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죽은 자, 그리고 지금 여기의 우리에 대하여
내가 처음으로 도둑질을 한 것은 일곱 살 무렵이다. 동네 점방에서 초록색 거북이 장난감이 포함된 껌을 오십 원을 주고 샀는데, 고장난 거북이 장난감이 문제였다. 바닥에 대고 움직이면 거북이 목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장난감이었으나, 한두 번 쓰자마자 고장이 난 거였다. 용돈을 다시 받기가 힘들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는 그 껌 장난감을 훔치기로 결심한다. 마음에 울렁증이 찾아온 것 같기도 하다. 사오십 대의 주인 아주머니는 점방 입구 왼쪽에 있는 방안에서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던 것이 또렷이 기억난다. 조악한 판자로 만든 매대(賣臺)를 한 바퀴 둘러보는 척 하면서 나는 슬쩍 거북이 껌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점방을 빠져나왔다.
점방을 빠져나오는 순간에 감각되던 내 심장의 느낌을 무어라고 말해야 할까. 비유하자면, 드라마 <삼체>(2024)에 나오는 나노섬유가 내 심장을 스윽 가르며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반으로 잘리지는 않았지만, 내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고 오염되기 시작했다는 최초의 느낌이 아니었을까. 고장난 장난감과 훔친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가슴을 죄여오는 알 수 없는 기분은 죄책감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나는 그것을 소스라치며 떨쳐내려고 했던 것 같다.
이 최초의 악행은 지금도 최후의 악행을 향해 가는 연속체의 시작을 이룬다.
살아가는 과정이 곧 악행의 연속이 아닌가. 악행은 아니어도 자괴와 수치를 유발하는 비행(卑行)과 추행(醜行)과 난행(亂行) 들 따위 또한 악행의 점선 사이에 수없이 들어앉아 있을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휘감는 저 숱한 행위들의 연속체 한가운데 주저앉은 숱한 순간들의 나 자신‘들’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때아닌 소리를 지르거나 머리카락을 쥐어뜯거나 이불킥을 하거나 입술을 깨물거나 하는, 그럼에도 엇비슷한 행위를 반복하거나 반복하려 하는, 해결책조차 없는 무참한 삶.
유년의 저 작은 비행으로 삶의 모든 악행들을 고백한 것으로 ‘퉁’치고자 하는 욕망이 여전히 나를 지배한다. 차마 말할 수 없는 악행들. 극한으로 줄여서 말하는 악행의 ‘제유’일 뿐이다. 나의 행위를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는 사실에 대한 안도는 잠시일 뿐, 그 어린 나이에도 그 행위는 어딘가에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는 불길한 확신은 지금도 여전히 확신으로 남아 있다. 아무도 몰라도 신은 알지 않느냐, 신이 없다 하더라도 내가 알지 않느냐, 내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내가 행한 그 행위는 여전히 과거 속에 남아 있지 않느냐. 그런 생각이 나를 지배했던 것 같다.
나의 행위는 여전히 과거 속에 실재한다. 그렇다면 과거는 정말 실재하는 것인가. 시간에 관한 철학의 한 입장인 영원주의(eternalism)에 따르면 그렇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 신경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의 시간이란 기껏해야 2초다. 우리의 뇌가 재구성해내는 현재의 감각적 시간은 2초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현재 속에 감금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과 예측력을 환기해보라. 현재에 감금된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살아간다. 과거의 고통,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기억과 예측에 의지한다. 실재가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실재한다. 이것이 현재주의(presentism)다.
시간의 축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인지적 한계로서는 현재주의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시간의 축을 벗어나는 존재가 있다면? 3차원을 벗어나 이 세계를 바라본다면? 과거, 현재, 미래는 ‘이미’ 하나의 블록으로 실재한다. 과거는 여전히 그곳에 있으며, 미래 또한 이미 저곳에 실재한다. 여전히 나는 그곳에서 그 거북이 장난감을 훔치고 있고, 수많은 악행의 연속체로서 실재하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악행의 미래 역시 저곳에 실재한다.
