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작동화

이동 공부방

by 겨울나무

학교 공부가 끝나는 종소리가 학교 가득 울려퍼지고 있었다. 조금 뒤부터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교문 밖으로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냥 얌전하게 조용히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살 판이라도 난 듯 신바람이 나서 제각기 시끄럽게 소리소리 지르며 뛰어나오고 있었다.

"와글와글, 바글바글…….”


“시끌 벅끌…….”


매일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나 많은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오늘도 교문 앞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로 온통 떠나갈 것처럼 왁자지껄하는 소리로 정신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아이들이 저마다 소리소리 지르며 떠드는 소리는 그냥 보통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다란 학교 앞 골목길을 삽시간에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했다.

"야, 이 녀석들아,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말고 조용히 다니면 당장 전쟁이라도 일어난다니?“


마음씨가 착하기로 소문이 난 문방구 가게 아저씨도 아이들이 워낙 시끄럽게 떠드는 바람에 두 손으로 귀를 꼭 막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어이구, 이 녀석들이 화통 대가리들을 삶아 먹었나, 웬 목소리들이 그렇게 크냐? 이거야 어디 시끄러워서 살 수가 있어야지.”


“어이구, 이놈들아, 제발 사람 좀 살려다오. 제발 입 좀 다물 수 없니?”


교문 앞을 지나가던 아저씨나 아주머니들도 숫제 두 손가락으로 귀를 꼭 틀어막고 낯을 찡그리며 한마디씩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른들의 그런 목소리가 아이들의 귀에 들어올 리는 만무했다. 왼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전히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아이들 중의 하나가 희한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큰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까지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의 목소리보다 한 옥타브 더 높은 목소리였다.

"야야! 얘들아, 저기 좀 봐!”


"어디?”


“어디 말이야?”


아이들 모두가 맨 먼저 소리친 아이가 가리키는 쪽을 두리번거리더니 아이들 중의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 앉아 있는 거 우리 반 민숙이 아니니?”


“그래, 맞았어. 저걸 처음 보니? 저게 바로 우리 반의 ‘이동 공부방'이란 말이야.”


"뭐어? 이동 공부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


"이런 바보, 여태까지 그 유명한 이동 공부방이 누군지를 모르고 있었단 말이니?“


”……?”


”……?”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갑자기 입을 다문 채 민숙이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골목 한 귀퉁이, 그곳 전선주 밑에는 어느 틈에 먼저 나온 민숙이가 주저앉아 있었다.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가방 위에 교과서와 공책을 펼쳐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어려운 수학 문제를 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 중의 하나가 몹시 못마땅하다는 어조로 투덜거리고 있었다.


"어이구, 선생님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점점 더 꼴값을 떨고 있다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들도 꼴도 보기 싫다는 듯 덩달아 맞장구를 치며 비웃기 시작했다.

"맞아. 꼭 저렇게 아무 데나 앉아서 공부를 해야만 머릿속에 잘 들어간다 이 말이지? 얼른 집에 가서 해도 얼마든지 될 텐데 말이야. 그치?“


”내 말이. 하여간 우리 반 망신은 저 애가 다 시킨다니까.“


"툇퇴! 으이그, 눈이 시어서도 더 이상 저 꼴값은 못 보겠다니까. 얘들아, 그냥 집으로 가자!“


한 아이는 아니꼽고 속이 뒤틀린다는 듯 길바닥에 침까지 내뱉으며 비웃고는 제 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비람에 모여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씩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민숙이는 여전히 아이들이 흉을 보든말든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수학 문제를 풀기 위해 정신이 팔려있었다. 아이들이 비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체하는 것인지 오직 책을 읽고 또 읽으며 문제를 푸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니, 얘가 누군데 길바닥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 거지?“


”…….”


지나가던 이른들도 이상하다는 듯 눈이 둥그렇게 되어 한마디씩 하였다. 그러든 말든 민숙이는 여전히 수학 문제만 골돌히 풀고 있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민숙이의 주위에 빙 둘러서서 제각기 지껄이며 떠들어대곤 했지만 민숙이는 아예 그런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눈치였다.

사실 민숙이에게는 별난 데가 있는 아이였다. 일단 어떤 일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다음에는 누가 곁에서 아무리 소리치고 떠들어도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하는 별난 아이였다.


민숙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유별난 아이임에 틀림없었다. 여느 아이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특별한 데가 있는 아이였던 것이다.

가령 학교에서 배운 것을 순간적으로 깜빡 잊거나 생각이 나지 않을 경우, 그것을 그냥 두고 참지를 못했다. 궁금한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오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책이나 사전을 펴놓고 궁금했던 문제들을 즉시 해결하려는 특별한 성격을 가진 것이 바로 민숙이었다.

