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무상, 감정, 아름다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사춘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의 근간을 이루는 문장이다. 같은 질문임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느껴지는 무게감, 문장의 분위기, 이에 대한 답도 매번 달라진다.
빛이 드리우는 시기에 있을 때면 이 질문에 한없이 산뜻한 가벼움을 느끼고, 봄의 향을 느낀다. 이럴 땐 자신 있게 말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그러나 어둠이 시야를 가려 한 줌의 빛도 보이지 않을 때면 질문의 덧없음에, 그 차가움에 섬뜩 놀란다.
무의미함. 우주에 존재하는 무언가라면 언젠가 마지하게 될 ‘없음’, 무한.
고민이 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사르트르의 말. 정확하다. 우리의 존재에 어떠한 이유는 없다.
항상 우리의 곁에 있는 마지막, 죽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단언할 수 있는 그것만이 우리의 삶에서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무언가.
나의 고민은 그러한 마지막에서 거슬러 올라온다.
‘나’라는 자의식, 세상에 존재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지구라는 먼지 한 톨도 안 되는 곳에서 일개의 영장류가 우주를 바라본다. 무한을 바라본다.
죽음이라는 확정된 마지막을 가진 채로. 그 모순을 과연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유의지를 감당할 수 있는가.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짊어질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 이상의 차원에 있지 않는 이상, 이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존재하고, 살아가는데.
이에 사람들은
신을 찾거나, 수많은 염세주의자들처럼 체념할 수도, 실존주의자들처럼 나름의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요즘 든 생각이다.
처음에는, 세상의 의미가 없음에 힘들어했다.
죽음의 선상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아무것도 정해진 본질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구토가 나올 만큼.
사회, 국가, 문화, 경제, 이념,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나중에는, 마음 안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감정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슬픔, 우울, 불안, 분노, 정열, 환희, 기쁨, 사랑.
감정이 올라오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했다.
모르겠다. 참으로 다채롭고도, 혼란스럽고, 내가 나를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이 무채색의 세상에서, 색을 입혀주는 것을 알게 되는 요즘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조차도.
허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좋아한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한 순간 담아놓은 그 찬란함을 좋아한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를 좋아한다.
순수한 어린 시절을 여행하며, 가사에 위로받는 나를 발견한다.
뮤지컬 공연을 좋아한다.
강렬한 감정의 편린이 몰아친다. 노래에 섞여있는 수많은 인물들의 비애, 고통, 희망, 기쁨을 같이 느낀다.
앙상블을 들을 때면, 음들이 하나로 합쳐져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만들어내고, ‘나’라는 자의식을 잊어버릴 정도로
인물들에게 몰입하게 된다.
희생의 숭고함을 느낀다.
사랑의 우아함을 느낀다.
창밖으로 눈이 내려오는 모습을 볼 때면,
기분이 좋다. 이유는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