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에 담긴 애틋한 사연(3)]
1.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오-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나의 집뿐이리
2. 고요한 밤 달빛도 창 앞에 흐르면
내 푸른 꿈길도 내 잊지 못하리
저 맑은 바람아 가을이 어디뇨
벌레 우는 곳에 아기 별 눈 뜨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리
1. ‘Mid pleasures and Palaces though we may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A charm from the skies seems to hallow us there,
Which seek through the world, is ne’er met with elsewhere.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2. An Exile from Home, Splendour dazzles in vain!
Oh! Give me my lowly thatch’d Cottage again!
The Birds singing gaily that came at my call,
Give me them with the peace of mind dearer than all!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3. To thee, I’ll return overburdened with care,
The heart’s dearest solace will smile on me there.
No more from that cottage again will I roam,
Be it ever so humble, there’s no place like home.
Home! Home, sweet sweet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There’s no place like Home!
<즐거운 나의 집>은 영국의 헨리 비숍(Henry Bishop)이 작곡한 곡에 미국의 극작가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이 노랫말을 붙인 노래이다.
존 하워드 페인은 1823년 <클레어(Clar)> 또는 <밀라노의 하녀(The Maid of Milan)>라고 알려진 오페레타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에 수록된 이 오페레타의 성공과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곡이 수록된 악보는 무려 10만 장이나 팔렸다. 그러나 저작권을 잘 몰랐던 ‘존 하워드 페인’은 별로 수익을 얻지 못했다.
1852년 헨리 비숍이 미국에서 이 곡을 다시 출시하면서 도니제티의 오페라 <안나볼레나> 등 여러 작품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아들이 11살의 나이로 열병에 걸려 죽었을 때 백악관에서 이 곡을 반복해서 연주해달라고 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 곡은 또한 <오즈의 마법사>에도 삽입되었다.
유럽 각지를 방랑하던 미국 시민 존 하워드 페인은 알제리에서 사망했다. 31년이 지난 뒤 군함으로 그의 유해가 본국으로 운구되어 졌다.
유해가 뉴욕에 도착하던 날 부두에는 뉴욕 시가 생긴 이래 각지에서 최대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수많은 시민들이 조의를 표했다. 그는 권력자도, 돈 많은 재벌도, 위대한 과학자도 아니었다. 평범한 시민이 어떻게 전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원제목은 ‘홈 스위트 홈’(즐거운 나의 집)이란 한 곡의 명곡 때문이었다.
‘존 하워드 페인’이 이 노래를 지은 것은 프랑스 파리에서 돈 한 푼 없는 비참한 떠돌이 생활을 할 때였다.
평생 결혼 한번 하지 못해본 그는 그토록 가정이 없는 외롭고 처절함을 절절히 체험해 보았기에 가정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가정에서의 행복한 삶을 마냥 그리며 이 노랫말을 썼던 것이다.
디트로이트에 있는 ‘헨리 포드’의 기념관에는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글이 있다.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아내가 있는 집보다 더 축복받고 아름다운 집은 없다.
미국의 애국가는 '성조기여 영원하라'이다.
그러나 성조기보다 미국인들이 더욱 애창한 노래는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의 '홈 스위트 홈’이었다고 한다.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을만한 뒷이야기가 한 가지 전해지고 있다.
이 <즐거운 나의 집>은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남북군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남부군과 북부군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게 되었다.
낮에는 치열한 전투를 하고 밤만 되면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양쪽 군의 군악대들이 매일 밤 음악회를 열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이 노래로 인해 뜻밖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북부군 군악대가 다른 날과 달리 오늘 밤에는 아주 색다른 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바로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 즉,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즐거운 나의 집>이란 애잔한 멜로디는 양쪽 전쟁터로 은은하게 울려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다음 순간이었다. 그 시간에 마침 고향에 남겨두고 온 그리운 가족이나 연인에게 고향생각을 하며 편지를 쓰고 있던 군인들은 그 노래가 울려 퍼지자 그렇지 않아도 사무친 그리움에 막사 밖으로 뛰쳐나와서 너도나도 다 함께 그 노래를 따라서 목청껏 부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 건너편에 있던 남부군 진영에도 이 곡이 울려 퍼지게 되는 이변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남부군들도 다 함께 합창을 하게 되었다. 대단한 공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남군과 북군은 적이라는 것도 망각한 채 모두가 강물로 미친듯이 뛰어들더니 서로를 얼싸안고 모자를 하늘로 높이 던져 올리기도 하며 환호하게 되었다. 이런 감격적인 장면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이 감격적인 장면을 취재했던 ’프랭크 막심‘이란 기자는 한마디로 '다들 미쳤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다.
마침내 이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 한 곡으로 인해 그때부터 전쟁은 봄눈 녹듯 말끔히 사라지고 오직 조국과 동포애만 남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이 명곡 하나로 인해 서로의 적대감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노래 한 곡의 명곡이 전쟁을 불식시킬만큼 그 힘이 대단히 위대했던 것이다.
존 하워드 페인(John Howard Payne)은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가족들 모두가 뿔뿐이 흩어지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하워드 페인‘은 아버지가 웅변 선생님이였던 덕분에 그 특기를 이어받아 그 후에 그나마 다행히 극작가겸 배우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을 잃은 열세 살 이후부터 미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에게는 평생 자기 집이 없이 여기저기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헨리 비숍‘ 이 곡을 붙인 그의 이 노래는 오페라 ‘클라리, 밀라노의 아가씨'(Clari, The Maid of Milan)에서 불려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래가 되기도 하였다.
"아무리 초라한 오막살이 집이라 해도 내 집만 한 곳은 없다"고 한 이노래는 그가 어머니와 아버지하고 같이 살던 그 집 외에는 나의 집이라고는 평생 가진 적이 없었던 그였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떠돌았던 게 그의 한평생이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프랑스 파리에서 동전 한 푼 없이 떠돌며 살아가다가 13살 이전의 고향의 집을 간절히 그리워하며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842년 튀니스 주재 미국 영사관에서 10년간 지내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죽기 전에 그는 친구에게 편지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고 한다.
“나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가정의 기쁨을 자랑스럽게 노래하도룩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해주었지만 나 자신은 불행하게도 아직껏 내 집이라는 그 맛을 모르고 살 았다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맛을 보지 못하고 말 것 같소.”
이 편지의 사연은 그가 사망한 지 31년이 지난 뒤에야 미국으로 전해졌으며 미국 정부는 군함까지 보내 그의 유해를 성대하게 본국으로 운구하게 되었다.
유해가 도착하던 날.
뉴욕항은 미국 대통령과 영부인을 비롯, 많은 저명인사와 수많은 시민들과 65명으로 구성된 밴드가 '홈스위트 홈'을 연주하면서 죽어서야 그의 부모와 같이 살던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맞았고, 그를 열광하며 환호하던 시민들은 그의 유해가 내려오자 눈시울을 적시고 말았다.
그의 묘는 워싱톤 근교 더 오크 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숨을 거둔 뒤에야 영원히 잠들 곳을 구하게 된 그의 묘에는 다름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주신 ’존 하워드 페인‘ 편안히 잠드소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