그 특이한 습관 덕분에 민숙이는 결국 '이동 공부방'이란 별명까지 얻게 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학년 때부터 5학년까지 늘 학급에서 1등을 독차지해 온 것이 민숙이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민숙이가 6학년으로 올라운 뒤에는 사정이 좀 달라졌다. 그처럼 지켜오던 1등 자리를 다른 아이한테 내주고 난생처음 2등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숙이의 실력을 굳게 믿고 있었던 선생님 역시 이럴 수는 없다는 듯 종례 시간에 민숙이를 불러내더니 조용히 물어보게 되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네가 1등 자리를 양보하다니 말이야. 하지만 너무 걱정 밀고 조금만 더 노력해 보렴, 비록 등수는 2등이지만 점수만큼은 아주 좋은 편이니까 말이야, 그까짓 등수가 무슨 관계가 있니? 성적만 좋으면 그만이지. 안 그러니? 민숙아.”


“…….”


민숙이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이랫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만저만 기분이 상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1등 자리를 빼앗기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친구들 앞에서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시 한번 다독이며 용기를 주고 있었다.


"자, 너무 걱정말고 다음번에는 더 열심히 공부해서 당당히 1등 자리를 되찾아보도록 하자, 알았지?“

“…….”


“자, 그럼 이번에는 우리 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1등을 한 박영구 잠깐 일어서 보렴.“


영구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조금은 민망한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만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고 많았어요. 자, 다 함께 힘찬 축하의 박수!”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교실이 떠나갈 정도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영구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부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 그럼 이번에는 계속 1등을 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2등을 하게 된 김민숙이도 일어나 볼까?”


민숙이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이섰다. 그러자 의외라는 듯 여기 저기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민숙이가 어떻게 된 일이지? 민숙이가 2등을 하다니 말이야.”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래. 인제나 1등은 민숙이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니. 특허를 낸 건 아니지 않니?"


"아마 ’이동 공부방‘이 요즈음엔 전보다 이동 공부방을 덜 이용했던 거 아니야?”

“하하하……. 정말 그런 모양이구나!”


"호호호……. 그럼 앞으로는 길바닥 공부방을 더 열심히 이용해야 되겠는걸. 호호호……. "

교실은 저마다 제멋대로 시끄럽게 지껄이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손뼉 치는 소리가 한데 어울려 너무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민숙이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했다. 결국, 책상 위에 푹 엎드더니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아니, 이동 공부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선생님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아이들을 둘러보며 묻게 되었다.


“어휴, 선생님은 여태 그런 것도 모르고 계셨어요?”


끼어들기를 잘하는 영만이가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이번에도 먼저 선생님에게 되묻게 되었다.

"으음, 내가 그걸 어떻게 아니? 정말 처음 듣는 소린데?“


"민숙이는 원래 아무 데서나 책을 펴놓고 공부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아마 창피한 걸 모르는 모양이에요.”

"아무데서나 공부를 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이유, 해, 면 숙이는 문득 궁금한 것이 있으면 누가 흉을 보든 말든 길바닥이나 운동장, 그리고 어떤 때는 화장실에까지 책을 들고 들어가서 공부를 한대요.”


화장실이란 말이 나오자 아이들은 갑자기 웃음보를 터뜨리며 제각기 한 마디씩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하하하……. 민숙이는 아마 구린내도 모르는 모양이지? 하하하…….“


"구린내 뿐이겠니? 지린내는 안 나고? 호호호…….“


"하하하……. 아무튼 그래서 공부를 잘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우리 반의 명물임에는 틀림없다니까.”


아이들이 제멋대로 떠들며 웃어대자 선생님은 조금 엄한 목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다.

“야, 이 녀석들아, 좀 조용히 하지 못하겠니? 친구한테 그렇게 창피를 주어도 되느냔 말이야?”


그 바람에 아이들이 좀 조용해지자 선생님이 아이들을 향해 다시 묻게 되었다.

“아하! 그래서 '이동 공부방'이란 별명을 붙여지게 되었단 말이지 지?”

“맞야요. 항상 아무 데서나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니까 그게 바로 이동 공부방 아니고 뭐겠어요?”


선생님은 그제야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면서 그제야 다시 민숙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으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선생님은 민숙이가 지금까지 그토록 성적이 우수했던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대우 대견스럽고도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한동안 민숙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아이들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그 방법이 어떻든 칭찬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민숙이가 아무 데서나 공부를 하는 창피를 모르는 친구라고 놀려 댔는데 바로 그렇게 놀려댄 친구들이 부끄럽고 창피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그것을 뒤로 미루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배우고 익히겠다는 생각과 태도, 바로 그 정신을 우리는 본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민숙이처럼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어요. 그리고 민숙이의 그 훌륭한 정신을 앞으로 선생님도 그대로 실천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계적으로 이름난 발명가 에디슨의 말처럼 천재는 그냥 가만히 놀고 앉아서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천재가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두뇌보다는 꾸준한 노력이 더욱 중요하며 그 어떤 유혹이나 비난도 참고 견디어 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길게 설명을 하는 동안 교실 안은 차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숙이의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그 정도로 쉽게 가라앉을 리는 없었다. 다만 앞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기이이 영구를 이기고 다시 1등을 차지해야 되겠다는 각오만이 점점 더 굳어가고 있었다.

