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우리 엄마는 인싸다. 하루에도 서, 너 번은 꼭 휴대폰이 울린다. 요금제도 통화 무제한 쓴다. 안 그랬다간 요금 폭탄 맞는다. 그에 비해 난 아싸다. 난 제일 싼 요금제 쓰는데도 무료통화시간이 남아돈다. 문자도 긴급재난문자나 마트 세일 광고가 대부분이다. 내 폰은 삐삐나 다름없다.
엄마 폰의 우수고객은 010-***-2580님이시다. 한때 시사매거진 2580의 열혈 시청자로서 엄마 폰에 뜬 2580 숫자를 본 순간 급 호감을 느꼈다. 이 분 혹시 전직 언론인? 댄스스포츠 덕후인 울 엄마가 이런 분야의 사람을 안다고?
2580님의 정체가 궁금했다. 엄마 폰의 통화목록을 훔쳐봤다. 근데 이상했다. 010-***-2580 번호는 등록된 연락처가 아니었다. 통화목록 발신, 수신 내역이 매일 기록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이해가 안 갔다. 엄마랑 2580님은 예삿관계가 아니다.
작년 생일날, 엄마는 2580님에게 커다란 꽃바구니를 선물 받았다. 아마 칠십 평생에 생전 처음 받아 본 꽃바구니였을 것이다. 엄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는 2580님에게 잘 들어왔다고 전화를 걸었다. 꽃바구니 고맙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 말은 잘 못 들으면서 2580님과는 어찌나 잘 속닥속닥 거리는지. 그런데도 연락처에 등록도 안 해놓다니. 이건 예의가 아니다. 2580님도 남의 집 귀한 아버지일 텐데 이런 푸대접을 하다니, 설마, 울 엄마 팜므파탈이야?
엄마에겐 2580님 이전에 썸남 해리스님이 있었다. 외모가 해리슨 포드와 비슷해 동생과 나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엄마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해리스님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해댔다.
“걘 생활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아? 대기업 퇴직 후에도 친구가 하는 모피공장에서 일을 해. 성격은 또 얼마나 깔끔한데! 집안에 먼지 한 톨 없어!”
한마디로 해리스님은 내 아버지와 정반대인 분이었다. 그러니 엄마 맘에 쏘옥 들 수밖에!
물론 내 맘에도 쏙 들었다. 엄마한테 해리스님과 잘해보라고 했다. 내 팔자에 신랑복은 없으니 새아버지 덕이라도 보고 싶었다. 엄마도 싫지 않은 눈치였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해리스님과 영화를 봤네, 이천에 쌀밥정식을 먹으러 갔다 왔네, 하며 자랑을 했다. 금방이라도 엄마의 재혼이 성사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날부턴가 엄마는 해리스님의 ‘해’자도 꺼내지 않았다. 헤어진 것 같았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헤어졌을까? 두 분이 싸웠나? 엄마가 차였나? 아님 혹시 저 세상?!!’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 해리스님에 비하면 2580님은 새아버지 감으로 불합격이었다. 그는 꼭두새벽부터 집전화로 전화를 걸어 내가 받으면 그냥 끊어버렸다. 또 새벽 2시에 엄마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기도 했다. 누가 위독하다고 온 전화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엄마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지금 이 시간에 전화를 걸면 어떻게 하냐며 2580님에게 화를 냈다. 난 엄마한테 화를 냈다.
“누군데 이 시간에 전화를 해!”
엄마는 못 들은 척, 자는 척을 했다. 그런 엄마가 너무 얄미웠다.
어느 날 내 휴대폰으로 이상한 문자가 날라 왔다.
‘ㅈㅡㅂ ㅇ에 ㅈㅣㄹ ㄷㅇㅡ’
처음엔 뉘 집 꼬마가 엄마 폰 갖고 놀다가 잘못 보낸 문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발신번호 뒷자리가 2580이었다. 깜짝 놀랐다. 도대체 내 번호는 어떻게 아는 건데!
이건 분명 사생활 침해였다. 엄마에게 따지려다 그만두었다. 같이 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비상연락망 차원에서 알려줬을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엄마의 치과진료가 있던 날이었다. 임플란트 본뜨기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단지 본만 뜨는 거라 내가 안 따라가도 될 것 같았다. 엄마에게 난 볼일이 있으니 혼자 병원에 다녀오시라 했다. 사실 볼 일도 없었다. 그냥 긴 시간을 대기실에 앉아 멍 때리고 있는 게 싫었다. 엄마가 알겠다며 집을 나섰다. 말투에서 같이 가줬으면 하는 뉘앙스가 풍겼다. 맘이 불편했다. 바로 앞 동에 사는 다 큰 조카들은 위험하다고 낮이나 밤이나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늙은 노모는 혼자 병원에 가시라 하다니, 썩을 년!
급 반성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웬일인지 똥 자전거가 쌩쌩 잘 나갔다. 20여 분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엄마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난 병원에 도착했는데 어디냐고 했다. 엄마는 내가 온 것에 당황해했다.
“안 와도 되는데 뭐 하러 왔어. 곧 도착 해. 정말 안 와도 되는데…”
난 엄마가 정말 미안해서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다. 내가 눈치를 준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다.
‘자식이 늙은 부모를 돌보는 건 당연한 건데 왜 혼자 가시라 했을까! 그래, 앞으론 잘해드리자!’
이제부터라도 효녀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다.
다 왔다던 엄마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살짝 걱정이 되었다. 난 미어캣처럼 목을 쭈욱 빼고 지하철역 쪽을 살폈다.
‘왜 안 오지?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넘어졌나?’
방정맞은 생각까지 들었다. 혹시나 해서 반대편 버스정류장 쪽을 바라보았다. 저만치서 엄마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옆 사람과 말을 하며 오고 있었다. 엄마의 시선을 쫓아갔다. 순간적으로 2580님이란 직감이 왔다. 키는 엄마보다 조금 크고 머리가 동글동글해서 꼭 성냥개비 같았다.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식은땀이 줄줄. 남편의 불륜현장을 목격하면 이런 감정일까? 나도 모르게 건물 안으로 몸을 숨겼다.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고서 엄마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에 당황한 내 얼굴이 보였다. 갑자기 화가 났다.
'내가 왜 숨지? 이게 숨을 일이야?’
직접 부딪혀 보기로 했다. 솔직히 엄마가 어떻게 나올지 그게 더 궁금했다.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엄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뒤를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2580님은 어디 가셨지? 진료 끝날 때까지 근처 별다방에서 기다리시는 건가?'
엄마가 또 혼자 와도 되는데 뭐 하러 왔냐고 했다. 그 말이 이제는 투덜거림으로 들렸다.
대기실에 앉아서 진료를 기다리는데 머릿속이 복잡했다. 2580님이 꼬부랑 할아버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내가 엄마 애인 보려고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왔나 싶어 화가 났다. 난 나중에 아프면 병원에 혼자 가서 동의서 보호자란에 자필서명을 해야 할 판인데 울 엄마는 자식에 애인에 보호자가 이렇게 차고, 넘치다니!
엄마의 비밀연애를 더 이상 두고 볼 순 없었다. 이 정도 사이면 당당하게 소개를 시켜주던가, 최소한 연락처에 이름이라도 등록해 놓던가 해야 한다.
“엄마...”
“......”
“애... 인 있어?
“...??”
오, 이런. 지금 안 들리는 척하는 거야? 듣고싶은 것만 들리는 이 뛰어난 선택적 청취 능력자! 치과치료 가 끝나면 내 반드시 이비인후과 가서 보청기를 해드리고 말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