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가치 늙어가는 중입니다
엄마는 요즘 재활용품 버리는 일에 아주 열심이다. 경비아저씨가 분리수거대를 설치하기도 전부터 다용도실에 있는 재활용품을 몽땅 꺼내 현관에 내놓는다. 그것들을 당장 내놓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말이다. 어찌나 열심인지 다른 사람이 내다 버릴 틈을 주지 않는다. 자기 키만큼 쌓인 박스도 혼자 다 들고나간다. 그러다 넘어져 다친다고 놔두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않는다. 마치 집에서 자기가 할 일이 그것밖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엄마가 재활용품 버리는 일에 집착하게 된 건 살림에서 손을 뗀 후부터다. 엄만 근 15년 동안을 워킹맘인 언니를 위해 조카를 키우고 살림을 해왔다. 음식 솜씨도 좋아서 초딩 조카도 할머니 음식이 세상에서 젤루 맛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음식 간이 극과 극을 달렸다. 너무 짜지 않으면 아주 싱거웠다. 엄마 스스로도 늙으니까 간도 못 맞추겠다며 신세 한탄을 할 정도였다. 음식 맛도 맛이지만 음식 만드는 일도 점점 힘들어했다. 낼모레 팔십이니 힘들어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내가 다 하겠다고 했다. 언제까지고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엄마만큼 요리를 잘할 수 없으니 나만의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엄마 손맛을 흉내 내려고 MSG로 음식 간을 맞췄고 매일매일 다른 요리를 만들었다. 어제 김치찌개를 끓였으면 오늘은 부대찌개를 끓이는 식이었다. 그렇게 하다 지치면 밀키드를 주문했다. 밤에 자려고 누우면 ‘내일은 뭐 먹지?’를 고민해야 했다. 음식을 만들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밥은 누가 차려주는 밥이라는 걸.
하지만 엄마는 아닌 것 같았다. 엄만 매일 음식을 만들던 시간이 되면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옆에 와서는 도마 위에 썰어놓은 오이를 곁눈질하고 가스레인지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보았다. 난 그런 엄마가 불편했다. 꼭 내가 엄마의 자리를 빼앗은 것만 같았다. 실제로 엄마는 친구와 전화 통화하면서 자기는 살림에서 손을 뗐다며 ‘난 이제 아무 쓸모가 없어.’란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내게는 밥 짓는 일이 그저 ‘노동’에 불과한데 엄마에게는 존재의 이유였던 거다. 엄만 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밥 짓는 일에서 찾는 것일까? 엄마는 매일 아침 8시 반이 되면 베란다에 서서 형부와 손잡고 출근하는 언니를 ‘오늘도 무사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지켜본다. 언니가 이 사실을 안다면 아마 펑펑 울게 뻔하다. 엄만 그런 존재다. 그냥 암 것도 안 하고 옆에서 지켜만 봐줘도 힘이 되는.
이웃에 3대가 사는 가족이 있었다. 그 집도 며느리가 직장에 다녀 시어머니가 손주를 키우고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그런데 이 시어머니, 쌍 팔 년도에 팔학군에서 아들 둘을 키우신 분이셨다. 그러니 손주 교육도 아주 열심이셨다. 손주 유치원, 학원 픽업은 기본이고 아토피 피부인 손주를 위해 음식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셨고 겨울에는 아토피 피부에 안 좋다며 난방도 거의 안 하고 지낼 만큼 손주 사랑이 대단하셨다.
우리 조카랑 손주가 같은 또래라 종종 같이 놀아서 시어머니랑 얘기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은 날 붙잡고 며느리에 서운함을 토로하셨다. 며느리가 퇴근해 집에 오면 손주 학습지 좀 봐주고 책도 읽어주면 좋은데 아들이랑 운동 가서는 밤 10시 넘어 들어온다는 것이다. 또 주말에는 아침 먹고 손주 데리고 나가서 저녁 먹고 밤늦게 들어온다고 하셨다. 제삼자인 내가 듣기에도 좀 너무하다 싶었다. 나도 울 언니가 야근을 해서 조카가 우리 집에 늦게까지 있으면 솔직히 짜증이 났다. 이건 조카가 예쁘고 안 예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나도 내 시간이 필요한데 조카가 안 가고 있으면 내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육아가 힘든 이유 중에 하나가 퇴근 시간이 없다는 것일 게다.
물론 공부시키는 걸 싫어하는 며느리라면 교육열 높은 시어머니가 싫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시어머니가 엄마 역할을 했으면 퇴근 후에는 엄마가 아이를 돌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시어머니에 대한 배려가 너무 없지 싶었다. 그런데다 며느리가 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는 지인이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랑 한 집에 살아서 여러 가지로 불편하겠다고 했더니 며느리 왈, ‘친정엄마가 한 집에 엄마가 둘이 있을 순 없으니 시어머니 하는 대로 자긴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내 귀에는 그 말이 시어머니랑 한 공간에서는 엄마 역할을 안 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친정엄마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닐 텐데 말이다.
결국 황혼육아에 지친 시어머니는 손주가 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며 아들네를 분가시키셨다. 며느리는 직장은 잃었지만 집을 얻어서 동네 엄마들의 부러움을 샀더랬다.
할머니가 아무리 잘해 줘 봤자, 이모가 백날 잘해줘 봤자 엄마를 이길 순 없다. 엄마의 자리엔 엄마만 앉을 수 있다. ‘맘좌의 게임‘에서 승자는 엄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