천 가지의 선행이 한 가지 악행을 이겨낼 수 없는 없는 노릇이다. 기억 속에 또렷한 것은 선행이 아니라 악행이다. 악행인지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했던 숱한 저 행위들은 과거 속에서 현재의 나를 가리키고 있다. 그런 수치와 자책이 현재의 나와 미래의 악행을 성찰하고 대비케 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나올 수밖에 없다. 현재가 과거를 바꿀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이미 과거는 불변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이 역사의 문제로 옮겨간다면, 인류의 불가역적인 운명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소설가 한강 역시 이 문제에 골몰한 바 있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너무나 시적인 것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시인이기도 한 한강이 노벨문학상 강연문에서 언급했듯, “이십 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다는 문장들”이다. 과거의 비극을 되돌리려는 열망은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것이다. 과거의 죽은 자를 현재의 산 자가 구하고자 하는 열망들. 그 열망들은 언제나 가뭇없이 바스라져 간다. 죽은 자는 여전히 죽은 자이고 학살의 과거는 여전히 학살의 과거다. 과거의 역사가 변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저 물음에 대한 답은 분명한 것이다. 도울 수 없고 구할 수 없다. 그래서인가. 한강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쓰기 위한 자료를 읽는 과정에서 위 질문들의 불가능성에 좌절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전남도청에서 죽음을 맞이한 박용준의 일기 속 두 문장((“하느님, 왜 저에게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앞에서 저 문장들을 뒤집는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시민저항군 박용준은 1980년 5월의 전남도청에서 고백한다. 살고 싶다고. 하지만 양심 때문에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박용준이 남긴 육성 앞에서 한강은 광주 이야기를 쓸 힘을 얻는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 셈이다. 그래서 ‘현재/과거’, ‘산 자/죽은 자’의 관계는 위의 질문처럼 역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십 대 중반의 한강이 늘 일기장 맨 앞페이지에 적었다는 저 위의 문장들(“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듯이,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단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상호작용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장면일 뿐이다. 과거의 죽은 전태일이 수많은 노동자를 구했듯이,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장면들은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 반대의 장면들은 우리가 확인할 수 없을 따름이다. 과거의 죽은 자는 여전히 과거 속에 있으므로, 그들의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발터 벤야민의 말을 떠올려 보라.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指針)을 지니고 있다.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더는 알지 못했던 자매들이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쟀던 모든 세대와 미약한(schwach)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중
(발터 벤야민, 최성만 역, �발터 벤야민 선집·5�, 길, 2015, 331-332쪽)
발터 벤야민은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指針)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누구에게? 물론 과거 세대의 사람들에게다. 과거의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를 기다려왔는 것이다. 왜? 여기에서 발터 벤야민의 삶에 대한 비의적(秘義的) 인식을 감득할 수 있다. 벤야민은 과거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믿음에 대한 믿음’은 구전 설화와도 같은 허약한 망상에 지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시 벤야민의 다른 문장을 보자.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에게만 오로지 과거 속에서 희망을 불꽃을 점화할 재능이 주어져 있다.
-발터 벤야민, 같은 책, 334-335쪽.
이 문장들은 벤야민 연구자들에게도 논란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문장들을 뒤틀어서 해석하지 말자. 있는 대로 마주하자. 위 내용 중에서 눈여겨 봐야 하는 것은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미 죽었는데 왜 안전하지 못한가? 벤야민의 역사관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벤야민은 프랑스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의 ‘영원회귀’론을 비판적으로 언급한다. 우선 블랑키의 영원회귀론의 일부를 보도록 하자.
우리와 똑 닮은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무수히 존재한다. 양심상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 분신들도 살과 뼈가 있으며, 바지나 외투 또는 크리놀린 스커트를 입고 머리를 묶어 올리고 있다. 이들은 결코 유령이 아니다. 영원화된 현재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큰 결점이 있다. 진보가 없는 것이다. 슬프다. 단지 저속한 재현과 반복뿐.
-Blanqui, trans. Frank Chouraqui, Eternity by the stars, Contra Mundum Press, 2013, p.147.
(번역은 조형준이 번역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2005)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블랑키는 이 우주의 모든 운동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달빛에 비치는 거미줄조차 똑같이 반복된다고 말할 정도다.(이 표현은 니체의 영원회귀 서술에도 영향을 준다.) 그래서 혁명가 블랑키는 절망한다. 이 우주에는 반복만이 존재할 뿐 진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블랑키의 절망을 단호히 반박한다. 그 이유는 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도 그렇지만, 영원회귀 역시 “신화적인 사고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영원회귀에서 ‘회귀’는 신화적 사건의 본질에 해당하며 영원회귀에 대한 믿음은 “마법의 환 속에서의 삶”에 대한 신화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발터 벤야민, 조형준 역,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 2005, 360-361쪽)
블랑키는 과거의 영원한 반복을 주장하지만, 벤야민은 단호히 그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단호함을 보다 선명히 하지 못한 것은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잠언적인 문장에서 머물 뿐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어서 말한다. 저 잠언적인 문장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에게만 오로지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재능이 주어져 있다”고. 무슨 말인가. 과거는 영원히 반복될 터이나 얼마든지 현재의 우리(역사가)가 과거의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블랑키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는 영원회귀에 절망하지만, 벤야민은 과거의 영원한 회귀(반복)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얼마든지 ‘차이’를 기입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차이를 통한 반복’을 내포하는 영원회귀의 사유에 맞닿는다. 과거의 죽은 자는 여전히 죽고 있고 또 죽고 있지만, 학살이 아닌 다른 삶의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우리가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과거의 죽은 자들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고 확률(probability)로 존재하듯이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도 마찬가지다.
