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라는 사실에 대하여

by pdh

역사의 모든 이름들 그것은 나다

-니체


어쩌면 나의 의식은 순간적으로 다른 사람과 뒤바뀐 것은 아닐까?

-로저 펜로즈



비유가 아니다. 실재다.

내가 개라는 사실 말이다.


*


개를 잡는 사람들을 본 적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 개는 지금 아예 흔적도 없고, 개를 잡은 그들 중에는 이미 이 세상을 등진 이도 있다. 오전은 아닐 테고 아마도 오후였거나 해질녘이었을 것이다. 울산에 사는 작은조카사위가 왔다. 전포동에 사는 큰조카사위도 왔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멘트 마당에서 잘 놀고 있던 개(너무 오래 전이라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복실이’였는지도.)를 잡았던 것은. 개는 아마도 영문을 몰랐을 게다. 너무 놀랐을 게다. 나 역시 영문을 몰랐다. 영문을 모르는 와중에도 세계의 서늘한 기운이 온 동네를 한바탕 훑고 지나가는 것을 온몸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기억은 앞뒤 삭제되고 단 한 장면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개가 옥상 담벼락을 기어오르려 발버둥치고 있다. 그 장면을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내가 있다. 개의 눈과 헐떡임과 헛발질을 마주한 순간 시선을 거두어 들였지만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개는 발톱을 세워 하늘색 페인트를 칠한 시멘트 담벼락을 헛발질했다. 담벼락 중간에서 개는 떨어지지 않고 헛발질을 계속했다. 개의 목에는 나일론 밧줄이 걸려 있었다. 개는 목에 밧줄을 맨 채 옥상에서 내던져진 거였다. 개는 쉽게 죽지 않았고, 그럴수록 발바닥의 마찰력이 절박했으리라.


개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죽지 않아서 결국 망치로 머리를 내려쳤다고. 왜 굳이 옥상을 개의 교수대로 이용했을까? 망치의 직접적인 감각보다는 밧줄의 길이가 제공하는 비접촉의 거리감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게 더 마음이 편했을까? 하지만 옥상 바깥으로 던질 때의 그 느낌은 어찌하랴.


가끔씩 개의 그 눈이 떠오르곤 했지만, 슬프거나 괴롭거나 마음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냥 세계의 끔찍한 실상 중 한 단면을 본 듯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유년 시절을 벗어나 성인이 된 어느 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구포개시장에서 끌려가는 개를 보게 된다.


개는 옥상 담벼락에 매달렸던 개처럼 버팅기고 버팅겼다. 구포개시장 상점 진열대에는 구워진 개들이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뜬장 속에 갇힌 살아 있는 개들의 슬픈 눈이 있었다. 죽음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은 황갈색의 텅 빈 눈. 그즈음에 구포개시장에 관한 시를 썼던 것 같다.


컹컹, 끌려가는 개는, 무서운 황혼 치마 끝자락을 물고 늘어지는 개는, 개줄을 잡아당기는 검은 털 숭숭한 저 힘, 아, 개는, 눈자위가 뒤집어진 개는, 발톱을 아스팔트에 붙박은 채 발바닥의 마찰력을 절박하게 사랑하는, 저 탱탱한 삶의 붉은 탯줄을 낑낑거리며 핥아대는 개는, 끊어지지 않으려, 자궁의 검은 솥 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삶에 후줄근히 젖을 대로 젖은 개는, 흘레짓만큼 삶에 환장한 저 앞다리, 이미 죽음에 반쯤은 잠긴 저 떨림, 세계를 바라보는 마지막 저 흰 눈빛의 막막한 불어터짐, 뜯겨진 황혼 한 자락으로 뜨겁게 흘러내리는, 개소주 같은 어둠,

- 「개소주집 앞-풍경·3」 전문


운이 좋았다. 개로 태어나지 않아서. 그런데 내가 개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실 나는 개와 다르지 않다. 단지 운이 좋아서 인간의 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 ‘나’라는 영혼이 있어서 나의 신체를 떠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지 개의 신체로 가서 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나는 개의 신체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고 개 또한 나의 신체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다. 개의 신체로 가면, 나는 개다. 나는 개의 신경망 속에 들어앉을 것이므로 내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다시 인간의 신경망으로 돌아오면, 나는 인간이다. 내가 개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나의 의식은 ‘나’의 신경망에 감금되어 있으므로, 내가 개였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개 또한 개의 신경망에 감금되어 있으므로 개가 ‘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정말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매 순간마다 개와 인간의 몸을 오갈지라도 그것을 전혀 모를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내가 개를 죽인다면, 그건 내가 ‘나’를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가? 그건 알 수 없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말 대신 ‘의식’이라는 말을 쓰자. ‘의식’은 나를 대표하고 대리하기도 한다. 그것이 ‘자아’다. ‘자아’의 구성적이고 분열적인 특징을 강조할 경우에 ‘주체’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나’의 자아, 혹은 ‘주체’의 근간이 되는 의식은 도대체 뭔가. 그것은 우주의 정보가 흐르다가 신경망에 일시적으로 저장되는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사유의 기원은 앙리 베르그손이다. 그는 인간의 뇌를 ‘지각의 연장’으로 규정한다.(앙리 베르그손, 박종원 역, <<물질과 기억>>, 아카넷, 2009, 385면.) 이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예컨대 거미, 도롱뇽, 개, 인간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의 차이점은 뭔가. 의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들은 신경망의 복잡성 정도에서 뚜렷한 차이를 지닌다. 거미와 도롱뇽이 의식을 가지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형태적으로 인간보다 극미한 신경망을 지닌다. 외부의 자극이 저장되는 효과가 극미하다. 개는 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신경망을 갖추고 있다.


