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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의 꿈

#25. 혼자 살아가는 중입니다

by 대신돌이

나는 고졸이다. 학위는 2개다. 독학학위제로 국문학사를, 학점은행제로 행정학사를 땄다. 지금 학점은행제로 보육교사 2급 공부를 하고 있으니 아동학사까지 따면 학위만 3개다. 그래도 어디 가서 대학 나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하기 부끄럽다. 누가 어느 대학 나왔냐고 물으면 '이름 없는 데'라고 한다. 진짜 이름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건데, 내 말에 누가 그러더라.


"나도 지방대 나왔어요."


그래도 넌 지방대라도 나왔으니 대학 동기가 있고 대학 은사님도 있고 대학동아리도 있지. 난 니가 했다던 CCC도 몰라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CC는 아는데 CCC는 뭘까? 너무 궁금했지만 대학 안 다닌 거 티 날까 봐 묻지 않았다. 이미 은연중에 내가 대학 안 다닌 걸 알아챘을 테지만.


과정이야 어찌 됐든 대졸 학력은 인정받았지만 취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단 이력서 쓰는 것부터 문제였다. 지금이야 블라인드 채용이라 학교명을 안 쓰지만 예전에는 학교명을 적는 칸에 '대학교'까지 인쇄된 이력서가 대부분이었다. 난감했다. 대학교 앞에 독학학위제라고 쓰면 '독학학위제 대학교'가 되는데 누가 봐도 이상하다. 어차피 평생교육이라는 취지는 같으니 한국방송통신대학교라고 쓸까? 그럼 학력위조가 되나?

오랜 고민 끝에 '대학교'를 두 줄로 긋고 그 앞에 독학학위제라고 썼다.





대학에 가고 싶었다. '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전문대라도 가서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갖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독학재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형공장에 다니는 엄마에게 재수학원에 보내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애당초 공부할 곳이 못 됐다. 다섯 명이 누우면 꽉 차는 지하 단칸방에 TV가 놓인 서랍장이 책상과 기역자로 붙어 있었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TV를 보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격일제로 경비 일을 하는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에는 하루 종일 그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어느 날 그는 술도 안 취한 상태에서 내게 욕을 했다.


"병신 같은 년. 주제 파악 해라."


그는 딸들이 돈을 벌어와 자신이 싸질러 놓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런 아비 밑에서 게으르고 끈기 없는 내가 독학재수를 하겠다니, 주제 파악을 못한 건 맞다.



언니는 공부를 잘했다. 얼굴도 예쁘게 생겨서 중학교 때는 언니를 모르는 선생님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집이 폭삭 망하면서 성적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잘했다. 본인이 열심히 하기도 했다. 매일 새벽 첫차를 타고 왕십리에 있는 단과학원에 다녔고 독서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대입에 실패했다. 집이 문제였다. 단 한 시간도 맘 편히 쉴 수 없는 집이.

가난한 집에 살면 성공할 확률이 확 떨어진다. 아무리 노력해도 확 불타오르던 의지도 확 꺾이고 만다.





"좋은 집에 살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져. 웬만한 일은 집에 오면 다 극복이 되니까."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 中에서)



엄마는 재수를 권했다. 제대로 뒷바라지를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을 거다. 하지만 언니는 재수학원 대신 컴퓨터학원을 택했다. 가난한 집구석의 장녀가 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생도 대학 진학에 실패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회사에 다니던 언니는 동생에게 재수를 권했다. 학원비를 대 줄 테니 미대에 가라고 했다. 그땐 일반과에 비해 미술로 대학 가기가 좀 수월했다. 하지만 동생은 실기 실력이 형편없었는지 미대입시는 실패했다. 대신 막판 눈치 작전으로 넣은 전문대 공과계열에 합격했다. 그렇게 선택한 전공이지만 그 전공 덕분에 오십의 나이에도 밥벌이를 하고 있다. 전공이 적성에 맞았는지 회사에 다니면서 대학원도 졸업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동생이 충격적인 말을 했다. 지금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란다. 어쩌다 직업이 되긴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모르겠어."

"정말? 꿈이 없었어?"

"없었어. 그냥 우리 집이 부자였으면 좋겠단 생각만 했지, 꿈이 있었던 적이 없었어."


언니로서 무심했단 생각이 들었다. 진작 동생의 재능을 찾아줬어야 하는 건데... 하긴 내 주제 파악도 못하는데 누가 누구 진로를 제시해 준단 말인가!


돈은 없지만 꿈이 있는 사람과 돈은 있지만 꿈이 없는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할까?


난 전자라고 생각한다. 비록 돈은 없지만, 당장 길거리에 나 앉아도 이상할 것 없지만, 그래도 난 꿈이 있다. 그래서 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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