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가치에 관한 단상]
위에 소개한 한 줄의 문장은 현재 브런치 작가이면서 문단에 데뷔하신 지 꽤나 오래된 어느 유명 원로 여류작가가 자신을 짤막하게 소개한 글이다.
나는 그 짤막한 문장을 대하는 순간부터 매우 인상적이며 사실 현실이 그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생각에 그 문장 하나가 어느 유명한 격언 못지 않게 가슴속 깊이 여운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문장이 떠오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한다.
조금 엉뚱한 비유가 될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기서 경제학을 조금 살펴보면 ‘수요의 법칙’, ‘공급의 법칙’, 그리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 등과 같은 복잡한 법칙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경제학과는 일찍이 담을 싼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학문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생각만 해도 미리부터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곤 한다.
그러나 그 어려운 경제 원리를 내 나름대로 쉽고 간단하게 풀이해 본다면 수요와 공급, 그리고 소비와 생산이 서로 균형이 맞아야 세상살이는 아무 탈 없이 무난하고 안정되게 잘 돌아가게 되는 것이 상식적이며 기본적인 경제학의 원리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가령 한가지 예를 들자면 사파이어와 루비 같은 값진 보석들이 길가에 흔한 돌멩이들처럼 지천으로 나뒹굴고 있다고 가정해 보기로 하겠다.
그럴 경우에도 과연 그 돌멩이처럼 흔하게 나뒹굴고 있는 흔한 사파이어나 루비 같은 것으로 반지 또는 귀고리를 만들어서 자랑스럽게 끼거나 걸고 다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없으리라!
그만큼 대리석이 귀했기 때문에 일반 서민들이 집을 지을 때 대리석을 건축 자재로 사용한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대리석이 귀한 만큼 너무나 고가여서 웬만한 사람들은 감히 대리석을 사용할 엄두
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기둥이나 벽 등, 여기저기 대리석을 얼마나 사용했느냐에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몹시 부러워함은 물론 빈부의 차이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대리석이 진귀하고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을 무렵에 난 우연히 연수 차 자유중국(대만)을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대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깜짝 놀랄만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나도 모르게 두 눈이 둥그렇게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석 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대리석이 어딜 가나 인도가 온통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도 궁금한 마음에 안내원에게 그 사연을 묻고 보니 자유중국이란 나라에는 대리석이 워낙 많이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일반 돌멩이보다 더 천하게 여기고 있다는 놀라운 설명이었다. 더구나 그 나라에서는 워낙에 대리석이 흔하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 촌스럽고 가치가 떨어진다며 절대로 대리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부
연 설명해 주기도 하였다.
그 하나의 예를 보더라도 이처럼 어떤 물건이든, 때와 장소, 그리고 희귀할 때 그 가치는 더욱 빛이 나게 되고 진가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6.25 전쟁을 몸소 겪으며 학창 시절을 보냈기 워낙에 책이 귀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더구나 몹시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기에 우리 집뿐만 아니라 웬만한 집을 제외하고는 어느 집이나 책이 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학교에도 책이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휴전 직후에 학교에 다닐 때는 심지어 교과서도 없이 학교를 다녔다.
그러기에 오직 선생님만 읽어주며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고 익힐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물론 공책도 연필도 귀했다. 공책이 귀하다 보니 어쩌다 미군들이 먹고 버린 껌 종이나 초컬릿 포장지를 주워다 인두로 정성껏 다려서 바느질 실로 매서 사용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만큼 종이 구경을 하기가 귀하고 어려웠던 귀했던 시절이었다.
연필도 마찬가지였다. 연필이 귀해서 누가 아껴서 쓰란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저절로 아껴쓸 수밖에 없었으며 급히 메모할 일이 있을 때는 그때마다 막대기로 땅바닥에 글씨를 써두며 생활
하기도 하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그나마 교과서를 구입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과서 외에는 전혀 읽을거리라곤 아무것도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 재미있고 흥미있는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누구나 목이 말라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간밤에 좋는 꿈을 꾼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뜻밖의 큰 횡재를 만나게 되었다. 반갑게도 길바닥에 웬 책 한 권이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번쩍 띄었다. 그때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그 행운의 책은 다름 아닌 ‘노벨’ 전기였다.
그때 주운 ‘노벨’ 전기는 책표지나 종이의 질, 그리고 삽화 등 장정 모두가 지금 생각하면 그 모두가 너무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책이었다. 그러나 워낙 책이 귀할 때여서 내겐 그처럼 값진 책이 아닐 수 없었다.
난 그때부터 노벨 전기를 읽기 시작했다.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틈만 나면 읽고 또 읽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아마 스무 번 이상은 탐독했을 것이다.
지금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책의 내용이 특별히 너무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책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때는 몹시 재미있고 흥미로웠지만…….
요즈음에는 어느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들, 만일 그 수많은 책들 중에 아무리 재미있는 책을 구입했다 해도 과연 20번 이상이나 읽어보는 독자가 있을까?
아무리 재미있고 나에게 꼭 필요한 유익한 책이라 해도 스무 번을 읽는 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내가 그때 그 위인전을 스무 번이나 넘게 읽게 된 것은 틀림없이 책이 너무나 귀했던 시절이었기에 읽을거리에 너무 굶주려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회상해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읽을거리에 한창 목이 마르고 갈증을 느끼고 있을 때 그 책이 마치 갈증을 달래주는 단비와 같은 희소가치의 역할을 하고도 충분했으리라!
‘독자보다 작가가 더 많은 이 시대’. 소문에 의하면 이곳 브런치의 회원만 해도 자그마치 5만여 명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들의 대부분이 매일 좋은 글, 그리고 수준급의 훌륭한 글을 수없이 써서 올리고
있다.
그런 수준 높은 훌륭한 글이 하루에도 수천 꼭지씩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올라오고 있으니 그 글을 다 읽어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 현실이다 보니 서로 구독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더구나 나의 취향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 글이라면, 아무리 수준 높은 훌륭한 글이라 해도 안타깝게도 구독자 외의 다른 작가의 글을 전혀 읽어볼 시간과 기회를 잃게 된다고 하겠다.
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올라오는 수많은 글들을 어떻게 바쁜 시간을 내서 무슨 재주로 다 읽고 소화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에 그 수많은 좋은 글들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못한 채 그냥 훑어보기만 하고 넘기기엔 너무나 아까운 글들이란 생각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다.
만일 내 어린 시절에 지금처럼 브런치 작가님들이 쓴 이처럼 훌륭한 글이 단 한 편만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면 아마 모르긴 해도 틀림없이 스무 번 이상이나 읽었음은 물론 일찍이 스트셀러가 되고도 남았으리라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이런 좋은 글, 훌륭한 글들이 좀더 큰 대우와 빛을 발휘하지 못한 채 수많은 글들이 오늘도 수없이 사장(?)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그저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각자 누가 뭐라고 해도 매일 일기를 쓰듯 나 스스로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 혼자 좋아서 쓰는 외로운 작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항상 뜻이 있으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고 하였다. ‘두드리면 열린다’ 고도 하였다.
감히 작가님 여러분들의 건필과 더욱 열정 어린 분발과 더욱 정진을 빌어드릴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