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 마지막 날, 발목을 다쳤다.
차라리 해외에서 다칠껄. 덜 외롭게.
6개월의 휴직 마지막날이다. 어떻게 보내야 잘 보내는걸까. 일단 나는 하루를 알차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아침9시 30분쯤 집을 나왔다. 지하철 도착 시간이 몇 분 안 남았다. 교통카드를 찍고 내려가는 계단에서 보이는 승강장으로 곧 지하철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무사히 지하철을 타야겠다는 마음에 속도를 올렸다. 좁은 계단 칸칸이들을 내려오면서 널찍한 구간에 도착했다 생각한 찰나였다. 갑자기 내 몸이 땅으로 쑥 꺼지는 느낌이 났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텐데 ' 씽크홀인가?'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 음향효과가 오버랩되었다. '오드득'거리는 소리가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난 바로 생각했다.'망했다.' 이후의 기억은 통증이 잠식해서 엉망진창이다.
내 왼쪽 다리는 양반다리처럼 접혀있었다. 오른쪽 다리는 사실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일단 왼쪽 다리가 너무 아팠다. TV에서 축구선수들이 태클이 걸리면 다리를 얼싸안고 뒹구르르 구르는 장면에 나도 이제는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왼쪽 종아리 전체가 아팠다. 태어나서 어디가 부러 진일은 없었기에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창피고 모고 나는 아픈 만큼 아파했다.
지나가시던 분들 중에 몇 분이 잠깐 멈칫해하셨다. 아마 그분들도 놀라셔서 그랬던 것 같다. 이내 내가 타려고 했던 지하철이 승강장으로 들어서자 바로 앞으로 돌진하셨다. 순식간에 나의 목격자들이 사라졌다. 한 명도 없이. 나만이 계단에 남아서 지하철을 타지 못한 낙오자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몸을 둥글게 말아서 다리를 안고 난 한동안 오뚝이처럼 왔다갔다거렸다. 주변을 볼 여유 따윈 없었고 소리로 기척을 느낄 뿐이었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지나가시던 아주머니께서 119를 불러주느냐고 물어보셨다. '어느 정도여야지 구급차에 실려가도 되는 걸까?' 란 고민이 이 와중에 생겼다. 아니면 내가 말을 한 것인가?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에이~ 계단에서 넘어진 건데 몰 119를 불러요. 시간 지나면 괜찮겠지" 나는 기분이 나빴다. ' 119가 필요한지 아닌진 모르겠는데 나중에 괜찮다고 지금 괜찮은 건 아니라고요. 아니 그리고 도와주겠다는데 그냥 가시지 왜 말리고 그러세요, 참나'
살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아주머니가 아직도 서 계셨다. 나에게 다시 한번 119를 불러주느냐고 물어봐주셨다. 안쓰럽다는 표정과 함께. 짧은 시간이지만 일단 종아리 통증은 가라앉고 있음이 느꼈졌다. 발목은 여전히 개 아팠다. 눈물이 나올 정신도 없었다. 다시 지하철이 사람들을 휩쓸고 사라졌고 난 또다시 홀로 계단에서 뒹굴고 있었다.
남편이 너무 생각났다. 내가 계단에서 넘어진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넘어질뻔한 건 사실 꽤 많다. 최근에도 계단에서 미끄러질려던 찰나 남편이 옆에서 잡아줘서 괜찮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나에게 늘 계단에서 주의를 준다. '천천히.'라고. 남편이 오늘 같이 있었다면 안 넘어졌을 것만 같았다.
지하철이 2대 정도 지나갔으니 대충 10분 정도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여전히 다리가 울리고 통증은 있었지만 이제 다리를 안고 있지 않아도 참을만했다. 나는 일어나 보기로 했다. 우두득 거리는 소리가 자꾸 생각이 나서 일어날 수 있을지 무서웠다. 지하철 계단의 손잡이 봉이 내 왼쪽에 있었다. 하필이면 다친 쪽이라서 앉아있는 나의 손에 닿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바닥을 지지했다. 엉덩이가 잠깐 떠오르는 듯하다 바로 푹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필라테스 선생님은 나에게 말씀하셨었지. 걸어 다니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근육이 없다고.
일어나는 것 자체가 막막해지고 있던 찰나. 그때였다. 내 귀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넘어지셨어요?"라고 하면서 내 오른쪽 팔을 단단히 덩굴처럼 감아 잡아주었다. 나는 정말 천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집에 못 가는 줄 알았는데. 나는 오른쪽을 지지해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면서 후딱 왼손으로 계단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왼쪽 다리로 중심을 옮겨서 몸을 지탱했다. 천사님은 나에게 걸을 수 있겠냐고 물어봐주시더니 부축을 해주려 하셨다. 그때였다. 지하철이 승강장으로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의 시간을 빼앗기 미안했다. 괜찮다고 어서 가보시라고 했다. 부끄러움에 머리카락으로 내 얼굴은 가린 채 슬쩍 본 천사는 굉장히 훈훈한 청년이었다. 큰 위로가 되었다.
도움을 요청할 때는 '방금 괜찮을것 같다고 한 아저씨 119 좀 불러주세요' 처럼 구체적으로 지목해서 해야 된다는 걸 들었는데 내가 사고 당사자라서 '아파 죽겠다'란 생각밖에 나질 않았다. 계단에 강제로 머문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멈춰진 발길보다는 후다닥 하고 지나가는 소리들이 훨씬 많이 들렸다. 그리고 도움을 제지하는 사람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도움을 직접 나눠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마무리는 따뜻하게 되었지만 차라리 해외에서 다치는 게 덜 외로울 뻔했다.
ps. 11월 13일 철산역에서 아침 9시 반 ~ 10시 사이에 도와주신 두 분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