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빛을 따라가셔야 합니다.
맑고 고운 빛을. 그 빛을 따라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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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무서움은 여섯 살 무렵부터였던가.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몹시 놀랐다. 언젠가 내가 죽는다는 명확한 사실이 나의 신체를 집어삼켰다. 철들고 난 뒤의 낱말로는 공포와 경악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하지는 않다. 온몸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전신을 휘감던 그것, 죽음이라는 것. 삶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나게 된 최초의 검은 구멍은 그 이전과 이후로도 만나지 못한 무서움이었다.
그렇다. 무서움. 내가 사라진다는 것, 내가, ……, 어머니도, ……, 아버지도, …… 그 누구도 그 누구를 살려주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이 ……, 모두, 사라져 간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사촌 누이도, 친구도, 어여쁜 강아지도 어디론가 사라져 간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그곳에 대하여 그 어떤 빛도 상상할 수 없었다. 어둠만이 둥그러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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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죽음에 집중한다. 시인 김혜순 또한 그렇다. 아빠의 죽음에, 엄마의 죽음에, 자신의 죽음에 온몸을 다하여 언어를 쏟아붓는다. 김혜순의 「미리/귀신」은 죽은 아빠를 뒤로 하고 식사를 하는 가족들의 신체적 슬픔을 비릿하게 드러낸다. 맑고 투명한 빛은 없다. 비릿한 빛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눈에서 나오는 빛을 빛이라 할 수 있을까. 눈에서 나왔다고 몸의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눈빛은 미리 귀신일까. 아빠 가고 석 달 열흘을 울고 방문을 연 엄마의 눈빛을 뭐라 할까. 280일간 검은 물에 떠 있다가 생전 처음 컬러로 된 내 얼굴을 마주 보던 내 딸의 눈에서 나오던 빛은 뭘까.
우리는 영혼의 뒤꿈치로 보는 걸까
우리는 선 채로 꾸는 꿈일까
식기 전에 먹자면서
생물의 시신을 나누는
가족의 눈에서 나오는
빛은 무얼까
-김혜순, 「미리/귀신」 부분(<<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19)
이 빛을 무어라 해야 할까. 맑고 투명한 빛은 아니다. 죽음에서 죽음으로 가는, 죽음으로밖에 연결되지 않는, 죽게 될 생물이 이미 죽은 생물들을 나눠 먹는, 죽음을 둘러싼 운명의 비릿한 날것의 빛이다. 빛은 망해 버렸다. 모든 생물의 빛은 망해버렸다. 급기야 엄마의 죽음이다.
“아빠 가고 석 달 열흘을 울고 방문을 연 엄마의 눈빛”도 꺼져간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보다 많은 나이로 죽어간다. 엄마의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부르며 죽어간다. 먼동이 트는 아침의 밝은 빛에 죽음이 물든다. 너무 환해서 세계를 불태우는 죽음의 세계.
늙은 엄마들이 자기보다 더 젊은 엄마를
엄마 엄마 부르며 죽어가는 이 세계
눈썹을 파르르 파르르 매미의 날개처럼 떨다가
불길처럼 솟구쳐 오른 젊은 엄마가
늙은 딸의 얼굴을 불태우고 가는 이 세계
-김혜순, 「먼동이 튼다」 부분(<<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문학과지성사, 2022)
외통수다.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태어난 순간. 벗어날 수 없다. 이미 태어났으므로. 언젠가 죽어야 하므로. 너무 명확하다. 그 어떤 논리로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시간을 멈출 수 없고 질질 끌려간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구멍 속으로. 끌려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그리고 당신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다.
투명한 빛을 따라가셔야 합니다.
맑고 고운 빛을. 그 빛을 따라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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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를 읽은 것은 스물다섯 무렵이다. 죽은 이를 위무하며 인도하는 49일간의 언어들. 죽음은 각자의 내밀한 가슴속에 턱 얹혀서 음울한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지만, 이 책은 그 음울한 기운들을 양지 바른쪽으로 인도하여 정갈한 언어로 잘 달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순환을 믿고, 그것을 형벌로 간주하며,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법을 책으로 전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슬픔과 놀라움을 함께 느꼈다. 혹은 모른다. 죽음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인류의 염원이 매우 오래된 것이며, 그 해결책이 완성되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다소 안도하게 되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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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사자의 서>>의 원래 명칭은 ‘바르도 퇴돌’이다. ‘바르도(Bardo)’는 ‘둘(do) 사이(Bar)’라는 뜻이다. ‘바르도’는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새로서 사람이 죽은 다음에 다시 환생하기까지 머무는 사후의 중간 상태를 일컫는다. 그 기간이 49일이다. ‘49재’의 기원이다. ‘퇴돌(Thos-grol)’은 ‘듣는 것으로(thos)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grol)’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르침’이다.(류시화, 「죽음의 순간에 단 한 번 듣는 것만으로」, 파드마삼바바, 류시화 역,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9, 11쪽)
이 가르침의 기원은 파드마삼바바다. 인도인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 티벳 불교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신화적으로 각색된 인물이다. 그의 이름 ‘파드마삼바바’가 ‘연꽃 위에서 태어난 자’라는 뜻이니, 다른 것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히말라야 설산에서 인도의 신비 경전들을 티벳어로 번역하였고 그것이 모두 백여 권을 넘었다고 한다.