블랑키와 니체, 그리고 벤야민이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1957)을 ‘미리’ 알았더라면 환호했으리라. 휴 에버렛은 이 세계는 무수히 분기하고 있으며, 무수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그것을 증명해 놓았다. 적어도 양자컴퓨터의 세계에서 휴 에버렛의 세계관은 증명되고 있다. 현재 양자컴퓨터 분야 개척자로 유명한 양자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는 존 휠러의 대학원생이던 1977년 봄, 존 휠러가 에버렛을 텍사스 대학에 초청하여 개최한 ‘다세계 해석’ 세미나에 참여하여 에버렛을 만나게 된다. 그는 열렬한 다세계 해석의 지지자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다세계 해석을 지지한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정확한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의미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우주 가지(branch)를 굵게 만든다”
“당신이 성공적인 인생을 산다면, 당신의 분신들 역시 같은 결정을 내림으로써 성공을 누린다.”
“당신의 선행은 좋은 일이 일어나는 다중우주 부분을 더욱 키운다.”
-토비아스 휘르터·막스 라우너, 김희상 역, �평행우주라는 미친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알마, 2016, 285쪽.
‘다세계 해석’에서는 우주가 지속적으로 분기해나감으로써 여러 개의 우주가 존재하고 인간 개체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 역시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는 신화적인 믿음이 아니라 수학적 계산에 의한 믿음이며 적어도 양자컴퓨터 내에서는 이미 실현되고 있는 물리학적 ‘믿음’이다. 그리고 도이치는 각 우주 가지 사이에 존재하는 각 분신들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고 말한다. 분기된 세계는 인과적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만, 데이비드 도이치는 휴 에버렛의 보편적 파동 함수(닐스 보어의 코펜하겐 해석이 주장하는 파동함수 붕괴에 대한 반박 이론)에 근거하면 다세계 사이에는 미시적인 양자 세계와 마찬가지로 간섭효과가 존재한다고 말한다.(David Deutch, Fabric of Reality, Penguin Books, 1997, p.216)
무수히 반복되면서 분기하는 이 우주 속에서 우리의 역사 또한 반복되고 분기한다. ‘나’의 역사 또한 반복되면서 분기한다. 그리고 현재의 ‘나’의 선택에 따라 다른 세계의 ‘나’에게도 영향을 주고 우리의 역사가 다른 세계의 역사에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 세계의 과거와 다른 세계의 과거는 달라질 가능성은 없는가. 벤야민의 말처럼, 영원회귀하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안의 악행들과 적들과 투쟁한다면 우리 역사의 반복되는 과거 역시 달라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퇴행(패퇴)하는 순간, 과거의 죽은 자는 다시 학살의 위험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이것이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한다”는 문장의 참된 의미가 아닌가.
나는 무엇을 열망하는가. 나선형으로 영원회귀하는 역사의 진보가 아닌가. 현재의 나를 통해 과거의 나를 변화시키는 것, 역사를 변화시키는 것, 그리하여 인류를 변화시키는 것.
시는 오랫동안 다른 세계를 열망해왔다. 시의 저류(底流)에 자리하는 것은 바로 이 열망이다. 이 세계의 수많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무한하게 분기되어가는 또다른 나의 주체들과 타자들. 그것을 가능태, 혹은 잠재태로 불러도 좋을 것이며, 아름다운 꿈이라 불러도 좋으리라.
그러한 시의 열망이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넘어서 과거를 도울 수 있고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벅찬 일인가. 시의 열망이 인류의 마음에 깃들 때,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구원할 마음의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시는 구원을 위한 인류의 근원적인 심연을 이룬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20대 중반의 한강이 간직했던 저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은 이미 오래된 물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는 ‘이미’ 그 답을 간직하고 있다.
엄브렐라. 2025년 [봄호 특집] https://blog.naver.com/umbrella_webzine/223790902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