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신돌이 Jan 28. 2021

엄마는 아무나 하나

#14.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이모, 애기 좀 낳아라!”

중딩 조카의 뜬금포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사유리가 자발적 비혼모가 됐다는 기사에 한동안 이해가 가네, 마네 떠들어대더니 나도 비혼모가 되란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아기들이 너무 귀엽고 예쁘다나.     

“얘가 지금 뭐라니? 이 나이에 뭘 낳아? 차라리 알을 낳으라 해라.”

내 핀잔에도 조카는 계속 졸라댔다.  낳기만 하면 자기가 키워주겠단다. 애 키우는 게 무슨 인형 놀인 줄 아는 모양이다.  학굔 어쩌고 애를 보냐 했더니 검정고시 치면 된단다. 자기 꿈이 베이비시터라나. 언제는 아이돌 한다고 온몸을 흔들어대더니, 장래희망 변동 폭이 미친년 널뛰기 저리 가라다.     


그래서 내가 한마디 했다.

“얘야, 네 이모는 사유리가 아니란다. 사유리는 돈도 많고 심지어 나보다 쫌(?) 어리다.  모름지기 육아는 돈과 체력이 필수란다. 오죽하면 ‘애 볼래, 밭 갈래?’ 물으면 밭을 간다 하겠니? 생각해보렴, 널 키우는 게 낫겠니, 밭 가는 게 낫겠니? “

“밭!”

국어 점수는 공부 안 해도 잘 나온다더니 역시 주제 파악은 잘하는구나.  


   




한때는 나도 비혼모를 꿈꿨었다. 남편은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지만 날 닮은 아이를 낳아서 나와는 완전 다른 나로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육아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경제력이 없어서 포기했다. 나도 내 주제 파악은 잘한다.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아동학대 소식에 내가 다 미안할 정도다.  친모 건, 계모 건, 양모 건 간에 자녀를 학대하는 괴물맘들이 왜 그리 많은지 정말이지 아이들만큼은 행복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친구는 죽기 직전까지 남편의 재혼을 걱정했다.  친구는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딸이 새엄마에게 구박받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재혼은 하되 아이가 없는 여자와 하고 결혼 후에도 애는 절대 낳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자기는 죽어서도 내 딸이 새엄마에게 구박받는 건 못 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친구 남편은 ‘재혼 따윈 필요 없다!’며 친구를 안심시켰다.

난 가끔 친구 딸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정말 친구의 남편은 친구와의 약속을 지켰을까?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면 친구 딸은 ‘새엄마’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보통 접사 ‘새-’는 다른 말과 결합하면 ‘새신랑’ ‘새색시’처럼 새롭고 밝은 느낌을 주는데 왜 명사 ‘엄마’ 앞에만 오면 고약하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걸까?

접사 ‘새-’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일곱 살 때 아주 추웠던 겨울로 기억된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사촌언니는 친엄마를 찾겠다며 집을 나갔다.  사촌언니가 새 큰엄마에게 대들었다가 큰아버지에게 얼굴 싸대기를 맞은 후 벌어진 일이었다. 새 큰엄마는 사촌언니에게 매일 빨래와 설거지를 시켰다. 그 때문에 사촌언니의 손은 불에 덴 것처럼 늘 벌겠다. 큰아버지는 사촌언니가 집을 나가겠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가서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마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큰아버지의 태도에 사촌언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친엄마 주소도 모르는데 아버지가 나가라 하니 말이다.

사촌언니는 찬바람 쌩쌩 부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나는 사촌언니가 친엄마를 찾아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어린 내 눈에도 사촌언니는 콩쥐와 다름없었다. 잠만 방에서 잤지 완전 부엌데기였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사촌언니는 아주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들어오기가 민망했던지 땅콩엿을 사들고서였다. 마치 엿을 사러 나갔던 것처럼 말이다.

그 날 어두컴컴한 마당에 서서 엿 먹으라며 멋쩍게 웃던 언니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버림받은 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나도 초등학교 3학년 때 남의 집에 양녀로 갈 뻔했다. 부모님 기름가게 옆에서 식자재 도매를 하던 60대 부부셨는데 장성한 아들만 둘이어서 그런지 날 양딸 삼고 싶어 했다. 두 분은 나를 볼 때마다 미술학원도 보내주고 피아노 학원도 보내줄 테니 ‘우리 딸’ 하자며 나를 꼬드겼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는 그냥 웃었지만 나는 미술과 피아노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혓바닥을 내밀고 씨익 웃었더랬다. 그때 당시 우리집은 망하기 직전이었지만 학원을 보낼 만큼 여유롭진 않았다.       



내가 그때 그 집 양딸로 갔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보다 더 나아졌을까, 아니면 더 황폐해졌을까? 설마, 성격이 지랄 맞다고 중간에 파양 당하진 않았을까? 누구에게나 평생 동안 3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는데 혹시 그때가 내 첫 번째 기회는 아니었을까?      





얼마 전 16개월 된 아이, 정인이가 죽었다. 아니 양모에게 죽임을 당했다. 어디가 아프다 말도 못 하고 대신 몸의 상처로 말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본 정인이의 마지막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린이집에 혼자 남은 아이는 양부모가 데리러 와주길 바라듯 자꾸 출입문을 바라봤다.

부모란 그런 존재인가? 날 아프게 해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철학자 라즈니쉬는 ‘자식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여자’를 어머니라 했다.

그만큼 어머니란 어렵고 힘든 존재다. 만약 그럴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냥 나처럼 ‘엄마 딸’로 살아라, ‘딸 엄마’로 살 생각 말고.

엄마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으로 낳든, 마음으로 낳든 간에 그렇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이전 13화 아들과 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