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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대택 Apr 22. 2020

016 올림픽 역사에서
‘한국문제’를 아십니까?

7년간의 IOC 골칫거리 ‘한국문제 Korean Question’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는 한반도를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해방 직후 국제올림픽위원회 IOC에 인준되고 1948년 생모리츠 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한 분단과, 냉전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한과는 서로 따로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올림픽에 남한과 북한이 따로 나간다는 것은 IOC가 남북한을 서로 다른 주체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수차례 브런치 글에서 언급했듯이, IOC는 처음부터 한반도에 남북한 두 개의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47년 인준 당시, IOC는 해방된 조선을 하나의 실체로 생각했고, 그래서 ‘코리아 Korea’에 인준을 주면서도 남북이 하나의 팀으로 나오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1947년 IOC가 코리아를 인준해 주면서 여운형과 이원순에게 이 사실을 명확하게 했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16-1, 16-2). 


한국전쟁은 이 모든 전제와 당위를 흔들어 버립니다. 전쟁 후 남한은 북한의 선수를 올림픽에 데리고 나갈 수 없게 되었고, 북한 또한 이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북한은 IOC에 요청합니다. 자신들도 남한과는 다른 선수단을 구성해서 올림픽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이죠. 그런데 IOC는 이를 수용할 수 없었습니다. IOC는 한 국가 한 팀의 대원칙이 있었고 이미 한반도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 KOC가 엄연히 있었으니까요. 


IOC는 북한에 이릅니다. 남한을 통해 오라고. 북한은 그럽니다. 남한이 우리 선수를 끼워주지 않는다고. 다시 IOC는 남한에 이릅니다. 북한 선수들을 데리고 오라고. 남한은 그럽니다. 분단 상황이라 어렵다고. IOC는 ...... 또잉!



한반도에서 꼬여버린 IOC 기조와 한국문제의 시작 


상황이 고약하게 꼬여버렸습니다. IOC가 입장이 난처해져 버린 것이죠. KOC를 인준해 줄 때만 해도 한반도 전역에서 선수가 선발되어 올림픽에 나올 것이라 생각했건만 전쟁이 상황을 바꿔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남북 양측이 서로 소통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북한은 IOC에게 ‘해 달라’하고, 남한은 IOC에 ‘상황이 안 좋아서....’했던 것입니다. IOC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IOC는 당시 이 상황을 ‘한국질문 Korean Question’ 또는 ‘한국문제 Korean Problem’으로 불렀습니다. 1959년 3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올림픽위원회 OCDPRK 위원장 홍명희와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 Otto Mayer 사이의 서신교환에서 이 두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16-3, 16-4). 1959년 5월 IOC 뮌헨 총회와 10월 파리 집행위원회의 회의록은 ‘남북한 문제 Problem of South and North Korea’로 적고 있기도 합니다 (16-5).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1960년 7월 9일 편지의 제목은 ‘한국질문 Korean Question’이기도 합니다 (16-6). 



한국문제에 걸려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던 북한 


한국문제는 북한이 독립적으로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신청서를 제출한 1956년 11월 멜버른 총회부터 북한이 정식으로 인준을 받는 1963년 10월 바덴바덴 IOC 총회까지 장장 7년 동안 지속됩니다. 다시 말해 북한은 최소한 1964년 동경올림픽까지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는 권한과 방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북한의 공식적인 최초 올림픽 출전은 1972년 뮌헨올림픽이었습니다. 이는 북한의 올림픽 참가 최초 신청일로부터 16년이 지난 시간입니다. 남한이 해방 후 바로 1948년 올림픽에 참가한 것에 비하면 북한은 해방 24년 후에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6-7). 



한국문제의 본질은?


IOC로서 ‘한국문제’는 어떻게 남북한으로 나뉘어 있는 선수 모두를 올림픽에 참가시킬 수 있을지의 방안은 찾는 것에 있었습니다.


처음에 IOC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올림픽 선수단 파견과 관련한 신청이 왔을 때도 IOC는 양측에 독일의 경우를 소개했죠. 독일의 경우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었고 IOC는 양쪽에 독립적으로 두 개의 국가올림픽위원회 NOC를 인준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올림픽 출전은 한 팀으로 나올 것을 요구했고 실제로 1956년 이탈리아 코르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에 독일은 단일팀이 참가하게 됩니다. 


IOC는 독일의 경우를 한반도에서도 기대했던 것이죠. 그리고 남북한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독일의 경우를 적용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아주 당연히 그러면서도 단호히 말이죠. 편지에서 IOC 사무총장 오토 마이어 Otto Mayer는 올림픽헌장과 올림픽 규정을 강조하면서 양쪽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IOC가 상황을 단순히 생각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한국문제는 보다 복잡했고 다자간의 이해가 얽힌 상황으로 전개되고 맙니다. 한국문제가 해결되기까지 7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이유이기도 합니다. 엄밀하게는 해결이라 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고 결국은 결렬 또는 파행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한의 IOC 가입 신청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이 글은 제 브런치 글 ‘015 우리 북한도 IOC 가입을 원합니다’에 이어 읽으시면 좋습니다. 015 글이 북한의 1956년 멜버른 총회 가입 신청 과정을 얘기한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글 015를 한국문제의 ‘발단’ 이야기 정도쯤으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16-8). 앞으로 이 글을 서두로 몇 개 이상의 시리즈 글이 나갈 것입니다. 내용의 혼선이 있을지 몰라 글은 시간 흐름별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용자료 


(16-1) 브런디지가 여운형에게 보낸 편지 (1947년 7월 10일).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6-2) 브런디지가 이원순에게 보낸 편지 (1947년 7월 14일). Brundage Collection, KOC-01,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6-3) 오토 마이어가 홍명희에게 보내는 편지 (1959년 3월 20일).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6-4) 홍명희가 오토 마이어에게 보내는 전신 (1959년 3월 20일). Brundage Collection, North Korea Olympic Committee,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6-5) CIO, ‘Comité International Olympique - Session et CE – 1894-2013’, ‘Archives CIO Consultation Hard Drive’, OSC, Archive, IOC, Lausanne.


(16-6) 이상백이 브런디지에게 보내는 편지 (1960년 7월 9일). Brundage Collection, Lee, Dr. Sang Beck, 1946-1966, Olympic Studies Center, 로젠, 스위스.


(16-7) 북한의 최초 올림픽 참가 기회는 1964년 도쿄올림픽이었다. 그러나 IOC는 북한의 참가권을 박탈하였고, 북한은 부득이 선수단을 철수한다. 당시 중국, 인도네시아 등 신흥국을 주축으로 한 GANEFO (The Games of the New Emerging Forces) 경기대회의 일원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공식적 첫 하계올림픽 참가는 1972년 뮌헨올림픽이 된다. 


(16-8) 1956년 멜버른 총회 이전, 1952년 5월 31일에 이미 북한은 헬싱키올림픽위원회에 전신으로 올림픽 참가 의사를 보냈으며, 이것이 최소의 올림픽 참가 의사 표명이다. 그러나 이는 IOC와 무관한 북한과 헬싱키올림픽위원회 간의 단순 교신으로 여겨진다 (참고; 최진환, 2020. IOC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 승인에 관한 연구. 박사학위논문. 북한대학원대학교. pp. 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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