개에게도 의식이 있고 자아가 존재한다. 개가 삐진 행동을 하는 것이 증거다.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당했다는 불쾌감의 표시다. 자아의 존재 유무를 판단하는 거울실험이 있지만, 나는 이 표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삐짐’은 상대에 대한 공격성을 애정의 형태로 표현한 행동으로, 자아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표지다.


개와 인간의 차이는 물론 지능의 차이다. 지능의 차이는 외부의 정보가 저장되는 용량의 차이, 정보를 분류하고 재조직하고 새로운 정보를 추론하는 능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개와 인간은 딱 그 정도의 차이를 지닌다.


하지만 외부 정보의 저장 효과를 지닌다는 점에서 거미, 도롱뇽, 개, 인간은 동일한 생명체다. 다만 외부 정보의 저장 기간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이다. 비생명체인 바위는 외부 자극에 동시적으로 반응한다. 돌멩이 하나가 바위에 부딪힐 때 돌멩이의 운동에너지는 ‘딱’ 소리와 같은 음향 에너지와 열 에너지 등으로 변환되지만, 돌멩이라는 외부 자극이 바위 그 자체에 저장되지 않는다. ‘지각의 연장’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바위 표면에 극미한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무엇보다 바위는 신경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정보의 저장 기간은 거미, 도롱뇽, 개, 사람으로 올수록 길어진다. 인간은 지구 동물 가운데서도 외부 정보의 저장이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된다. 단지 그 차이다. 그 차이로 인해서 인간의 의식은 매우 섬세하고 복잡하고 예민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것인가? ‘나’라는 의식은 외부 정보가 저장되는 ‘효과’다. 인간의 공통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 효과가 각기 다른 이유는 신경망 구조와 기능의 유전적인 차이, 그리고 인간마다 주어지는 외부 정보의 질적·양적 차이 때문이다. 그래서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는 “우리는 정보 흐름의 통로이다. …지식이 자라기 때문에 특별한 통로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데이비드 도이치, 김혜란 역, <<진리는 뒤바뀔 수도 있습니다>>, 알에이치코리아, 2022, 419쪽)

양자 컴퓨터의 아버지,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



그렇다면 인간의 의식은 외부 정보가 생명이라는 유기체의 내부를 흐르는 과정에서 보다 과밀하게 저장된 특이성의 영역이다. 그것 역시 흐른다는 본질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다른 영역에 비해서 정보를 붙잡아두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 뿐이다. 즉, 그것은 거대한 정보의 네트워크 속에서 수많은 흐름이 교차하고 중첩되며, 잠시 동안 데이터가 응축되어 머무르는 연결점인 ‘노드(node)’와 같은 것이다.

‘노드’에 머무는 외부 정보로부터 의식이 발생하고 의식으로부터 자아(주체)가 형성된다. 그런데 그것의 본질은 흐른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자아의 절대성은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흐름의 한 과정에 불과하며 그 형태는 정보의 흐름에서 발생하여 신경망(뉴런 연합 체계)의 틀에서 일정 기간 유지되다가 흩어진다.

그렇다면 본질은 자아(주체)가 아니라 정보의 흐름이다. 모든 정보는 연결되어 있고 결국 어느 지점에서 잠시 고이고 머무를 뿐이다. 그것이 동물의 신경망이다. 우주의 분산된 정보는 매질을 통해서 흐른다. 동물이 신경망을 통해 정보를 저장하듯이, 식물 또한 뿌리와 관다발 조직 등을 통해 외부 정보를 저장한다. 생명체는 달리 말해 정보의 응축체라고 할 수 있다.


자아를 초월하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어느 노드에라도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거미에 안착하면 거미가 되고, 자작나무에 안착하면 자작나무가 되고, 개에게 안착하면 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영혼이 거쳐온 역사는 기억하지 못한다. 정보를 기억해 내는 기능은 ‘노드’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정보는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일정하고도 복잡한 경로를 따라 흐른다. 정보가 모여드는 우연한 노드의 효과가 바로 의식이고 자아(주체)다.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자아 본질주의, 또는 영혼 중심주의를 벗어나면, 아주 오래전 옥상 담벼락에 매달린 채 헛발질하던 개는 곧 ‘나’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개의 눈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의 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https://m.blog.naver.com/umbrella_webzine/224107319936

작가의 이전글진리의 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