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생태학’에 대하여·1

by pdh

어두운 생태학은 생태적 알아차림(ecological awareness),

어두운 우울함이다.

-티머시 모턴



아버지는 왜 개를 죽였을까? 아버지를 변호하자면, 개 잡는 풍습은 그때도 있었고 그보다 더 먼 과거에도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을 뿐이다. 그 개는 트라우마에 직면했을 것이다. 단,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트라우마란 살아남은 자의 신체적 증상이다. 모든 동물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트라우마는 생존의 증거다. 사자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친 누, 얼룩말, 임팔라 들은 트라우마를 겪는다. 호랑이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야생에서의 생존은 트라우마 자체다. 죽어버린다면 트라우마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트라우마가 남달리 보이는 것은 인간은 동물 중에서 죽음의 가능성이 가장 낮은 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의 야생과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문명의 안전망 속에서 지내다 날것의 죽음이 달려드는 순간 인간은 자지러지게 놀라며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트라우마는 비인간이 출현하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신체가 비체화되고 야생의 동물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생존의 위험에 노출될 때 비인간으로서의 신체적 자각이 발생한다. 몸속에서 돋아나는 칼끝처럼 비인간이 우리 인간의 온몸을 찌른다. 우리 몸이 먼저 안다. 우리 인간도 쉽사리 죽어서 썩어갈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 사체가 썩어가듯 우리 역시 얼마든지 썩어갈 수 있다. 우리 신체는 자신이 아닌 것들로 둘러싸여 있고 그것으로 인해 살아가지만 죽을 수도 있다. 다른 짐승처럼, 벌레처럼, 우리의 몸도 썩는다는 사실에 대한 신체적 자각이야말로 인간에 필요한 트라우마다. 이 사실을 신체적으로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우울은 필요한 우울이다. 이 우울은 비체화된 우리 신체를 응시케 하는 정관(靜觀)의 힘이다.


우울은 “정확”한 것이다. 이 우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피부·오염·위 박테리아·다른 생명체의 DNA·흔적 기관(꼬리뼈처럼 퇴행한 기관-인용자)으로 덮여 있고 또 가득차 있다는 것”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화 없는 비체화, 애도 없는 멜랑콜리아”(티머시 모턴, 안호성 역, 『어두운 생태학』, 갈무리, 2024, 210-212쪽)다.


하지만 나르시시즘은 우울을 감춘다. 우리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므로 우리는 자연의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이데올로기가 생태적 나르시시즘이다. 지구 위에 사는 종(種)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생태적 나르시시즘에 갇힌 상태다. 농업이 시작된 1만 2천 년 동안 말이다. 농업은 인간 문명과 그 바깥을 분리함으로써 ‘자연’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인간은 농업을 통해 자연 개념을 발명하고 스스로 인간이 포함된 생물권의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인간은 외부자로서 ‘자연’을 바라본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에 동일시된 자연으로 “1만 2천 년 된 인간의 산물”이다. 그래서 “‘자연’은 지금까지 고안된 가장 느리고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대량 살상 무기”다.(티머시 모턴, 앞의 책, 20, 110쪽) 인간은 ‘자연’의 외부자로서 ‘자연’을 즐겁게 학살한다.

그것은 일종의 조광증이다. 인간이라는 종(種) 홀로 즐겁게 미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보다 깊이 우울해질 필요가 있으며, 트라우마를 충분히 느낄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 인간은 생물의 몸으로 생존한다는 자각 그 자체가 일종의 트라우마를 유발한다. 우리는 쉽게 죽을 수 있다. 자동차에 치여도 죽고 공사장에서 추락해도 죽고 가스에 질식해도 죽고 길에 서서 압사당해 죽기도 한다. 배가 침몰해도 죽고 비행기가 추락해도 죽는다. 우리 인간의 몸은 수만 년 전의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 사실을 잊고 지내다 그것을 신체적으로 확인하는 순간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신체의 기억은 관념의 기억을 압도한다. 물과 불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자는 그 순간의 공포를 그 몸이 기억한다. 그것이 트라우마다. 우리 인간은 트라우마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문명을 발전시켜 왔으나, 트라우마는 궁극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트라우마는 생존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트라우마다.


