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북한의 세 차례 제안, 피하는 남한, 지켜보는 IOC
1957년 9월 소피아 IOC 총회에서 북한의 올림픽위원회는 인준됩니다. 조건부였으며, 북한 선수들이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남한의 KOC를 통해야만 가능한 조건이었습니다. 북한올림픽위원회는 57년 12월 신임 위원장으로 홍명희를 선임하고 본격적으로 남한과 IOC에 대한 활동을 시작합니다. 첫 활동은 다시 남한에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57년 11월 20일과 58년 1월 6일 두 차례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 Otto Mayer에게 편지하면서 남한과의 1960년 로마올림픽 단일팀 구성 의지를 알립니다 (18-1). 동시에 남한에 제안했던 내용을 동봉합니다. IOC 사무국의 입장에서는 최소한 북한이 한반도 단일팀 구성에 선제적으로 적극성을 보인 셈입니다.
북한의 단일팀 구성 제안에도 불구하고 그에 필요한 일들은 전혀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사안이 무시되거나 가벼이 다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KOC, IOC 회장, IOC 사무총장은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죠. 다만 단일팀 구성 당사자는 KOC였고 KOC가 먼저 반응하는 것이 온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KOC는 반응하지 않았고 이에 대해 IOC도 기다리고 있었겠죠.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기에 IOC 회장 브런디지는 이기붕과 이상백을 만나는 기회에 북한의 제안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1958년 7월 2일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8-2).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5월 도쿄 총회에서 만나 로마올림픽에 대비한 단일팀 구성 문제를 논의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조만간 KOC의 공식적 입장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적었습니다 (18-3). KOC가 북한의 제안을 공식적으로 받았던 그렇지 않았던 남한과 KOC는 북의 제안에 답을 해야 할 상황이었죠.
편지를 받은 이상백은 7월 31일 브런디지에게 답신합니다 (18-4). 이 편지에서 이상백은 단일팀 구성이 왜 어렵거나 불가능한지를 설명합니다. 이상백은 비무장지대의 존재, 북한의 만행, 북한의 정치적 이용 가능성, 단일팀 구성 과정에서 발생 가능한 불상사 등을 이유로 단일팀 논의는 로마올림픽 이후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북한이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의 단일팀 구성을 제안한 반면 이상백은 로마올림픽 이후로의 연기를 역 제안한 것입니다.
이상백의 편지 하루 전에는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편지합니다. 이기붕의 편지는 KOC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겠지요 (18-5). 편지에서 이기붕은 비무장지대의 존재, 남북 소통의 단절, 국제정세의 불안 등을 이유로 단일팀 구성 문제는 더 적정한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줄 것을 제안합니다. 이상백의 편지와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상백과 이기붕의 편지를 받은 브런디지는 1958년 8월 14일 이상백에게 답장합니다 (18-6). 브런디지는 KOC의 입장은 이해하나 북한이 단일팀 구성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혔고 다른 공산국들의 지지도 만만치 않으니 그들의 요청에 매우 적정한 답을 내놔야 할 것을 언급합니다. 이후 KOC는 더 이상의 추가적인 의견이나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습니다.
결국 북한의 IOC 사무국을 통한 제안은 브런디지와 KOC 간의 의견과 입장 차이로 어영부영 시간만 지나게 되었죠.
북한은 자신들의 올림픽 단일팀 구성 제안에 대해 거의 1년 동안 누구로부터 어떠한 반응도 받지 못합니다. 기다리던 북한은 1958년 12월 9일 오토 마이어에게 전신을 보냅니다 (18-7).
전신은 해가 바뀌기 전에 단일팀 구성을 위해 남한과 만날 수 있도록 남한을 독촉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남한에 보내는 편지를 동봉한다고도 했습니다. 북한이 남한의 반응을 1년 동안 기다린 것을 잘 알고 있던 오토 마이어는 다음날인 12월 10일 KOC에 전신과 함께 북한의 편지를 전달하고 북한과 최대한 협력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18-8).
홍명희가 이기붕에게 보낸, 오토 마이어가 전한 편지의 내용은, 이전 해인 1957년 12월 18일 편지를 상기시키며, 금년이 가기 전 판문점, 평양, 서울, 어디라도 좋으니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18-9).
북한은 오토 마이어에게 남한의 협조를 요청하는 전신을 보내면서 자신들이 남한에 제안했던 이력을 적어 보냅니다. 아마도 북한은 IOC에게 그간 자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남한이 자신들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단일팀 구성의 귀책이 남한에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겠죠. 북한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북한의 단일팀 구성 제안 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차 제안 : 1957년 6월 10일, 전신을 통해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안 (18-10).
