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 인준되는 북한, 불쾌한 남한
북한은 남한의 대한체육회 KOC와는 별개로 독립된 주체로 올림픽에 참가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1956년 멜버른올림픽 총회에서 독립된 국가올림픽위원회 NOC를 인준받기를 원했죠. 북한의 기대와는 달리 인준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IOC의 한 국가 한 NOC 원칙 때문이었죠. 대신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는 북한에게 남한과 함께 한 팀을 만들어 나오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기각은 표면적 이유 말고도 또 있었습니다. 이미 진행되고 있는 소련과 미국을 위시한 냉전이었죠. IOC를 선점한 KOC와 남한의 배경이 되어주는 브런디지 위원장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유했습니다. 멜버른올림픽이 끝나고 월터 정 Walter Jhung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신년 편지는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17-1). 편지에는 브런디지의 국제 스포츠의 역할과 활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최근 멜버른올림픽에서 브런디지가 한국을 위해 북한 인준을 되돌린 것에 대해 감사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산국들의 전면적 공세도 브런디지의 정의와 진실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1956년 멜버른올림픽 총회에서 NOC 인준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북한이 행보를 포기할 수는 없었죠. 북한은 바로 다음 차에 열리는 소피아 총회를 준비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 OCDPRK는 1957년 7월 5일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 Otto Mayer에게 편지합니다. 먼저 북한은 멜버른 총회에서 의결된 IOC의 제안을 따를 것임을 밝히고, 북한이 KOC에 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제안했으나 (17-2), KOC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적습니다.
실제로 편지에는 북한이 단일팀을 구성하자고 수차례 남한에게 제안했고, 최근 6월 10일 남한에 통합체육회를 제안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17-2). 아마도 노동신문을 통한 일방적 메시지로 KOC가 공식적으로 통신이나 편지를 받은 것은 아닐 것이며, 북한은 이것을 제안의 일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편지는 이어 멜버른 총회에서 KOC의 반대로 OCDPRK의 인준이 기각된 것이기에, 단일팀을 구성하려 해도 실현되고 있지 못함을 주장하게 됩니다. 동시에 KOC가 한반도에서 남쪽 지역만을 대표하며 북쪽 지역은 전혀 관할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에 결국 북한 선수들이 올림픽으로부터 배제되고 있음을 호소하게 됩니다 (17-3).
북한의 편지를 받는 오토 마이어는 7월 24일 북한에 답장합니다. 이 답장에서 OCDPRK가 다가올 소피아 총회에서 인준 대상으로 상정될 것임을 알리게 됩니다 (17-4).
북한의 IOC 인준 재신청에 답신한 오토 마이어는 8월 5일 KOC에게도 편지합니다. 오토 마이어는 북한의 신청 편지를 복사하여 동봉합니다 (17-5). 오토 마이어는 남북이 독일과 같은 방식으로 단일팀을 구성할 수 있는지 여부의 의견을 구하면서, 남한 측의 의사를 조만간 있을 소피아 총회가 열리는 9월 22일 전까지 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오토 마이어의 편지를 받은 이기붕은 8월 26일 IOC 위원들에게 편지합니다 (17-6). 이미 멜버른 총회에서 북한의 신청이 한 차례 기각된 터라 또다시 북한이 인준을 신청해 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였겠지요.
편지에서 이기붕은 지난 멜버른 총회에서도 같은 안건으로 편지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KOC는 북한으로부터 단일팀 구성에 대한 어떠한 제안도 받은 적이 없었고, 북한과의 불통, 진행 중인 전쟁, 북한의 호전성, 조만간의 통일을 이유로 한반도에서 또 다른 NOC가 필요 없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의 올림픽에서 북한 출신 선수들이 참여했기에, KOC가 한반도를 대표하는 유일의 NOC임을 다시 명확히 확인시켜줍니다.
이기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OCDPRK는 1957년 9월 소피아 총회에서 인준됩니다. 그러나 완전한 인준은 아니었습니다. 1957년 10월 3일 오토가 북한에 보낸 편지는 북한에게 달린 조건 인준(provisional recognition)이 적혀 있습니다 (17-7).