인간의 자아는 다른 동물에 비해 매우 발달했다. 그래서 인간의 트라우마는 다른 동물에 비해서 치명적이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야생의 동물들은 빈번하게 트라우마 상황에 노출되겠으나 이들은 야생의 일상을 순조롭게(?) 영위한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야생 동물의 트라우마가 항상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가 그들의 신체 감각의 조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인간은 트라우마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것이 인간 문명의 전개 과정이다. 개인적 폭력과 집단적 폭력에 대한 억제가 인간 문명의 발전에 연루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 자아의 존엄과 고유 권한이 강화될 수 있었다. 그것이 폭력에 노출되고 참혹하게 부숴질 때 인간은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생존의 자명성과 자아의 존엄성이 훼손될 때 트라우마는 인간을 지배한다.


존엄성은 인간에 부여된 특권이다. 그 존엄성이 인류라는 종(種) 내부 깊숙이 들어와 인간 개체들마다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다. 민주주의는 인류를 이루는 각 개체들의 존엄성을상징적으로 보장한다. 각 개체의 존엄성을 침범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자아와 ‘너’의 자아는 뚜렷한 경계를 이룬다. ‘나’와 ‘너’는 함부로 누군가의 몸을 만질 수 없다. 욕설을 퍼부을 수도 없다. 신체와 자아는 뚜렷한 경계를 이룬다. 그 경계는 문명이 발전시킨 법과 윤리에 의해서 보장된다. 이것이 현대의 문명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몸은 그 경계를 영구적으로 보장받지 못한다. 언제가 죽기 때문이다. 숨이 멎는 순간 자아는 서서히 멈추고 말 것이다. 인간의 몸은 먼지로 흩어지고 분자와 원자로 분해된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러니까 숨을 쉬고 음식을 섭취하고 배출하는 동안에도 인간의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끊임없이 교체된다. 인간의 세포를 구성하는 원자의 교체 주기는 생화학자 후쿠오카 신이치의 연구에 따르면 6개월이다. 인간의 몸은 “흐름,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몸의 경계는 있으나 그 경계를 넘어서 물질이 지속적으로 이동한다. 루돌프 쇤하이머는 말한다. “생명이란 대사의 계속적인 변화이며, 그 변화야말로 생명의 진정한 모습이다.”(후쿠오카 신이치, 김소연 역, 『생물과 무생물 사이』, 은행나무, 2011, 133-143쪽) 원자 혹은 분자 수준에서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다만 몸의 형체를 입은 내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생한 ‘자아’가 존재함으로써 ‘나’와 ‘너’의 몸의 경계가 중요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자아’의 형태는 영구적이지 않다. 나이에 따라 우리의 자아는 끊임없이 변해간다. 타고난 신체 속으로 유입되는 외부 자극의 누적에 따라 자아는 지속적으로 변해간다. 자아는 신체 속으로 유입되는 외부 자극의 총체이다. ‘나’가 ‘너’에게, ‘너’는 ‘나’에게 외부 자극을 투여한다. ‘나’의 자아와 ‘너’의 자아는 뒤섞인다. 그렇다면 극히 일부의 경우겠지만, ‘나’는 ‘너’가 된다. ‘너’ 또한 ‘나’가 된다. 혹은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 ‘너’의 영혼이 ‘나’의 신경계로 들어온다면, ‘너’는 온전히 ‘나’가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너’가 될 것이다. 바디 스왑 (Body Swap)은 수시로 일어날지라도 우리는 그걸 알 수 없다. ‘나’가 ‘너’의 신경망 속으로 들어가면 ‘나’는 그냥 ‘너’가 될 뿐이다. ‘나’는 이전의 ‘나’를 전혀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나’와 ‘너’는 뒤섞인다. ‘흐르는 물질’의 형태로. 자아 또한 흐르면서 다른 몸속에 스며든다. 영혼이 존재하든 아니든 ‘나’와 ‘너’는 흐름의 과정 속에 존재한다. 즉 서로 흐르고 뒤섞이는 상태이므로 ‘나’는 ‘너’고 ‘너’는 ‘나’다.


그렇다. ‘나’는 ‘너’다. ‘너’일 뿐만 아니라 개이고 소이고 닭이고 돼지이다.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고 살아 있지 않은 모든 것이다. ‘나’는 죽어가는 모든 것이면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죽이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살아 있는 것에서 살아 있지 않은 것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흐르는 중이다. 눈알이 툭 튀어나오는 중이다.