’치이, 새로 전학을 온 주제에 감히 1등 자리를 빼앗아? 다음 달 시험부터는 어림도 없을걸!‘

민숙이는 새로운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곁눈질로 영구를 바라보게 되었다. 영구는 여전히 매우 만족한 표정이 되어 여뮤만만한 듯 선생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지금 민숙이의 머릿속은 온통 영구를 꼭 이겨보겠다는 생각만이 가득차 있었다.

한 달 전에 다른 학교에서 새로 전학을 온 영구가 공부를 그렇게 잘할 줄은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그런데 전학을 오사마자 한 달만에 건방지게 남의 자리를 빼앗다니 정말 억울하고 분해서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민숙이가 이번에는 문득 엄마 아빠의 무서운 표정이 떠올랐다. 왜,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고 아빠와 엄마가 번갈아 기며 심하게 호통을 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엄마, 아빠, 용서해 주세요. 다음 달에는 반드시 1등을 되찾고 말거예요.’


사실 민숙이는 지금 1등을 빼앗긴 억울하고 분한 마음도 컸지만, 그보다는 엄마와 아빠한테 무서운 꾸중을 받게 될 일이 더욱 큰 걱정거리였다.

민숙이의 엄마와 아빠는 누구 못지 않게 인자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자식 공부만큼은 그게 아니었다. 지나칠 정도로 엄하고 무서운 분들이었다.


특히 엄마보다는 아빠가 더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아빠 때문에 지독한 아픔과 뼈아픈 고생을 겪어야 했던 지난 날의 뼈아픈 추억이 문득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민숙이가 3학년이 된 어느 해 겨울 방학 때에 있었던 일이었다.


며칠 푸근하던 날씨가 그날따라 저녁때부터 기온이 곤두박질을 치면서 싸늘한 찬바람이 불어대고 있었다. 연탄불이 아직 올라오지 않았는지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손발이 얼고 뺨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그날따라 일찍 저녁을 먹고 난 민숙이는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머리만 내놓은 채 몸을 녹이고 있었다.


“오늘 해야 할 공부는 다 마쳤니?”


엄마가 자리에 누워 두 눈만 깜박이고 있는 민숙이에게 물었다.


"일기만 쓰면 되는데 오늘 일기는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추워서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써야 되겠어, 엄마.”

"너 그러다가 아빠한테 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니? 너 아빠 성격 몰라서 그래?“


"아니야, 내일부터는 미리미리 제때에 잘 쓸 테니까 걱정마 엄마.”


그리고 조금 뒤, 퇴근한 아빠가 몹시 춥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집으로 들어섰다.

"아니, 웬놈의 날씨가 갑자기 이렇게 추워졌지? 자칫하다가는 얼어죽기 딱 알맞겠는걸.“

아빠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는 우선 아랫목에서 어느새 잠이 든 민숙이를 보고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다.

"아니, 이 녀석이 오늘은 어쩐 일로 벌써 잠이 들었나 보네?“


”아마 오늘은 몹시 피곤했나 봐요. 조금 전까지 공부를 하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가더니 금방 잠이 들었나 봐요.“


아빠는 몹시 귀엽다는 듯 잠이 든 민숙이의 표정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보, 얘가 요즈음 방학 숙제는 계획표대로 잘 하고 있는 거요?“


"네, 그런데 아마 오늘 일기만 못 쓰고 다른 건 계획표 대로 다했다나 봐요. 그리고 오늘 일기는 너무 피곤해서 내일 쓰겠다면서 조금 전에 잠이 막 들었나 봐요.“

엄마의 설명을 들은 아빠의 눈빛이 갑자기 사납게 일그러지더니 안 되겠다는 듯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 뭐야?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그래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룰 게 있지. 이 녀석, 아무래도 오늘은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아야지 이거 안 되겠는걸.“


아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엄마가 더럭 겁이 나서 다시 물었다.