신비롭고 감동적인 신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는 그것을 세상에 공개하기가 이르다고 판단하여 동굴 속에 하나씩 숨겨두고(이를 ‘테르마’라고 하는데, ‘숨겨진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제자들에게 환생 능력을 가르쳐서 수백 년 후 한 명씩 세상에 나타나 비밀의 경전들을 찾아 세상에 공개하도록 했다. 이들은 바로 위대한 사명을 가진 자, 즉 ‘테르튄’이다.(류시화, 앞의 글, 9-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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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사실이라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에는 인간의 소망과 염원이 반영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종교학자 에반스 웬츠에 의해 <<티벳 사자의 서>>로 알려진 ‘바르도 퇴돌’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바르도 퇴돌’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서(Bryan J. Cuevas, Hidden History The Tibetan Book Of The Dead, Oxford University Press, 2003)는 8세기의 파드마삼바바가 동굴에 은닉한 문헌을 발견한 사람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14세기의 카르마 링파라는 사실을 말해준다.(14쪽) 하지만 카르마 링파가 발견하였다는 파드마삼바바의 문헌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카르마 링파와 그의 제자들(니이다 상예, 니이다 초제)이 남긴 것들을 ‘바르도 퇴돌’의 초기 문헌들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 문헌들을 정리한 17세기 릭진 니마 드락파의 ‘바르도 퇴돌’은 복합적이고 누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114쪽) 8세기에서 17세기로 이어지는 해탈의 진리가 경전화되는 과정은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소망과 염원이 신화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파드마삼바바의 가르침은 슬프고 아름답다. 연꽃에서 태어난 자로 알려진 그는 삶과 죽음의 모든 과정을 깨달은 자로서 이제 막 죽음의 세계로 진입한 영혼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아무개여. 그대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순간이 다가왔다. 그대의 호흡이 멎으려 하고 있다. 그대는 한때 그대의 영적 스승으로부터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에 대해 배웠다. 이제 그대는 사후세계의 첫 번째 단계에서 그 근원의 빛을 체험하려 하고 있다.
그대여, 이 순간에 모든 것은 구름 없는 텅 빈 하늘과 같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티 없이 맑은 그대의 마음은 중심도 둘레도 없는 투명한 허공과 같다. 이 순간 그대는 그대 자신의 참나를 알라. 그리고 그 빛 속에 머물러 있으라. 이 순간 나 역시 그대를 인도하리라.
-파드마삼바바, 류시화 역, <<티벳 사자의 서>>, 정신세계사, 1999, 241-242쪽
죽음 이후에 처음으로 찾아오는 빛을, ‘바르도 퇴돌’은 “존재의 근원에서 비치는 투명한 빛”이라고 말한다. 그 빛 속에 머물러 있으면, 영원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이 여러 번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죽음과 환생의 과정을 기억하는 파드마삼바바의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임종 직후에 다가오는, 첫 빛. 투명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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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고귀하게 태어났으나 평생을 힘겨운 노동의 삶을 사느라 몸져누운 당신에게. 당신은 대학병원 중환실에서 마지막 숨들을 힘겹게 쉬고 있었다. 파드마삼바바의 저 말들을 들려주었어야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그리고 대학병원 지하의 창고로 옮겨졌다. 닳은 형광 불빛 아래에서 맨얼굴의 당신은 장례식장의 이송차를 기다려야 했다. 원무과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당신은 이송차에 실려 시민장례식장의 냉장실에 안치되었다.
당신이 흘린 투명한 눈물을 기억한다. 당신은 당신의 당신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임을 직감한 듯 당신은 당신의 당신 앞에서 울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 기억이지만, 오래지가 않다. 눈을 뜨면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갈 것 같고, 눈을 뜨면 그때로부터 이 순간으로 순식간으로 와버린 것 같다. 당신의 당신이 죽고, 당신의 당신과의 마지막 눈빛을 슬퍼하던 당신마저 죽었다. 마치 김혜순의 시 「먼동이 튼다」의 내용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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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다른 모습으로 내게로 온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한 나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될 때까지
당신은 올 것이다.
하여, 나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호흡이 가라앉고 있다. 혈압이 낮아 창백한 얼굴이다. 도시 근교의 호스피스 병동. 세상의 모든 적요가 당신의 얼굴로 향한다. 고즈넉한 오후다. 당신과 나는 함께 숨을 쉬고 있다. 나는 긴 숨결의 어느 한 지점을 통과하는 중이고 당신은 긴 숨결의 그 끝에 다다르고 있다. 당신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마지막 호흡을 몰아내는 중이다. 호흡의 끝, 비로소 멈춘다, 당신은 어디론가 가라앉는다. 나는 당신의 귓가에 속삭인다.
투명한 빛을 따라가셔야 합니다.
맑고 고운 빛을. 그 빛을 따라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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