. 이는 IOC 사무총장인 오토 마이어가 우리에게 보낸 1957년 1월 1일 편지를 근거로 한 것이며, 이는 독일의 경우와 같이 한국이 단일팀을 구성하기를 권장하고 제안하는 내용이었음.
. 이 전신에 대해 남한위원회 부위원장인 이상백은 1957년 6월 14일 기자 인터뷰를 통해 단일팀 구성이 불가능하다는 개인적 의견을 피력하였고 이는 남한위원회가 남북한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음.
2차 제안 : 1957년 12월 18일, 남한 위원장에게 편지로 제안 (18-11).
. 이 편지에서 1957년 9월 열린 53차 소피아 총회의 의결에 근거하여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는 데 있어 우리 측 입장을 남한에 제안한 것임.
3차 제안 : 1958년 12월 9일, 남한 위원장에게 편지로 제안 (18-12).
. 이 문제에 대해 UPI 기자에게 1958년 12월 10일 자로 남한 부위원장인 이상백이 어떠한 당위성을 제시하지 못한 채 단일팀 구성의 제안을 거부함.
. 매번 남한 측에 위에서 언급한 제안을 했으며, 이 제안들을 IOC 에게도 보냈으며, 우리가 속한 각 연맹들에도 보내 그들의 지원을 요청했었음.
1958년 12월 18일, 오토 마이어는 남한의 협조를 요청하는 전신을 다시 한번 더 KOC에 보냅니다 (18-13).
북한의 IOC 사무국을 통한 재요청으로 이기붕은 같은 날 (12월 18일) 바로 오토 마이어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18-14). 이기붕은 단일팀 구성을 원칙적으로 동의하나,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상황, 단일팀을 통한 북한의 정치적 전략, 북한의 만행, 한반도에서의 전쟁, 북한위원회의 비체육인 구성, 적정한 시기 모색의 중요성, 독일과의 다른 점 등을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이 편지의 내용은 여름에 도쿄에서 만난 이후 이상백과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과 대동소이했습니다. 남한과 KOC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오토 마이어는 편지를 브런디지에게 전달하면서 이 사안이 쉽지 않음을 자신의 의견으로 메모하여 보냅니다. 오토 마이어는 한반도에서 단일팀 구성이 쉽지 않은 일임을 직감하게 되죠.
결국 북한이 제안한 1958년 중의 남북한 만남은 성사되지 못합니다. 1959년 1월 7일 이상백은 브런디지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씁니다 (18-15).
이상백은 편지에서 지난 1년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민간 여객기 납치, 어선 납치, 간첩 남파, 적화야욕, 정치적 선전과 같은 북한의 행위들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한반도가 독일의 경우와 다름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순수한 스포츠맨이 아니어서 단일팀 구성은 시간을 두고 신중히 검토해야 함을 제안합니다.
이기붕과 이상백의 편지에 대해 브런디지는 1959년 1월 20일 개인적으로 이상백에게 답신하게 됩니다 (18-16). 편지에서 브런디지는 한국 상황을 이해했으며, IOC가 KOC와 상의 없이 행동하지 않을 것임을 언급하게 됩니다. 일단 브런디지는 남한과 KOC의 입장에 서는 것을 확실하게 한 것이죠.
(18-1) 오토 마이어가 북한에 보내는 편지 (1958. 1. 24.) Brundage Collection, NKOC,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2)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58. 7. 2.)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3) 1958년 5월 14-17일, 도쿄에서 IOC 총회가 개최되었으며, 이때 이기붕, 이상백, 월터 정과 몇몇의 대표단이 참가했다. 브런디지의 편지는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에게도 참조로 발송되었다.
(18-4)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8. 7. 31.)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5) 이기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8. 7. 30.)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6)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58. 8. 14.)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7) 북한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전신 (1958. 12. 9.)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8)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전문 (1958. 12. 10.)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9) 홍명희가 이기붕에게 보내는 편지 (1958. 12. 9.)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10) 민주조선. 1쪽. (1957. 6. 12.)
(18-11) 노동신문, 5쪽. (1957. 12. 19.)
(18-12) 민주조선. (1958. 12. 10.)
(18-13)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전신 (1958. 12. 18.)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14) 이기붕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958. 12. 18.)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15)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 7.)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8-16) 브런디지가 이상백에게 보내는 편지 (1959. 1. 20.)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 Otto Mayer, 스위스 사람이다. 한국문제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그 내용을 지켜보았으며 북한이 주로 소통하던 장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