”아니 내일 쓰겠다는데 그까짓 걸 가지고 왜 그러세요? 그럼 금방 잠이 든 애를 깨워서 무얼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그러나 현직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아빠의 고집은 그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아암, 아주 작은 일 같지만 그런 걸 그대로 넘기고 또 넘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아주 나쁜 버릇으로 굳어지는 거라니까. 그리고 그건 진정한 자식 사랑이 아니라니까. 생각을 좀 해봐요. 아무리 춥고 귀찮다고 오늘 배가 고픈데도 그대로 참았다가 내일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느냔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일기를 밥 먹는 일에 비교해요? 일기는 일기이고 밥 먹는 일은 밥 먹는 일이지, 안 그래요?”


“그게 바로 당신하고 나하고 맞지 않는 생각이라니까. 그러니까 나쁜 습관은 고질병이 되기 전에 당장 고쳐야 해. 좀 매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민숙이한테도 그게 좋다는 걸 알아야 해요.”


이렇게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아빠는 당장 곤히 잠이 든 민숙이를 깨웠다.


"너 오늘 일기를 안 썼다지? 아무리 피곤하다고는 하지만 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잘 자격이 없는 거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자, 어서 나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아빠는 곧 민숙이게 베고 있던 베개와 이불을 번쩍 들더니 금방 잠에서 깨어 정신이 어리둥절한 민숙이를 데리고 마루로 나갔다.


“자, 아빠도 오늘은 여기서 너하고 같이 잘 테니 오늘 밤은 좀 춥더라도 고생을 하면서 반성을 할 줄 알아야 해. 알겠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민숙이가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아빠에게 사정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사정을 하고 있는 민숙이의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빠, 그럼 지금 일기를 다 쓰고 방에서 자면 안 돼요?"

“안 돼. 모든 게 때가 있는 거야. 자 어서 자자니까.”


민숙이는 어쩔 수 없이 엄마와 아빠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아빠의 옆자리에 누웠다. 단독 주택의 마룻바닥은 난방이 되지 않아 얼음장처럼 몹시 찼다. 금방이라도 감기가 걸릴 것만 같았다.


옆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엄마가 안절부절을 못하며 아빠에게 다시 사정을 하게 되었다.


"어이구,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그러다가 심한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제발 이번 한번만 봐주세요, 네?”


“그런 걱정말고 당신이나 어서 들어가서 자요. 버릇 한번 고치려는데 그까짓 감기가 무슨 걱정이야?”

“나 혼자 따뜻한 방에서 잠이 오겠어요? 당신도 고집을 부릴 게 있지 정말 너무하세요.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까짓 일기 하루치를 안 썼다고 이게 뭐냔 말예요?”


엄마는 그만 울상이 되어 아빠한테 매달리며 사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빠는 버럭 성질이 나서 엄마한테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당장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민숙이의 장차 앞날이 더 중요하단 말이야. 당신,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왜 토끼가 졌는 시 알고 있지? 자기 재주만 믿고 게으름만 피우다 결국 그 꼴이 된 게 아니냔 말이야. 당신은 아무 참견 말고 그저 잠자코 있기나 해요.”


정말 무서운 아빠였다. 그날 밤 세 식구는 얼음장처럼 찬 마룻바닥에 눕거나 앉아서 꼬박 새우게 되있다. 민숙이도 달덜 떨면서 한숨도 자지 못하고 죽을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일기를 쓰지 못한 죄 때문에 엄마와 아빠까지 고생을 하게 된 일에 대해 더욱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무서운 일을 겪은 뒤부터 민숙이는 결코 그 해야 할 공부를 다음으로 미룬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 뒤부터 모르는 것이니 궁금한 것이 있을 때 역시 그때그때 해결하는 버릇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 데서나 책을 펴고 공부를 하는 버릇이 생겼고 자신도 모르게 습관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워낙에 공부를 잘하기도 했지만, 그런 습관 덕분에 민숙이의 성적은 다른 아이들이 감히 따라갈 수가 없을 정도로 항상 반에서 1등을 독차지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런 민숙이가 6학년으로 올라오자마자 영구란 아이한테 어이없게도 1등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부터 민숙이는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 계획표를 철저하게 찌놓고 책과 밤낮으로 씨름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입맛조차 잃고 매일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느라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끔 코피를 주르르 흘리기도 하였다.


이제는 그런 민숙일 보고 걱정이 된 엄마와 그 무서운 아빠가 몸을 생각해서 좀 쉬어 가면서 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었다. 전혀 부끄럽거나 창피한 줄도 모르고 길바닥에서 책을 펴놓고 공부를 하는 버릇도 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그래,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영구'를 물리치고 꼭 1등을 해야 돼!“


한동안 어느 전선주 밑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수학 문제를 풀고 있던 민숙이는 문제가 다 풀렸는지 다시 가방을 챙기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가고 있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민숙이의 그런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지만 민숙인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런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이지 않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다시 열심히 생각하며 걸어가고 있는 민숙이의 머리 위로 오후의 밝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 )



< '우등생의 이동공부방' 도서출판 문공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