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수전
전세살이 18년, 난 여전히 모르고 있다.
싱크대가 몇 년 전에 고장 났더라?
정확하게 언제쯤 고장 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전세살이를 한지가 어느덧 18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전세로 살았을 때 세입자가 받을 수 있는 관리가 어디까지인지를 모르겠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일이다.
욕실의 수전이 고장까지는 아닌데 주변으로 물이 좀 새고 있었다.
그 부부분에 대해서 관리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이 정도는 불편함이 없으니 그냥 사용하자는 능글한 언변에 나는 어리숙하게 '네'라고 대답을 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요구를 할 수 있는 걸까?
관리비에 포함되는 건 수도세 밖에 없으니 물을 마음껏 펑펑 쓰라고 호쾌하게 안내하던 관리인.
욕실 전구의 수명이 다했는데 욕실등 중앙 부분이 깨져서 그게 유리인 줄 알고 무서워 분리할 엄두를 못 내고 연락을 했더니, 아쉬운 대로 주인집에 여분이 있는 황색 전구로 교체해 주며 깨진 등은 플라스틱이라 위험하지 않으니 이 정도는 그냥 써도 괜찮다며 쓰자고 말하고 떠난 관리인.
맹하게도 바꿔달라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다. 아 이렇게 써야겠구나, 유리가 아니었구나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황색전구는 욕실에 어떤 것도 숨겨주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물때까지 숨겨주는데, 나는 그걸 참지 못하고 다이소에서 LED전구를 백색으로 사서 교체했다.
아
이런 일들이 있었다.
내가 꽤나 신경 쓰는 부분들을 관리인은 대수롭게 않게 이야기를 했었다.
냉장실 냉동실 고무패킹이 헐거워지다 못해서 더 이상 냉장 기능을 못하고 반찬을 모조리 상하게 만들어버린 오래된 냉장고.
야금야금 상하게 할 때는 어떻게든 버텼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큰 용기를 내서 불편함에 맞서 연락을 해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냉장고 상태와 연식을 확인 후 나는 다음 달에 새 냉장고를 옵션으로 가질 수 있었다.
어차피 주인이 돈 쓰는 거니까 바꿀 수 있는 건 바꿔야죠.라고 말하는 관리인을 보며 나는 바뀐 냉장고가 사이즈가 커져서 기뻤음에도 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이 냉장고로 말할 것 같으면, 이사 온 그 해부터 작아서 나를 속상하게 했던 냉장고며 옵션이라 내가 사서 교체하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옵션인 냉장고를 둘 곳이 없으므로 그냥 있는 걸 쓰세요라고 안내받았던 그 애증의 냉장고였다.
이미 고장 나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었는데 그 시간을 견뎌서 지금을 누릴 수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다시 돌아와서 싱크대 수전.
고장이 났다 묘하게 헐거워지며 고장이 나기 시작하는데, 아 우리 아빠는 왜 그렇게 손재주가 좋으며 나는 크면서 아빠가 모든 걸 고치는 것을 참 유심히 봤었나 보다.
우리 집에 아무렇지 않게 있는 전기테이프는 아빠가 필요할 때 쓰라고 챙겨줬던 것 같다.
자취를 시작하 공구들을 선물해 줬었다.
새 공구는 아니었고 사용감이 많았지만,
망치 드라이버 니퍼 등.
어지간한 일이 생겨도 내 능력만 되면 처리할 수 있을 장비들.
사실 나는 그걸 챙겨주는 아빠가 좋았고 감동도 받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그 친구들과 꽤 잘 지내고 있다.
선풍기를 분리해서 세척할 때도 그렇고, 냄비 손잡이가 헐거워질 때도 그렇고 그 밖에 자잘한 문제들에도 잘 사용하고 있다.
물이 새기 시작한 싱크대 수전을 보며 이게 큰 일이나 불편함이라고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전기테이프로 잘 감아서 사용을 했다.
1년이 지났고 2년이 지났고 3년이 지난 것 같긴 한데 사실 정확이 얼마나 더 지난 건지는 모르겠다.
헐거워져서 다시 감고 더 감고 그렇게 검은색 전기테이프로 연명하던 수전이 이젠 비틀어서 끊어져버리 닭 모가지처럼 운명했다.
이젠 안 되겠어서 관리인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말하고 약속을 잡았고 그렇게 오늘 하루 앞당겨 급하게 일정을 바꿨다.
내가 생각했던 일정이 빈 상태라, 이걸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한편 거의 나오지 않는 물로 손 씻기도 힘들게 졸졸졸 나오는 물로 설거지를 하기 힘들어서 당장 해결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본가에서 출발할 때 오늘 혹시 시간 되시냐고 문자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문자가 저녁에 가게 설정했던 예약문자를 수정했던 거라 문자는 전송되어있지 않았다. 왜 연락이 없나 했더니 오류가 있었다.
다행스럽게 중간에 확인했고 나는 이후 시간이 많았고 늦은 시간이었지만 부품을 구입하셔서 방문까지가 가능했다.
그렇게 수전을 고쳐주시고 떠난 뒤
물을 틀었을 때, 쏴- 하고 시원하게 나오는 물을 보니 여태 내가 뭘 한 걸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해결된 것에 대한 기쁨 한편에 기뻐할 수만 없는 내가 여태 보내온 시간에 대한 생각?
나의 권리를 정확하게 알아야 되는데 사실 나는 아직도 나의 권리를 모르겠다.
부탁하는 것은 언제나 불편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언제나 기껍다.
기껍지 않은 순간에도 나는 최선을 다한다.
내 밥그릇을 챙기라는 게
상대방의 밥그릇을 뺏으라는 말이 아닌데
나는 여태 어떻게 생각했던 걸까.
나의 권리를 찾지 못한 건 나의 문제다.
내가 나를 챙겨야 하는데, 어디 다른 사람 다리나 벅벅 긁어주고 있는 건지.
이거 수전하나 고치고는 온갖 생각이 들어서 나는 밤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졸졸졸 흐르던 빗물 같은 싱크대 물을 보며 불편했던 순간보다 그날밤은 시원하게 물이 나왔지만 마음만큼은 복잡했다.
언제쯤 어른이 될까?
하나를 알았나 싶으면 둘을 모르고 있고
여전히 헛다리를 긁고 있는 나를 보며
이건 어리숙함인지 멍청함인지 순진함인지
헷갈리지 않음에도 헷갈리고 말고 싶다.
나의 상황은 나아졌고,
나는 생각이 많아졌고,
나는 좀 더 나아질 테다.
매일이 배움이고
매일이 깨달음이고
매일이 새롭고
매일이 반성이고
매일이 감사하고
이런 매일이 나를 만들어 간다.
나는 매일매일 자라고 있다.
이제 어른인가? 할 때도
여전히 자라고 있다.
평생을 자라다보면
눈감는 그 순간엔 좀 어른이 되었으려나?
내가 생각하는 어른이 열심히 되어가면서
웃으면서 눈감고 싶다.
그래 열심히 살았네.
예쁘다 예쁘다
잘했다 잘했다
애썼다 애썼다
최고다 최고다
이렇게 나를 다독이고
양손을 꼭 잡고
양손으로 양어깨를 감사 안아주고
씩 웃으면서
그렇게 눈을 감아야지.
나 그래도 제법 어른이 되었어 라며
그렇게 마무리해야지.
고장 난 수전은
나를 눈감는 날까지 상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