편지는 조건으로써 이번 인준이 OCDPRK의 북한 영역 내부에서 만의 업무 진행을 허락하는 것이며, OCDPRK는 국제적 권위를 부여받지 못했음을 적고 있습니다. OCDPRK의 권위는 오로지 북한 내부에서만 유효하다는 뜻이었죠. 그리고 북한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하고자 할 때는 서울에 있는 KOC와 단일팀을 구성하는데 동의하고 그렇게 해야 만이 가능함을 적습니다.
IOC 총회 회의록에는 소련 위원인 안드리아노프(Constantin Andrianov)가 OCDPRK의 인준을 추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7-8). 북한에 보내진 편지는 KOC에게도 참조로 보내집니다.
현재 IOC 홈페이지에서 북한올림픽위원회의 인준 일자를 찾으면 1957년으로 적혀있습니다. 비록 조건부 예비 인준이라도 소급되어 소피아 총회의 인준을 해당 일자로 적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북한은 새롭게 체제를 정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IOC가 조건으로 내세운, 단일팀 구성을 통해서만 북한 선수가 출전할 수 있음에 대한 이행의 전략을 추진하게 됩니다.
소피아 총회 직후인 1957년 12월 OCDPRK의 새로운 위원장으로 홍명희가 선임됩니다. 해를 넘기기 직전인 12월 18일 홍명희는 노동신문을 통해 이기붕에게 공개서한을 보냅니다 (17-9). 서한에서 홍명희는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자며, 1958년 적당한 장소에서 만날 것을 제안합니다. 후일 이기붕은 홍명희의 이러한 제안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게 되죠. 아마도 노동신문을 통한 메시지였기 때문일 것이고 북에서는 ‘제안했다’ 남한에서는 ‘우린 모른다’의 자세였을 것이죠. 다만 12월 20일 경향신문은 북한의 제안을 기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7-10). 홍명희의 공개 편지는 개략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IOC 53차 총회에서 남북한 선수들이 한 팀으로 출전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귀하를 통한 이 편지는 남한위원회와 선수들에게 전해지는 북한위원회의 편지입니다. 북한위원회는 이번 결정을 환영하며 남북선수들의 발전을 위해 단일팀을 구성하는 것에 찬동하고 빠른 시간 내에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단일팀이 구성되면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증명된 바 있는 노력과 재능의 단결로 더 좋은 전통과 역량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단일팀을 구성해 17회 올림픽에 동반 출전하기를 바랍니다. 양측 위원회가 합동으로 실제적인 구체적 질문을 논의하기 위해 1958년에 적정한 장소에서 대표들이 만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제안이 고려되고 남북한이 스포츠맨십으로 양쪽 국민과 선수들을 위한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17회 올림픽이란 1960년 로마올림픽을 말하며, 이 편지 작성일을 기준으로 하면 약 2년 반을 남긴 시점입니다. 남한 측은 이번에도 전혀 대응하지 않습니다. 굳이 그러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북한과의 접촉은 북한을 이롭게 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북한은 1964년 인스부룩 동계올림픽과 1972년 뮌헨 하계올림픽을 처음으로, 그리고 독자적으로 출전하게 됩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노력과 결정과 제안이 모두 무력화되었기 때문이고, 이 모든 것은 남한의 비협조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17-1) 월터 정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57년 1월 2일).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7-2) 노동신문 (1957년 6월 11일). ‘남북조선올림픽위원회를 련합하여 유일한 조선팀을 구성하자.’
(17-3). 북한이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1957년 7월 5일). Brundage Collection, NKOC,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7-4) 오토 마이어가 북한에 보내는 편지 (1957년 7월 24일). Brundage Collection, NKOC,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7-5) 오토 마이어가 KOC에 보내는 편지 (1957년 8월 5일).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7-6) 이기붕이 IOC 위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1957년 8월 26일). Brundage Collection, Lee Ki Poong 1955-60,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7-7). 오토 마이어가 북한에 보재는 편지 (1957년 10월 3일). Brundage Collection, NKOC,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7-8). CIO, Minutes of the 53rd session of the IOC in Sofia,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Archives CIO Consultation Hard Drive’, OSC, Archive, IOC, Lausanne.
(17-9). 노동신문 (1957년 12월 1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게 서한’
(17-10). 경향신문 (1957년 12월 20일). ‘단일선수 보내자고 괴뢰, 오륜에 궤변’
홍명희 (1988-196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우리에게는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