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1990년대 초 ‘아들과 딸’이라는 주말 드라마가 있었다. 이란성쌍둥이로 아들(귀남)과 딸(후남)을 낳은 어머니는 아들만 사랑하고 딸은 천대한다. 계모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말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엄마가 첫 딸을 낳자 자신을 꼭 닮은 딸을 보고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원했던 건 오로지 ‘아들’이었다.
근처에 살던 친할머니가 와서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엄마가 국물 한 모금 떠먹으려는데 그가 한마디 했다.
“젊은 년이 자빠져서 노인네가 차려주는 밥상 받아쳐 먹고 있어!”
아들을 낳았어도 그렇게 말했을까? 오기가 발동한 엄마는 몸조리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바로 가게에 나가 참기름과 깨소금을 팔았다. 가게에선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지만 정작 사람 사는 방에선 눅눅한 냄새가 났다.
2 년 후 내가 태어났다. 또 딸이었다. 그는 나를 본 척 만 척하고는 옆 가게에 나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남자아기를 보러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엄마는 그런 멸시를 당하고도 2년 후 동생을 또 낳았다. 셋째 딸이었다. 엄마 뱃속을 빠져나온 동생은 울지 않았다. 엄마는 동생을 포대기에 싸서 방구석에 처박아 두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약 한 시간 후 동생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태어난 동생은 우리집에서 유일한 애교쟁이였다.
아들을 얻지 못해서인지 그는 매사에 의욕이 없었다. 10년 동안 해온 참기름 집도 장사가 안 된다며 팔아버렸다. 몇 달 후 건어물 장사를 시작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었다. 그는 일하지 않고 돈을 벌고 싶어 했다. 몇 날 며칠 방에 들어앉아 사업구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극장식당 투자자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봤다. 투자금만 내면 일하지 않고도 매월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광고였다. 하지만 그는 그걸 믿었다. 엄마가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가게 보증금과 엄마가 빌려다 준 돈까지 투자를 했다. 그리고는 돈 들어올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달도 안 돼 극장식당이 문을 닫았다. 구청에서 영업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장식당 옆에 문화재인 종묘가 있어서 애당초 유흥업소 허가가 날 수 없는 곳이었다. 남은 건 빚뿐이었다. 엄마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인형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투자금을 돌려받겠다며 다른 피해자들과 법원을 들락거렸지만 그가 건진 건 안주 담는 크리스털 접시와 양식 식기류, 소시지와 마카로니 같은 식재료뿐이었다.
그 후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몇 달을 그냥 놀았다. 그러다 엄마를 졸라 공인중개사 수험서를 할부로 샀다. 하지만 책을 보는 시간보다 동네 복덕방에서 화투를 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시험에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그다음엔 운전면허학원을 보내 달라고 했다. 택시면허를 따 택시운전을 하겠다는 것이다. 엄마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형공장에서 받는 월급으론 쌀값 대기도 빠듯했다.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시장 경비 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하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장모님 눈치는 보였는지 군말 없이 일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엄마가 임신을 했다.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아들이었다. 엄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낙태수술을 받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태어났으면 우리집 ‘귀남’이가 되었을 그 아이는 그렇게 엄마 뱃속에서 사라졌다.
아들을 잃은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셨다. 빈 소주병엔 담배꽁초가 한가득이었다. 가족 누구도 그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다 급기야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간병은 백수였던 나와 엄마 몫이었다. 180센티의 거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에 받은 멸시를 보상받으려는 듯 엄마와 나를 24시간 옆에 붙어 있게 했다. 스스로 재활운동을 할 생각은 않고 '다리 주물러라, 팔 주물러라' 하며 엄마와 나를 달달 볶았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억울하고 분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나한테 뭘 잘해줬다고!’ 그런 한편으론 오기도 생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일으켜 세워 병원을 걸어 나가게 만드리라 결심했다. 마비된 손으로 ‘죔죔’ 운동을 시켰고 앉아있기 힘들어하는 그를 억지로 휠체어에 태워 병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기관 절개술까지 하게 됐다. 절망적이었다.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다음부터는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기저귀를 갈고 욕창 방지를 위해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고 가래 석션을 했다.
같은 병실의 환자 보호자들이 한 마디씩 했다. “아이고. 요새 저런 딸들이 어딨어!” “아저씬 복 받았네, 복 받았어.” “딸들이니까 하지, 아들이었어 봐, 병문안도 안 올걸.” 사람들의 말에 그는 잘 나오지 않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아들이 최고요…….”
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 타령이라니, 아버지고 뭐고 간에 버릴 수만 있다면 버리고 싶었다.
병원에서 퇴원해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집으로 왔다. 그가 쓰던 방을 병실로 만들었다. 환자용 침대와 휠체어를 임대하고 석션 기계와 지압 마사지기를 구입했다. 장애인복지관에 물리치료사 방문 서비스를 신청했고 집 앞에 있는 한의원을 찾아가 왕진을 부탁했다. 장기요양보험의 목욕서비스도 신청했다. 집에 온 지 보름도 안 돼 그의 얼굴에 살이 오르고 혈색도 좋아졌다. 그렇게 하는 게 아들 타령만 하는 그에게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첫 조카가 태어났다. 강호동을 닮은 여자 아이였다. 그는 언니 품에 안겨있는 조카를 보고 쉰 목소리로 ‘아들’이냐고 물었다. 언니가 ‘딸’이라고 하자 ‘에이!’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조카는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사리 손으로 그의 머리를 탁탁 때렸다.
어쩌면 그때가 그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그렇게 가족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어느 날 갑자기 심정지가 왔다. 119를 부르고 할 줄도 모르는 심폐소생술을 했다. 응급실에 와서야 심장은 다시 뛰었지만 의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온 삼촌이 나무라듯 말했다.
“병원엔 뭐 하러 왔니. 집에서 기다릴 것이지…….”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럴 수도 있었겠다’란 후회와 ‘그렇게 했어야 했나’’란 의문이 동시에 밀려왔다.
다시 몇 달의 병원 생활을 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의식 없는 그를 돌보는 건 몇 배 더 힘들었다. 손 마디마디가 쑤시고 허리가 아팠다. 그는 그렇게 4개월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는 천주교 신자인 언니 덕분에 성당에서 새벽 미사로 치러졌다. 제단 앞에 그의 관이 놓였다. 갑자기 그가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할머니 몇 분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게 보였다. 당황스러웠다. 우리 아버지, 그렇게 울어줄 만큼 좋은 사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가 떠난 1년 후 둘째 조카가 태어났다. 그를 쏙 빼닮은 남자아이였다. 엄마는 조카를 안고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할아버지가 널 봤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그 말을 하는 엄마 표정이 수상했다. 가만 보니 첫째 조카를 볼 때와 눈빛이 달랐다. 어쩌면 엄마도 아들을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무능한 가장을 대신해 의지할 수 있는 장남을 말이다. 이런. 간병을 하는 게 아니었다. 진즉에 결혼해 손주를 낳아 드리는 게 진정한 효도였던 건데. 너무 늦은 후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