*

그러니까 이 지구는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지 않은 것을 향해 흘러가는 악다구니 같은 비명이 가득하다.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듯이 수많은 생명이 죽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생명들을 죽인다. 수많은 소들이 죽는다. 수많은 돼지들이 죽는다. 수많은 닭들이 죽는다. 수많은 오리들이 죽는다. 죽고 죽는다. 2024년 기준으로 한우는 111만 5천 마리, 돼지는 1,903만 2천 마리, 닭은 10억 2,234만 9천 마리, 오리는 5,944만 2천 마리가 죽었다. 2025년도, 2026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균 1일 기준으로는 한우 3,055마리, 돼지 52,142마리, 닭 2,800,956마리, 오리 162,855마리다.한국에서만도축된개체수가그렇다.(축산문안전관리시스템사이트‘도축 기간별 실적’ https://www.lpsms.go.kr/home/stats/stats.do?statsFlag=butcheryperiod[검색일:2025.12.12.]) 도축이 아닌 죽음도 있다. 육계와 산란계로 구분되는 닭의 경우가 그렇다.


한승태는 축산업 노동 체험이 있는 작가다. 그에 따르면 산란계 품종의 알에서 부화되는 절반의 수평아리들은 태어나자마자 쓰레기로 버려진다. 정말 마대 자루에 산 채로 쑤셔넣는다. 쓰레기라서 최대한 많이 담는 과정에서 압사되어 작은 몸통이 터진다. 닭똥과 함께 갈려서 비료가 된다. 마대 자루에 담긴 채 운반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죽지만 죽지 않으면 산 채로 갈린다. 한승태가 일한 어느 부화장에서는 하루 태어나는 병아리가 7~8만 마리인데, 그중 절반에 해당하는 수평아리와 상태가 안 좋은 암평아리를 포함해서 최소 3.5~4만 마리가 그냥 쓰레기로 버려진다. 물론 이 죽음들은 통계에서 제외된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폐기 처리되는 산란계 수평아리가 4천만 마리다.(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시대의 창, 2018, 85-94쪽) 도축되는 닭의 숫자는 공식적인 통계보다 어마어마할 것이다. 닭들의 홀로코스트다.


밀집 사육 축사. 동물해방물결 홈피 캡처3.JPG <고밀집 양계장-동물해방물결 홈피 캡처>


부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가축 전염병 파동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조류 독감이 발생할 때마다 수많은 가금류가 살처분된다. 2003,4년에 살처분·매몰된 닭과 오리가 58만 5천 마리, 2006,7년에는 280만 마리, 2008년도에는 무려 813만 8천 마리다.(국립수의과학검역원, 『2008년 2/4분기 가축전염병중앙예찰협의회 자료』, 2008.7.1., 42쪽) 구제역 파동은 또 어떤가. 2010년과 2011년 사이의 구제역으로 인한 가축 매몰은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2010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발생한 구제역으로 인해 350만 마리의 소와 돼지 등이 살처분되었다. 살처분의 방식은 매몰, 즉 생매장이다.(생매장을 선택하는 이유는 비용 절감 때문이다.)


구제역 파동 돼지 매몰 현장. 이미경 의원실.JPG <구제역 파동 돼지 매몰 현장-이미경 의원실>


인간은 가축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그냥 고기다.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보이지 않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오늘날의 공장식 축산 경영은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나온 것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인간이 인간을 대량 학살하는 아우슈비츠의 시스템이 오늘날의 공장식 축산과 도축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찰스 패터슨, 정의길 역, 『동물홀로코스트』, 휴, 2014) 가축을 대량 학살하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인류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 가축이 존재하는 한, 인류가 인류를 가축 취급하는 악(惡)의 정치가 또다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가축들은 고깃덩이에 불과한가? 그들은 인간이라는 종(種)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보 저장 ‘노드’들이다. 다시 말해 생명체다. 좀 더 복잡한 정보 저장 ‘노드’를 가진 종(種)이 그렇지 못한 종(種)을 필요에 따라 공장식으로 대량 번식하고 대량으로 학살한다. 그러나 자아(주체) 중심주의를 벗어나 정보 그 자체에 주목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대량 학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정보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는 행위도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다. 식물이 땅으로부터 영양소를 빨아들이듯, 동물은 다른 생명체를 흡수한다. 섭식 행위는 물질이라는 정보의 교환이다. 먹고 먹히는 것이다. 그 과정의 특수한 노드 속에서 의식이 발생한다. 의식은 먹고 먹히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가장 고도화된 정보의 자기 인식이다.


하여, 고도의 의식을 가진 우리가 마주해야 할 어두운 우울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나’가 곧 ‘너’라는 이 끔찍하고도 명징한 연결성에 대한 신체적 떨림이다. 이 비참한 흐름 속에서 ‘너’의 비명이 곧 ‘나’의 비명이 되어 온몸을 찌른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우울한 생태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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