봉이 훌륭한 위인이 되기까지에는 어머니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고 뒷받침이 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고로 정치인들 역시 정치인들 나름대로 그들의 아내의 내조가 막대한 뒷받침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글을 쓰는 작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글이란 분명히 혼자 쓰는 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누군가가 곁에서 글을 잘 쓸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아낌없는 격려를 해주게 된다면 보다 좋은 글, 그리고 훌륭한 역작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가끔 해 보게 된다.
난 그 당시 한국아동문학가협회 회장인 이원수 선생 댁을 직접 방문할 기회를 가끔 얻게 되었다.
맨 처음에 이원수 선생 댁을 찾아갔을 때 나는 심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상상하기에는 유명한 작가이니가 제법 으리으리한 집을 지니고 살고 계실 줄 알았다.
그러나 그분이 살고 있는 집은 분명히 서울이긴 하였지만, 얼른 보기에도 너무나 볼품이 없고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유명한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허술해 보이는 오막살이 집에서 살아가고 있다니!
이원수 선생의 안내에 따라 방에 들어갈 때는 방문이 너무 작아서 고개를 잔뜩 숙이고 들어가야만 했다.
몹시 좁아 보이는 방안에는 그 흔해빠진 소파도 침대도 없었으며 값이 나갈만한 세간살이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왜 이런 오막살이 집에서 살고 계시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욕심이 없다더니 이원수 선생 역시 그런 작은 집 작은 단칸 방에서 두 분이 아무 욕심이나 근심 걱정없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속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작가 중에 이원수 선생처럼 초라한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이 또 한 분 있었다.
가곡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보리밭’이라는 가곡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가곡 ‘보리밭’의 노랫말을 쓴 그 유명한 박화목 선생 또한 그런 분이었다. 그분 역시 서울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분의 집 좌우로는 높은 건물이 세워진 그 틈바구니에 낀 아주 작고 초라해 보이는 오막살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누가 보아도 너무나 초라하고 가난해 보이는 볼품없는 집이었다.
그분들이 남들이 보란 듯이 멋진 집을 지을만한 여력이 없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까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분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 남보란듯이 으리으리하게 지은 집에서 과시하며 살아보고 싶다는 허영심과 사치와는 거리가 먼 검소한 생활 습관이 오래전부터 몸에 배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존경스러운 마음에 한편으로는 새삼 은근히 우러러 보이기도 하였다.
이원수 선생 댁 방에 들어서니 최순애 여사가 지극히 조용하면서도 고운 목소리로 반갑게 맞이하여 주셨다.
사방을 둘러보니 출입문 반대쪽에는 뒤뜰과 통하는 또 하나의 아주 작은 창호지 문이 있었다.
열어젖혀진 창호지 문 밖으로는 아주 작은 뒤뜰이 한눈에 보였다. 뒤뜰이라고는 하지만 방문과는 불과 2~3미터도 안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사진 뒤뜰이어서 몹시 답답해 보였다. 비교적 아담하게 정리가 된 뒤뜰에는 여기 저기 아름다운 꽃이 핀 각종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화분들은 주로 최순애 여사가 가꾸고 있는 화분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원수 선생으로부터 최순애 여사가 뒤뜰에 꽃들을 정성껏 가꾸고 있는 이유를 듣고 절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나 글을 쓰다가 그럴 때가 있지. 나 역시 글을 쓰다가 가끔 글이 막혀서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방에 앉아서 뒤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곤 한다네.
그러나 뒤뜰 역시 경사가 가파르고 사방이 막혀 답답할 때가 많았다네. 이를 보다 못해 집사람이 뒤뜰에 화분을 가꾸기 시작하게 되었다네. 그냥 흙과 돌로 막힌 뒤뜰만 보는 것보다는 이런 저런 꽃을 바라보다 보면 글이 잘 풀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나를 챙겨주는 배려였다네. 허허허…….”
이원수 선생은 최순애 여사가 꽃을 가꾸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며 매우 흐뭇하고 만족한 듯 껄껄 웃고 있었다. 그리고 부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 화분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화분의 위치도 바꾸어 놓고 있으며 늘 다른 꽃으로 변화를 주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야 아무래도 이원수 선생이 글을 쓰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글과 남편을 끔직이 사랑하는 알뜰한 배려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부부란 말인가!
또한, 이원수 선생은 글 외에도 평소에 서예를 좋아했다. 그래서 글을 쓰다가 머리를 좀 식히기 위해서는 취미로 서예를 즐겨 하기도 하였다.
이원수 선생이 서예를 할 때에도 최순애 여사의 내조는 대단했다.
가령 이원수 선생이 글을 쓰다가 싫증이 나서 서예를 하고 싶다고 말을 하게 되면 이원수 선생의 곁을 지키고 있다가 이원수 선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순애 여사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벼루와 먹, 그리고 화선지와 서진 등을 방바닥에 준비해 놓고 먹을 정성껏 갈며 이원수 선생이 화선지에 쓰고 있는 글씨를 바라보며 글씨가 너무 멋지고 마음에 든다며 감탄과 격려의 말을 아까지 않았다고 한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것 같은 오막살이 집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원수 선생 부부.
살림살이는 비록 가난에 가깝지만, 부부간의 서로의 마음을 너그럽고 알뜰하게 이해해 주고 격려해 주는 하루하루의 삶. 이 얼마나 부럽도록 아름답고 보람있는 삶이란 말인가! 정말 부럽기가 그지없다.
그토록 서로 늘 아껴주고 온 정성을 다하여 상대방을 사랑하며 정성을 다해 내조했기에 그들 부부는 그 누구보다도 더욱 훌륭한 글을 이 세상에 내놓게 되어 빛을 발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